생물학의 두 전통

생물학에 확연히 구분되는 두 개의 전통이 있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여기저기 써왔다. 아이러니하겠지만, 생리학의 전통은 라마르크로부터 시작된다. 라마르크가 최초로 생리학을 기본으로 하는 ‘생물학’이라는 단어를 제안했으며,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의 획득형질의 진화는 <동물철학>의 일부에 불과하다.

생물학은 지상계 물리학의 세 가지 분야 중 하나이다. 생물학은 살아 있는 물체와 그 조직화에 관계된 것들을 포함하고, 그들의 발생학적 과정과, 지속적인 생기의 움직임으로부터 야기되는 구조적 복잡성 및 특별한 기관을 만들어내는 경향, 중심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생명체를 주변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들을 다루는 학문이다. 라마르크, 1802년

자연사의 전통은 다윈을 대표주자로 삼는다. 생물학의 가장 오래된 분과인 분류학을 시작으로 자연사의 전통은 근대과학으로서의 생물학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다윈은 자연사의 전통이 젊은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낡은 것으로 치부되던 19세기 말에 자연사의 전통에 발을 디딘 아마추어 박물학자였다.

모든 분과학문에는 그 학문에 특수한 규약들이 존재한다. 생물학의 두 전통도 그렇다. 실험에 중점을 두느냐, 관찰에 중점을 두느냐의 방법론적인 차이들은 결국 해당 분과학문이 연구하는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변화시키며, 이러한 차이가 오래 지속되면 해당 분과학문의 이론과 가설들에는 독특한 흔적들이 남는다. 19세기말~20세기중반까지 사회과학의 여러분과들이 형성되는 과정이 이러한 탐구에 도움이 된다. 심리학이 근대과학이 되는데에는 통계학의 도움이 절실했으며, 그 과정에서 심리학자들은 독특한 방법론적 경향을 형성하기도 했다. 경제학에서 통계학적 개념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과정도, 그런 치열한 고민과 논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1980년대의 인지과학 혁명이라는 것도, 심리학의 연구로부터 불만을 느낀 젊은 학자들에 의해 방법론을 새롭게 조직하는 방법으로 구성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나타나는 것이 각 학문 분과들이 지닌 암묵적인 규약들이다. 이런 규약들은 해당 분과를 직접 경험하는 학자들이 아니라, 그 외부에 있는 혹은 서로 다른 규약들을 지닌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본 이들에 의해 더욱 잘 포착된다. 특히, 한 분야에 매몰되어 있는 학자일 수록, 자신의 학문이 지닌 암묵적 규약들을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들에겐 비교의 대상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리학과 자연사의 전통이 생물학 연구의 전통에서 어떠한 차이를 지니는가의 문제도, 진화학자들이나 혹은 생리학자들, 그리고 진화론만을 기반으로 생물철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잘 포착되지 않는다.

생물학의 두 전통이 생명체 연구에서 어떻게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어떤 연구방법론으로 이어지는지는 윌리엄 해밀턴의 ‘친족선택’을 예로 들어 설명이 가능하다. 해밀턴은 친족선택 개념으로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운다. 이덕하의 설명이 깔끔하다. 해밀턴의 법칙(Hamilton’s rule)중 ‘근친계수’와 ‘친족선택’에 관해서는 이 글을 참고하면 된다.

외할머니는 사회적 손자가 자신의 유전적 손자임을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딸이 낳은 자식이기 때문이다. 반면 친할아버지의 경우에는 두 단계의 불확실성이 있다. 친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손자의 아버지)이 과연 자신의 유전적 아들인지 ‘확신’할 수 없다. 게다가 그 아들(손자의 아버지) 역시 손자가 자신의 아들인지 ‘확신’할 수 없다. 친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경우에는 한 단계의 불확실성이 있다.

그렇다면 외할머니의 사랑이 가장 크고, 친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사랑이 그 다음으로 크고, 친할아버지의 사랑이 가장 작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결과다. 왜냐하면 엄마의 사랑이 아빠의 사랑보다 더 큰 이유는 임신과 수유의 경험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외할머니는 손자를 임신하지도 수유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할아버지의 사랑이 친할아버지의 사랑보다 더 크다면 사랑의 크기를 남녀의 차이로 설명할 수도 없다.

한국처럼 보통 아이가 친할머니, 친할아버지와 같이 사는 문화권에서는 문제가 복잡해진다. 모든 사람들이 다 알듯이 가까이 지내는 것이 사랑의 크기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동등하게 놓고 연구했을 때 즉 같이 지내거나 만다는 정도를 같도록 하고 연구했을 때에는 친족 선택의 모델과 부합하는 결과가 나왔다. 즉 외할머니의 사랑이 가장 컸고, 친할아버지의 사랑이 가장 작았다. <친족 선택과 역공학 – 인간의 사례> 중에서

즉, 진화학자 해밀턴은 외할머니가 손주를 더 사랑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포괄적응도라는 수학적 모형을 이용해 이를 설명한다. 과학철학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설명방식이 ‘궁극인’에 대한 설명방식이다. 이러한 설명방식 속에는 “도대체 어떤 기제(mechanism)에 의해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적 증거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밀턴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기반들은 자연에서 관찰된 ‘현상’들과 그의 ‘모형’이 얼마나 일치하는가로부터 지지된다. 물론 진화학이 해밀턴의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실험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대체로 진화생물학자들은 외할머니가 손주를 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생리학적’ 원인들에는 무관심하다.

해밀턴의 이론을 접한 어떤 생리학 전통의 과학자는 다음과 같은 연구를 설계해볼 수 있다. “외할머니는 어떤 인지과정을 거쳐 손주와 자신의 근친계수를 판단하는가?” “시각적으로 유전적 근친도를 계산할 수 있는가?” “이러한 믿음을 판단하는데 필요한 두뇌의 부위는 어디인가?” 즉, 진화생물학자들이 미루어놓았던, 혹은 자연사의 전통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질문이 되지 않던 질문들이 생리학자에겐 이 현상을 두고 더욱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게 된다. 과학철학자들은 이러한 질문을 ‘근접인’에 대한 연구라고 부른다.

물론 두 분야가 너무 오래 대화를 하지 않게 되면, 양 진영의 학자들은 이처럼 융합연구가 가능한 주제를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다. 실제로 해밀턴의 법칙이 영국왕실과 조선왕실의 역사를 통해 증명 되었지만, 도대체 어떻게 인간에게 이런 판단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생리학적 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동물실험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런 연구를 하고 싶다. 진화생물학의 전통에서 펼쳐놓은 수없이 많은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생리학적 증거들을 발견하고 싶다. 그리고 이번에 내 논문은 그런 내 소망에 대한 첫 대답이다. 실제로 내 연구의 주제였던 ‘초파리의 교미시간’은 영국의 진화생물학자에 의해 2008년경 처음으로 알려졌는데, 이들은 왜 경쟁수컷과 함께 자란 수컷초파리들이 홀로 자란 수컷보다 섹스를 오래하는지에 대한 ‘생리학적 기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증거도 내놓지 않았다. 내 연구는 바로 그 생리학적 기제에 필요한 자극, 유전자, 신경회로들을 밝힌 것이다.

진화의학에 관한 개론서는 오래도록 조지 윌리암스와 랜돌프 네세의 책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뿐이었는데, 최근에 한국에 한 권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 마크 핸슨과 피터 글루크먼의 <문명이 낯선 인간>이라는 책이다. 조지 윌리암스와 다윈의학을 정초한 네세 교수야 원래 의사였지만, 이번에 <문명이 낯선 인간>을 저술한 마크 핸슨의 이력이 독특하다. 그는 동물생리학으로 박사학위를 한, 전형적인 생리학 전통의 과학자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인데, 진화심리학 저널이 이들의 진화의학 교과서를 그다지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예전에 진화의학에 관한 논문을 쓸때, 왜 진화의학이 현대의학과 충돌하는 것인지, 왜 그다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지에 대한 짧은 소견을 쓴 적이 있다. 서양에서는 진화의학이 학제속으로 어느정도 편입되어 들어가는 것 같아 보이는데, 아마도 충돌하는 두 생물학의 전통이 융합되는 과정에 마크 핸슨 같은 이의 역할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진화의학과 현대의학의 충돌 지점도 내 관심사 중 하나인데, 언젠가 이 문제를 다룰 일이다. 우선은 2007년 내 논문의 말미를 옮겨둔다.

이제 뒤로 미루어 놓았던 한 가지 질문에 답을 해야 할 차례다. 다윈의 이론이 체계적으로 질병에 적용될 때까지 왜 백 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의학이 진화적 사고에 저항하는 이유를 의학 그 자체의 특징과 의사라는 학문의 실행자로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여기서는 의학의 학문적 특징으로 인한 이유만을 제시할 것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진화론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는 종교적 성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의사 개개인의 종교적 출신으로 인해 진화론이 거부되는 것은 불운한 일이지만 이 논문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다.

윌리암스와 네스는 이러한 의학의 저항에 대해 세 가지의 답변을 제시한다. 첫째, 질병에 대한 진화적 가설을 수립하고 이를 검증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질문은 쉽지만 검증은 정밀함을 요한다. 둘째, 진화생물학이 최근에 이르러서야 발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책임은 의사들이 아니라 진화생물학자들에게 있다. 진화학자들은 지나치게 현학적인 질문들에 시간을 낭비해 왔는지도 모른다. 셋째, 의학 분야에 존재하는 독특한 성향이 진화의학의 적용을 막았을 수 있다. 자연선택에 대한 반감, 의학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실험방법에 한 특유의 강령, 생기설에 대한 부정으로 인한 부작용등이 그것이다. 오랫동안 의학은 생기론을 물리치려고 노력해왔는데, 이런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의학자들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 오류투성이인 합목적주의(teleology) 역시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물학의 기능적 설명은 미래가 현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지만 번식과 자연선택의 연장선상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의학은 합목적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다가 도리어 현대 진화학이 이루어 놓은 확고한 진보의 이득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의학의 특징에 진화론을 거부하는 요소가 있는지는 연구해볼 만할 가치가 있는 중요한 주제다. 전통적으로 생물학과 관련된 학문 분야에는 두 가지 종류의 질문이 존재한다. 이를 근접인과 궁극인으로 구분한다. 의학은 근접인, 즉 생리학적 질문에 답하는 학문이고, 진화학은 궁극인, 즉 진화론적 질문에 답하는 학문으로 존속해 왔다. 따라서 진화학은 역사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는 분야이다. 역사적 성격의 과학은 실험실에서 검증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게다가 직접 환자에 적용해야만 하는 강박감을 가지는 의사들의 경우, 검증이 어려운 진화론적 해결책을 바로 현장에서 시술한다는 것은 위험한 도박일 수 있다. 따라서 진화의학을 주장하는 과학자들과 의사들도 의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단지 고려해달라고 주장할 뿐이다. 이러한 고려가 현장에서 적용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우선 의학대학원에 진화론을 포함한 커리큘럼이 포섭되고 예방의학과 전염병학을 중심으로 진화의학의 해결책들이 테스트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야 임상의학 분야에 대한 적용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진화의학이 많은 진화학자들과 생물학자들, 그리고 일부 의사들에게서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반론은 종교적 기저를 가진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제로 진화의학이 제기하는 전제들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는 몇 가지 의견이 존재한다. 첫째, 과거 우리 조상들이 살던 환경이 정말 건강에 도움이 된다면 도대체 왜 현대인이 수렵채취인보다 더 오래 사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은 이미 진화의학에서 어느 정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수명이 지금처럼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은 개개인의 생활양식에 있어 현대인의 것이 더욱 적합하기 때문이 아니라, 상하수도의 분리나 항생제의 개발 등과 같은 공공정책에 힘입은 바 크다. 따라서 현대인의 수명이 증가했다는 것이 진화론적 사고의 효용성을 제한하지는 않는다. 둘째, 신석기 농업혁명 이후로 인류의 유전형질이 현대의 환경에 적응되었으므로, 즉 농업혁명 이후에 매우 빠른 속도로 자연선택이 인류에게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우리의 몸이 홍적세에 적응되어 있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반론이다. 하지만 최근의 유전학적 성과들과 진화의 속도에 관한 최근의 연구들, 인종간의 차이에 관한 집단유전학적 성과들은 신석기 농업혁명이 인류의 유전자풀에 가한 변화가 미미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셋째, 진화적 환경적소(EEA)가 만약 매우 다양했다면 진화의학이 제공하는 설명력은 매우 약해질 수 있다는 반론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은 EEA의 다양성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해도 그 공통점이 더 크기 때문에 무시될 수 있다. 넷째, 인간의 적응능력이 타종에 비해 매우 우월하므로 변화한 현대환경에도 인간은 쉽게 적응할 수 있다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적응능력이 정말 우월하다고 해도 생물종은 자신이 적응했던 그 환경에서 더욱 건강한 삶을 영위한다. 즉 생물종의 유전체가 선택된 그 환경이 건강에도 유리한 환경이라는 점이 자명하므로 인간의 적응적 우월성은 건강을 고려한다면 반론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이러한 반론들에 대해 진화의학은 모두 답변할 준비가 되어 있다. 또한 이러한 반론들은 역사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을 실천적 학문인 의학에 적용시키기 위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중요한 질문들이다. 따라서 진화론적 사고는 다양한 방식으로 검증되어야 하고 반박가능하다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처럼 증거에 기인한 합당한 반박이 아니라 개인의 신념에 근거해서 증거를 무시하는 반박의 경우 오히려 의학의 발전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할 수도 있음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 사례를 통해 본 진화의학의 가능성> 중에서

이런 와중에, 초파리가 숫자를 셀 수 있다는 뉴스가 와이어드지를 통해 오늘 공개되었다. 윌리암 라이스 (William Rice)라는 나름 초파리 실험진화쪽에서는 유명한 교수가 오타와의 진화관련 학회에서 발표를 한 모양인데, 나로서는 아직 믿기 힘들지만 (하지만 발표한건 맞다), 언젠가 이 논문이 출판되면 이 형질을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어떤 유전자와 신경회로들이 이 행동을 조절하는가의 관점, 나의 전통 속에서 말이다.

 

2 thoughts on “생물학의 두 전통

  1. 해밀턴의 가설 설명 두 번째 문단 “~친할아버지의 사랑이 가장 크다고…” -> “~작다고…”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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