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아카이브 (2002-2013), 취어생 (2002-2008)

한국의 멘델연구: 할말 없음

http://heterosis.egloos.com/773097 원문


2005년 10월 11일, 멘델 주간에. 관련 논의는 이곳을 참고

백대현이라는 분이 누군지는 개인적으로 알고 싶지 않지만 과학교육학회쪽의 연구를 제외한 멘델관련 논문은 이분 것이 유일합니다. 논문이 총 3편있는데, 한편은 멘델의 전기나 마찬가지이고, 두번째 논문은 정체불명의 성격이며, 세번째 논문은 그 유명한 1865년 논문을 번역한 것입니다. 

강순자라는 분이 “멘델 실험에서의 한가지 수수께끼”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다루는 유전자쌍 개념이 아니라, 멘델이 정말 독립의 법칙을 주장하기 위해 모든 조합을 다 실험했겠느냐는 겁니다. 이후에 밝혀진 완두콩 유전자지도에 따르면 멘델이 선택한 형질을 결정하는 몇몇 유전자들의 교차율이 매우 낮아서 (가장 낮은 경우가 8%) 독립의 법칙을 밝혀내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자신이 실험한 모든 결과를 발표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이는 물리학에서도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는 겁니다. 과학에서 일반화와 추상화는 필수적이므로 과학자들은 몇가지 예외에 크게 집착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행했던 실험의 대부분이 자신이 설정했던 가설에 들어맞는다면 나머지 실험결과들은 나쁜의도에서가 아니라 훗날 누군가가 정교하게 다듬어주기를 바라며 무시되거나 묻혀지게 됩니다. 

강순자씨의 이러한 관점은 실제 과학자들의 작업을 신성화해 놓고 한 과학자를 바보로 만드는 실수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그물을 펴놓고 역사상의 모든 과학자들을 걸러내어 본다면 그 누구도 그 그물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여하튼 국내 멘델 연구는 없었거나 아무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유전학과 진화론의 종합에 관해서는 번역서도 없으며 대중서만 몇권 있으나 잘 아시다시피 이런 대중서들 (대표적으로 도킨스)이 그리는 종합의 역사는 날조이거나 허구이거나 지나친 치장입니다. 할말이 없다는 것은 개판이라는 것이 아니라 말할만한 건덕지 자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과학사는 물리학에 집중되어 있었거나, 생물학사가들조차 사회진화론, 우생학등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한국과학사학회의 대부분의 연구가 한국과학사에 관한 것이므로 멘델이 등장할 틈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http://www.khss.or.kr/ 이곳에서 직접 확인해보시면 됩니다. 

멘델이 이런데 기무라는? 당연히 전무합니다. 

일견 이해는 갑니다. 과학의 후발주자로서 과학사라는 학문을 해야했던 사람들이 취한 생각은 한국에도 과학이 존재했음을 연구하여 널리 알리는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분들에게 한국과학사학회는 과학이라는 학문과 한국의 전통을 어떻게든 연결시키려는 단체가 되어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한국이라는 나라를 과학이라는 거대한 땅에서 내쫓아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한국과학사라는 틀에 얽매어 실제 과학현장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찾아보고 연구하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훗날 진짜 한국에서 벌어졌던 과학사적인 사건들을 세계속의 과학사적 사건과 연결시킬 수 없을 겁니다. 과학사의 시각이 편협해진다면 과학의 시각도 편협해집니다. 한국에서 교육받는 과학자들에게 넓은 시각을 길러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첫째, 외국의 사상을 그대로 베끼거나 둘째, 아무 사상도 가지지 못한 채 노예로 살다 죽거나 셋째, 지나치게 외고집의 전통주의자가 되어버립니다. 한국의 과학사연구는 따라서 과학자들의 연구 못지 않게 소중합니다. 그런데 이런 소중한 직책을 짊어진 분들이 편협한 시각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안일한 시각만을 고수한다면 한국의 과학엔 아무런 미래도 없습니다. 

한국에 과학이 없다는 탄식을 내뱉곤 해도 한국에 과학이 없으리라고 저주하지는 않습니다. 황교주의 등장과 한국 과학계의 기형적 팽창은 어쩌면 한국과학사가들의 몫이기도 합니다. 기형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과학이 과학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채 경제논리에 따라 비대칭적으로 그 규모만을 늘려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럴 경우 한국의 과학은 어른의 옷을 입은 갓난아이를 닮아가게 되며, 이는 그 어떤 창의적인 이론과 가설도 없이 서구의 뒷꽁무니만을 끊임없이 쫓아가는 미래를 보지하게 될 겁니다. 

과학을 제어하겠다는 환상을 잠시 접고, 우선 이 나라의 과학이 제대로 모습을 갖추도록 합시다. 그리고 나서야 과학자들의 정치공작과, 과학자들의 권력과 과학의 권력에 대해 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과학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과학을 욕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