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아카이브 (2002-2013), 취어생 (2002-2008)

오염된 생명

http://heterosis.egloos.com/773133 원문


2005년 8월 2일, 브릭에 실린 박희주의 글에 분노하다. 관련 논의는 이곳을 참고

박희주의 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실험하면서 짬날때마다 조금씩 쓴 말머리 부분입니다. 뒷부분이 완성될런지는 저도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소제목과 참고문헌은 다 찾아두었습니다. 재미삼아 읽으시길 바랍니다.

오염된 생명

사이비(似而非)라는 말이 있다. 겉은 제법 비슷하나 속은 전혀 다름을 비유하는 말이다. 이 말이 가지는 어감은 매우 부정적이어서 누구도 자신을 수식하는 단어로 사이비를 택하려 하지 않는다. 공자는 사이비한 것을 미워한다고 했고, 그들은 덕을 해치는 자라 했다 . 따라서 사이비과학이란 겉으로는 과학을 가장하고 있으나 속은 전혀 과학이 아닌 가짜 과학을 의미한다. 공자의 시대에도 존재했던 사이비는 현대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사이비와 사이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은 인류가 지고 가야 할 숙제일지도 모른다. 이 글은 브릭 바이오웨이브에 ‘생물학사 및 생명윤리연구회(이하 생생회)’의 이름으로 올라오는 글들 중 몇몇이 사이비함을 보여주기 위해 쓴 것이다. 특히 이성규와 박희주의 논문은 사이비의 정도를 넘어 심각한 오해의 소지를 안고 있다. 만약 과학계에 자체정화능력이 존재하고, 그것을 법체계에 비유할 수 있다면 이들은 범법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2004년 6월 이성규는 <흔들리는 다윈의 自然選擇說> 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기고했다. 실상 이 글은 <자연선택설과 유전자 개념의 역사> 라는 이름으로 전국역사학대회에서 발표한 글을 재탕한 것이다. 더구나 이 글의 원류는 이미 2001년 <한국과학사학회지>에 그가 기고한 논문 <진화론 논쟁에서의 신라마르크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 실제로 생생회의 이름으로 올라오는 많은 논문들이 브릭을 위해 작성된 글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발표한 글을 조금 짜깁기 해서 재탕하는 식이다. 일례로 이번에 박희주가 바이오웨이브에 기고한 글은 <미국 창조론 운동의 최근 동향 – 지적설계운동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2000년 서울대학교 지적설계연구회 NOAH의 강연회에서 발표한 원고의 재탕이다 .

과학사적인 측면에서 창조과학운동의 역사를 다룬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다. 과학과 종교와의 관계는 과학사에서 흔히 다루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러한 과학사적 작업이 과학자들의 작업이나 과학제도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한 개인의 심리적 상태 안에서 발견과 정당화의 이분법이 허용되지 않는다 해도, 각 분과학문은 서로의 분야에 대한 최소한의 존경심을 가져야 하며, 이 경우 과학사는 과학에, 과학은 과학사에 서로 침범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미덕이다. 하나의 이론과 가설이 과학 속으로 편입되는 데 있어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영향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과학자들 스스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과학사학자들의 논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위대한 과학자가 역사와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로 인해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 작업은 순수한 과학자의 몫으로 남는 것이지, 과학사가의 몫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원칙은 헌법에 보장된 정교분리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해둔다. 과학은 철학이나 역사학과 동떨어진 학문은 아니다 . 과학과 과학사, 과학과 과학철학이 서로 동떨어져 버린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기대는 무모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19세기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시도되었고, 과학의 여명기에 철학과 분리되지 않았던 과학의 역사를 보아도 과학사가는 무조건 과학에서, 과학자는 무조건 과학사에서 물러나 있으라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콜링우드는 자연과학에 대해 무지한 과학철학자가 자연과학에 대해 철학적으로 성찰하는 것조차 우둔할지 모른다고 경고한다. 하물며 과학사학자가 진행중인 자연과학적 방법론과 이론에 대해 간섭하는 것은 우둔을 넘어 범법행위가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논의는 두 갈래의 성격으로 진행될 수 밖에 없다. 과학사 및 과학철학적 논의와 과학적 논의가 바로 그것이다. 이성규와 박희주의 글은 과학사의 영역에 속한다. 타분과학문에 대한 존경심이라는 미덕이 발휘된다면 그 논문은 현재 작업중인 과학자들의 이론과 방법론에 대해 영향을 미치려는 노력을 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현재 과학에 종사하고 있는 과학자가 과학사와 과학철학계의 담론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런 경우가 국내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과학사와 과학철학에 무지하거나 관심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들의 작업에 영향을 미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한다. 이는 한국의 과학문화와 관련이 있는데,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는 많은 인문학자들은 과학자들이 그들의 담론에 동참해주기를 바란다 . 서양의 경우 많은 과학자들은 동시에 과학사가이기도 하고 과학철학자이기도 하다 . 그러나 이 경우에도 과학자들은 자신이 속한 학문분야의 역사과 철학적 의미에 흥미를 느껴 과학사와 과학철학에 동참하는 것이지 이들을 제어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성규와 박희주의 글은 이러한 측면에서 과학을 둘러싼 학문 사이의 미덕을 훼손하는 행위이다.

이성규와 박희주의 글이 과학사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사실 그들의 작업에대해 과학적 논의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그들은 과학사적 작업을 통해 과학이론과 방법론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과학자들의 영역을 침범했고, 영역이 침범 당했다면 누군가는 그 영역을 사수하기 위해 방어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어의 일환으로 그들과 과학적 논의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그런 식의 논쟁은 과학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학문체계를 과학으로 대우해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과학사학자가 과학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정당화해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지적설계론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창조과학과의 전쟁을 선포했던 리쳐드 도킨스와 스테판 제이 굴드는 이런 의미에서 큰 오류를 저지른 셈이다. 과학적 논리로 창조과학자들을 이길 수는 없다. 이 점은 이미 오래 전에 아이작 아시모프가 지적한 바 있다 . 과학자들의 토론에는 증거와 추론이라는 보이지 않는 규칙이 존재하지만 창조과학자들에게는 그러한 것이 없다. 게다가 과학자들은 연기에 능숙하지 못하다. 또한 도킨스와 굴드가 자주 사용하는 것처럼 다윈에 대해 반박하는 글들에 대해 다윈의 구절로 반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그것은 과학이 전혀 진보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해 버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이라는 지식체계에 지나친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다른 지식체계들을 무시하는 처사는 창조과학과 같은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과학은 모든 것을 설명하는 학문은 아니다. 과학우월주의의 늪은 오히려 창조과학의 늪보다 깊다(조금 자세히 설명). 그들과 과학철학적 논의를 하는 것도 어리석다 . 사실 과학철학이 과학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 과학철학적 논쟁에서 창조과학을 주장하는 사람이 이기던 지던 간에 그로 인해 과학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과학자가 아닌 과학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빌려 창조과학이 과학인가 아닌가를 논하는 것만큼 우둔한 짓거리도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서 그들로부터 과학을 방어할 것인가. 따라서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 나는 ‘역사’와 ‘비교’의 방법을 선택한다. 역사적 방법이란 과학과 종교가 걸어온 길을 살펴봄으로써 현재 우리의 모습을 둘러보는 것이다. 비교의 방법이란 일종의 패러디다. 창조과학자들의 작업이 과학이 아니라 일종의 유머라면 우리도 유머로 받아주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다. 아시모프의 말처럼 우리도 그들처럼 현란한 연기력을 동원해서 해학과 풍자의 미학으로 승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의 선택은 현명한 상식을 가진 이들이 결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