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아카이브 (2002-2013), 취어생 (2002-2008)

분자전쟁: 다윈에서 황교주까지

http://heterosis.egloos.com/773108 원문


2005년 10월 19일, 나름대로 정리해본 19세기~20세기의 생물학사. 관련 논의는 이곳을 참고


분자전쟁 A Molecular War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의 연결성이 부족했던 다위니즘은 자연선택이라는 모호한 가설을 화두로 한세기를 버텨야만 했다. 1859년 다윈이 <종의기원>을 출판한 이래로 논란이 계속되던 이 가설에 대한 몇가지 오해가 있다. 첫째, 다윈에게 반대한 것은 창조론을 신봉하는 일부 대중과 신학자들만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멘델의 후예라 일컫는 유전학자들도 다윈에 반대했다. 다윈의 가설은 멘델의 측정량처럼 과학자들에게 확실성을 보장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과학자들의 이러한 반대는 오히려 정당한 문제제기로 볼 수 있다. 둘째, 논란의 시기에 등장한 선동가들조차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유전학적/수학적 논쟁에서 피셔, 홀데인, 라이트는 모두 의견이 달랐고, ‘진화종합설’의 설계자들인 마이어, 심슨, 도브잔스키 조차 진화에 대한 의견을 달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더이상 논쟁을 계속하면 다위니즘 자체의 붕괴가 올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집단유전학으로 확장된 멘델의 유령은 점점 더 그 위세를 확장하고 있었고, 반면 다윈의 후예들은 자연선택이라는 가설 하나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멘델의 후예들을 끌어 안지 못한다면 100년간의 고통은 보상받지 못할 것이었다. 결국 이들은 과학의 역사상에서 듣도 보도 못할 ‘종합’이라는 것을 이루어내고야 만다. 종합은 과학자 사회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나 과학학술지에 등재된 실험적 증거, 또는 논문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종합은 이들 선동가들이 시리즈로 출판한 책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사가들은 전한다. 누구의 말이 옳든, 여하튼 종합은 이루어졌다.

이렇게 이루어진 종합은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고, 구세대 생물학자들은 몇년간의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이제 유전학과의 마찰이 줄어들 것이고, 다윈의 이름 아래에 서 있는한 연구비 걱정 없이 자신들의 이름을 후대에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이었다. 그 때 이들이 개무시하던 일군의 환원주의자들이 일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자연을 쪼개고 또 쪼개면 언젠가 자연의 참모습을 알 수 있을것이라고 믿던 전통속에서 일이 터지고야 만것이다. 이러한 전통에 대한 다윈 후예들의 개무시는 훗날 분자전쟁사에서 이들이 보여준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이 환원주의자들의 무리들이 공유된 믿음으로 놀라운 도구들을 만들어 낸 것이 이들 승리의 요인이었다. 혁명의 잔치속에서 안심하고 있던 다윈의 후예들은 놀라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식을 이용한 분석과 관찰에는 능했으되 도구를 만들고 무식하게 분석하고 자연을 쪼개는 일에는 능숙하지 못했고, 그러한 일을 천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귀족들의 취미생활이었던 박물학의 전통속에서 그들은 손에 기름때를 묻히는 일은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 기름때 풀풀나는 환원주의자 무리들이 저지른 혁명의 이름은 ‘분자혁명’이다. 이들은 유전물질의 신비를 밝혀내고야 말았다. 유전의 기제는 AGTC라는 디지컬 코드로 설명되는 매우 간단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한세기에 걸친 사투끝에 억지로 혁명을 이루어 놓고 한숨을 쉬던 다윈의 후예들은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이대로 두게 되면 이 새롭게 치고 올라오는 환원주의자 무리들이 자신들이 일궈놓은 영역을 침투할 것이 명백했다. 진화종합의 선동가들이 그 책임을 지고 늙은 몸을 이끌고 전투에 나섰다. 마이어, 심슨, 도브잔스키는 분자/형태 진화에서 보이는 차이를 지적하고자 갖은 애를 쓰기 시작했다. 이들은 분자생물학과 진화론을 다루는 심포지움은 모두 쫓아다녔고 자신들의 견해를 선전했다. 아는 인맥을 총동원하고, 가진 능력을 다 발휘한 이들의 노력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이들은 가장 먼저 당시 떠오르던 신예 생화학자들을 겨냥했다. 주커캔들과 라이너스 폴링이 이들의 시야에 잡혔다. 이 당찬 신예들은 진화론을 분자의 차원에서 다시 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개개의 분자 하나에서 나타나는 변화는 선택에 노출되지 못한다는 선동가들의 주장은 이들 신예에게는 확실히 반박하기 어려운 숙제였다. 선동가들은 환원주의에 대항하는 전일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논변을 사용했다. 이들에게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었다.

이들의 집요한 공세에 밀려 주커캔들과 폴링은 항복을 선언했다. 결국 이 신예들은 선동가들에게 그들의 지위를 박탈하지 않을테니 그들의 자리로 돌아가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했다. 분자차원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선동가들이 일구어 놓은 유기체 차원의 설명영역에 어떠한 수정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맹세가 주어졌다. 선동가들은 잠시 안심했다. 그러나 이 소동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반박을 명확히 해야만 한다는 긴장감을 심어주었다. 마이어는 이러한 긴장감을 ‘근인과 원인’으로 표현했고, 심슨은 ‘다위니안과 데카르티안’으로, 도브잔스키는 ‘진화의 불빛에 비추지 않고는 생물학의 어떤 것도 의미를 잃는다’는 가장 과격한 어투를 사용했다. 선동에 있어 이들은 가히 천재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문제가 터졌다. 이번에는 동양에서 날아온 까만눈의 촌스런 학자였다. 그는 겨우 몇명만이 이해한 어려운 논문을 들고 학회장에 나타났다. 많은 이들이 이 학자가 이야기한 요지의 중요성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신중한 사람이었고 꼼꼼한 과학자였다. 그의 이름은 집단 유전학자 기무라라고 했다. 그러나 이 과학자와 거의 동시에 킹과 주크라는 과학자들이 완전히 다른 생화학적 전통속에서 ‘비다윈적 진화’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말그대로 도발적이었다. 이들에게 분자차원에서의 변이는 중립적이었고, 유기체 차원에서 적용되는 선택은 분자차원에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스스로를 다위니안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기무라는 이 도발적인 학자들에 의해 덤탱이를 쓰게 될 운명이었다. 당시의 생화학자들에게 아무런 논쟁거리도 되지 않았던 유전자차원에서의 중립적 돌연변이는 유전학자들과 진화학자들에게는 생각해서도 안될 성스러운 부분에 대한 모욕이었다. 기무라와 킹, 주크는 다윈의 후예들이 정성스럽게 쌓아놓은 ‘종합’의 제단에 돌을 던지는 짓이었던 것이다. 다시 선동가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 등장한 신예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들은 강력하게 반발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강력한 반발은 심슨으로 하여금 비정합적이고 비과학적인 발언까지 서슴지 않게 했다. 이제 이 선동가들이 가진 무기라곤 자연은 복잡하며,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며, 분자차원에서의 변화와 유기체 차원에서의 변화는 나누어 봐야만 한다는 낡은 선정문구 뿐이었다. 그곳에 “왜 그래야만 하는가?”라는 대답은 없었다.

분자차원에서 일어나는 중립적 진화라는 가설은 ‘분자시계’를 가능하게 했다. 분자시계의 등장은 자칫하면 린네 이후 이어져 오던 분류학의 계보를 위협할 수 있는 위험한 시도였다. 중립진화의 토대아래에서 이들은 ‘일정한 속도의 돌연변이’를 가정할 수 있었다. 일단 돌연변이의 속도가 일정하게 된다면 분자 차원에서 분류학을 재정립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침팬지와 고릴라, 인간을 상대로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알란 윌슨이라는 뉴질랜드 출신의 과학자가 등장한다. 그는 분류학의 위협을 받지는 않았지만, 진화의 일정한 속도라는 위험한 발상에 책임을 져야만 했다. 종합을 이룬 노장들에게 진화의 속도는 일정할 수 없었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진화의 속도는 반드시 영향을 받아야만 했다. 윌슨은 계속되고 있는 이러한 논쟁이 언젠가는 분자생물학자들에 의해 주도되는 틀 속에서 융합될 것이라고 믿었다. 여하튼 분자수준의 설명은 새로 정착한 학문이었고, 과학의 역사는 항상 그런 신흥 학문에 의해 지속되기 때문이었다. 윌슨은 착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예측을 한 후 그는 노장들이 쉴 자리를 마련해주기로 했다. 이제 분자차원의 설명영역은 유기체 차원의 설명영역과 분리되었다. 분리는 휴전을 의미했다. 노장들의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윌슨은 참으로 예의와 범절을 갖춘 사람이었다. 

게다가 노장들은 자신들의 진영에서 등장한 분자생물학을 받아들인 신예들에게도 곤욕을 치뤄야만 했다. 이들은 매우 모호한 유전자 개념을 사용하는 일파들이었다. 윌리엄 해밀턴으로 대변되는 이들은 사회성 곤충에서 보이는 이타적 행위를 설명하고자 친족선택을 끌어들였지만, 사실 이들의 이론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설명을 유전자의 차원으로 끌고 내려갔다는 것이다. 노장들은 이후 가속화된 이들의 공세에 밀리기 시작했다. 분자혁명은 이미 막을 수 있는 물결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세였다. 

이 시기에 분자생물학에서 거둔 성과들에 비한다면 노장들의 진영에서 분자생물학의 개념틀을 수입해 밝혀낸 ‘이기적 유전자’개념은 그리 대단한 것들도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노장들의 생각이 짧았음을 말해주었다. 다윈 진영의 후예들은 적절한 수준에서 분자생물학을 수입하고 선동가를 내세우는 전통적인 전략으로 분자생물학자들을 대중과 지식인들로부터 격리시켜버렸다. 이들은 이러한 전략을 이미 유전학과의 융합에서 잘 배우고 익숙해져 있었다. 이 2세대의 선동가들은 조지 윌리암스, 메이나드 스미스, 그리고 리쳐드 도킨스라고 불린다.

아마도 이러한 분리의 와중에 국내에도 생물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이처럼 거대한 논쟁에 끼어보지도 못한 국내의 가난한 과학자들은 분자생물학의 전통속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새로 시작하는 학문분과만이 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분야였다. 한국은 경제논리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였다. 일부분은 전쟁에 의해 그렇게 되었지만, 가난한 나라에서의 과학은 어쩔 수 없이 빠지게 되는 그런 운명이었다. 이러한 전통속에서는 다윈의 전통인 박물학도, 멘델의 전통인 유전학도, 이후 농학과 더불어 발전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안성맟춤이었을 집단유전학의 전통도 수입되기 힘들었다. 국내의 생물학은 기형적인 구조로 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이론은 없었고 실험만이 존재했다. 과학은 여러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실험가들의 과학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러한 비균형적인 수입으로 극대화된 국내의 생물학은 의학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론이 없어도 성공할 수 있는 극한의 성과를 일구어 냈다. ‘줄기세포’ 연구는 실험만으로도 가능한 그런 분야였다. 우리는 이 쾌거를 일군 과학자를 교주라고 부른다. 과학의 역사를 모르는 교주는 한국인의 젓가락을 다루는 손재주가 일군 쾌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전쟁의 폐허속에서 제대로된 전통을 무시하고 불균형적으로 수입된, 게다가 경제논리가 반드시 필요했던 과학이 만들어 낸 비극적인 결말일 뿐이었다. 우리는 박물학부터 유전학까지를 차근히 따라갈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손기술의 승리가 아니다.

이야기는 삼천포로 빠져야 제맛이다. 여하튼 이러한 분리는 분자/형태 패러독스를 만들어 냈다. 이 패러독스는 앨런 윌슨이 만든 것으로 그는 패러독스라는 이름을 붙힘으로서 이 문제가 풀기 어려우며, 따라서 이 문제가 풀리기 전까지 노장들에게 여유를 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새로운 문제에 도전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오랫동안의 숙제였던 발생학을 수면위로 부상시키게 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조절유전자의 중요서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앨런 윌슨이 이러한 패러독스를 만든 순간 사실 Evo-Devo는 시작의 종소리를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결책 중에는 조용히 무시당하던 까만눈의 진화학자의 것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