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덕 선생님과의 논쟁

http://heterosis.egloos.com/773145 원문


2004년 7월경, 이 당시 사이트가 폭파되었다. 이 글은 반박글을 작성할 의도로 저장해 놓았던 최교수님의 글을 되살린 것과 이후 나의 반박이다. 반박이랄 것도 없다. 내 공부가 부족한 것을 자랑하며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고 우기고 있을 뿐이다. 가끔 생각이 다르기는 하지만 최종덕 교수님은 그래도 공부하는 학자시다. 다른 허접 교수들과는 다르다. 관련 논의는 이곳과 이곳을 참고하면 된다. 

최종덕 교수님의 글

(1) 행위와 행동을 이분하여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려는 구도는 의지, 지향, 의도, 희망, 등의 소위 인간적 특성이라는 심적 표현형을 기술하는 데 유리하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방식은 행위와 행동 사이의 넘지 못할 구획이 존재함을 전제해야 한다. (2) 어떤 이는 그러한 강건한 구획의 존재를 굳이 전제하지 않더라도 제한적(속박적constrained) 행동과 지향적 행위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한다. (3) 또한 어떤 이는 그런 구획이 애초부터 없었으며 따라서 행동과 행위는 연속적인 표현형의 일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뇌는 분명히 적응기관이지만, 마음은 적응기관이 아니라 부수작용 혹은 부산물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a) 그런 관점을 취하는 그룹 중에서 어떤 이는 마음이 부수작용이기는 하지만 절대로 뇌로 환원가능한 작용은 아니라고 말한다. (b) 반면에 어떤 이는 마음은 뇌의 부수작용이면서 동시에 뇌로 환원가능한 작용이라고 말한다. (c) 또한 인간의 마음도 적응기관의 뇌처럼 모종의 적응기관의 작용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 보통 (b)은 물리주의라고 하며, (a)는 수반론이라고 말한다. (c)은 이런 구도로 짜맞추기가 어렵다. 

여기까지는 기존 철학자 혹은 생물철학자들이 흔히 해오던 내용이다. 여기서 (1-3) 과 (a-c)의 구도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는 일은 마음의 문제와 진화의 문제를 잇는 가능성을 새롭게 확보할 수 있다. 우선 (c)에 대하여 언급한다. 

마음을 적응적 작용이라고 주장하려는 사람들은 적응기관으로서의 뇌의 작용과 또 다른 선택과정을 통한 다른 방식의 적응성으로서 마음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럴 경우 뇌의 작용기제와 마음의 작용기제는 결코 공분모 되는 부분이 전혀 없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서로 간의 환원성을 전적으로 부인한다. 이럴 경우 행동과 행위는 차원이 다르며 행위는 행동으로 환원하여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다. 이런 주장은 부분적으로 혹은 모자이크 방식으로만 적응이 이루어진다는 모자이크 적응이론에 해당한다. 모자이크 적응이론은 오늘날 가장 강력한 메이저 이론그룹이다.(c-1) 

모자이크 적응이론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마음이 적응적 작용이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여도 마음이 독립적으로 적응된 결과가 아니라 몸 전체의 적응과정의 일환으로 적응된다는 상호적 적응이론이 있다. 예를 들어 다리 보폭의 길이나 눈의 배치, 앞뒤 다리 간의 거리, 치아의 배열구조 등에 따라 행동 적응이 제한적으로 성립될 것이며, 동시에 그런 행동적 제한에 따라서 그 동물의 뇌의 구조 및 신체의 형태가 발달할 것이다. 이 경우 선택적응과 형태발달은 서로 상호적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경우 행위의 방식은 행동의 방식에 의존적이다. 다시 말해서 행동과 행위는 연속적 발달과정에 있다는 뜻이 된다.(c-2) 

그러나 근본적으로 마음을 적응 작용이라고 보는 관점은 결정적으로 그 논거가 매우 취약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마음은 국소화된 신체 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용자의 적응이론이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채 난무하다. 그 예가 바로 진화심리학이다. 최근들어 상당한 붐을 이루고 있는 진화심리학은 적응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데 소홀하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진화심리학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적응이론의 필터를 제대로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진화심리학의 기초는 선천적 지향성이나 문화적 반응 등과 같은 모든(강한 경우 – 예외 없이) 심리적 표상들은 전적으로 적응된 결과라고 보는 입장위에 서 있다. 이런 주장이 가능하려면 적응의 범위와 주체 그리고 선택의 방향이 논증되어야 한다. 경험적 검증까지는 요구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경험적 검증을 마쳤다고 말한다. 그들은 분명히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임상실험을 하며 그 임상실험 결과를 토대로서 소위 검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검증의 의미는 귀납의 오류를 넘지 못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귀납 사례의 폭이 적거나 문화적인 측면에서 선택적 범위 안에 국한되어 있다는 듯이다. 
우선 진화심리학이 성립하려면 최소한 (c-2) 방식의 총체적 적응을 인정해야 한다. 개구리가 앞에 놓여진 벌레를 포식하기 위하여 먼저 포식하려는 “준비”(preparing)가 있어야 하며 이러한 준비는 모든 몸동작을 행동으로 유발하게끔 추진한다. 이때 혀의 놀림, 뒷다리의 튕김, 앞다리의 지레대 기능, 눈의 시선, 후각 또는 청각의 인식작용, 체중의 쏠림작용 등등을 총체적으로 작동시킬 것이다. 적응주의자라면 이때의 행위를 유발하는 신체기관의 적응성을 아주 적절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행위를 준비하는 준비 과정 역시 적응의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때 준비 혹은 준비과정을 나는 지향적 심리구조로 연관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준비는 뇌의 작용을 일으키며, 뇌의 작용은 포식행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준비에서 뇌의 작용으로 이어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인과작용이라고 보는 입장을 나는 부정한다. 인과작용이라고 말할 경우 그들은 각각을 독립적인 실체로 인정해야 하며 나아가 각각 독립적인 적응과정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독립적이고 모자이크 방식의 적응이론 견해는 넌센스이다. 

진화심리학은 인간에게 해당되므로, 왠 개구리 이야기냐 하는 볼 멘 소리가 들린다. 나의 논증은 개구리에 귀착하는 것이 아니라 포식 행동의 “준비”가 바로 인간의 심리작용에 비유하거나 해당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하려는 데 있다. 강력하게는 마음에 비유할 수 있다. 비유라는 표현은 진화론자 혹은 진화철학자들에게는 스스로의 주장을 격하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선경험과학자가 아니라서, 할 수 없이 비유라는 격하된 표현을 쓸 수밖에 없음이 안타깝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간다. 이렇게 “준비”가 행동과 함께 적응을 통한 공진화하기 때문에 마음을 적응의 범주로 놓을 수 있다. 다시 정리한다면 진화심리학은 (1)마음의 적응을 논증해야 하며, (2)동시에 모자이크 적응이론을 포기해야 한다. 이 두 가지 논점을 거치지 않고서 진화심리학을 말하면 말 그대로 그들 심리적 주장에 그치고 만다. 

그런데 마음을 적응결과라고 보는 입장에 대하여 강력한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뇌의 적응이 곧 마음의 적응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논증은 다음에 하려 한다. 

앞선 글에 이어 마음의 적응이 과연 의미인지를 살핀다 
우선 나는 마음을 뇌와 분리하여 이원화하여 말한 적이 없음을 밝힌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둘 사이의 환원주의 주장도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컴퓨터피씨와 그 부속품의 관계, 세포와 단백질의 관계, 등의 관계는 그것이 환원적인지 아니면 비환원적인지 시비를 따질 수가 있다. 그러나 컴퓨터와 보리알 사이의 환원성을 따지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왜냐면 그들의 존재범주 혹은 인식범주가 전혀 다른 데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뇌와 마음을 환원이냐 아니냐의 관게로서 따지는 것은 일종의 범주오류에 해당한다. 

마음의 적응과 뇌의 적응을 구분하여 말한 것에 대하여 오해가 있을 수 잇다. 마음의 적응과 뇌의 적응을 
구분했다고 해서 그들 사이의 이분성을 착종시킨다고 보는 것은 그런 오해의 일종이다. 

마음의 적응은 진화론적 인식론을 논의하기 위한 사전 포석일 뿐이다. 
먼저 국소성을 갖는 특정 신체 기관이 아닌 활동 혹은 기능만을 갖는 작용자가 진화의 적응 기제에 적용되는지를 따져야 한다. 
기존의 적응주의자들은 이를 반대한다. 반대는 커녕 논의조차 할 필요를 못느낄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적 인식론은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작용자 자체의 적응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혹은 성선택을 논의하는 구조에서 역시 작용자의 적응을 논의해야 한다. 성선택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진화심리학자들 대부분 그리고 일부의 행동주의 주장자들은 작용자 적응론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그들의 주장 대부분은 성향과 경향에 관한 주장들이기 때문이다. 성선택이라는 주제는 참으로 기묘하거나 아니면 변덕이 심하다.성선택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자손증식을 위한 mating 적응과정을 말한 것이지만, 실제로 짝을 찾아 가는 과정, (가능한) 짝에게 잘보일려고 하는 과정, 동기, 자극 등은 어떤 국소적인 물리기관의 행동과는 다르다. 최소한 짝짓기 과정은 행동이 아니라 행위에 속할 것이라고 이상하 선생님도 (이 점만은)인정하실거다. 
이런 류의 짝짓기 행위 혹은, 자기 존재를 지속시키기 위한 경향성들 이런 류의 작용자는 그것이 국소성의 기관이 아니더라도 적응의 적용범위에 든다는 말이다. 작용자의 개념은 기계론적인 작용가지 포함하므로 지난 번에 쓴 “준비”(preparing) 개념으로 작용자를 대신한 것이다. 준비는 해바라기가 해를 향해 휘는 굴향성과 다른다. 해바라기의 해굽음은 마치 지향적 행위처럼보이지만 모든 해바라기에 해당하고 어떤 해바라기도 예외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그것은 철학자가 말하는 지향적 행위와 다르다. 따라서 내가 말하려는 준비 도 아니다. 굴향성은 적응의 결과가 아니다. 왜냐하면 상대적 fitness 차이가 생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준비는 상대적 fitness의 차이가 생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나중에 적응된 마음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진화론적 기제가 되기때문이다. 
“준비”는 적응한다. 뇌가 적응하듯이 말이다. 준비의 적응이 호모사피언스에게는 마음의 진화로 나타난다는 뜻이 나의 기본 입장이다. 그래서 마음의 적응을 이야기 할때 뇌의 진화와 분리하느니, 아니면 환원이 되느니 아니면 이원론이니 하는 논의는 전적으로 범주 오류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준비의 적응은 뇌의 적응을 필요조건으로 하고 있지만 충분조건은 절대로 아니다. 
동시에 준비의 적응은 모자이크 적응이 아니다. 
뇌 역시 뇌만의 독립적인 적응이 아닐진데 준비의 적응을 확인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 마음은 더 말할소냐? 
이런 준비로서의 마음이 적응하는 방식을 이해ㅑ하려면 마투라나의 인식과 존재 행동의 삼각대 존재해명 모델에 도움받는 것이 지금가지 나온 이론 중에서 가장 그럴듯 한 것 같다. 준비는 인식주체로서의 뇌의 국소적 존재 및 그 존재가 대상을 파악하는 방식으로서의 인식 그리고 대상을 파악하고 그에 반응하는 방식으로서의 행동 이 세 삼각대 자체가 바로 생명존쟁의 이해의 핵심이라는 점이다. 아직 이 논의를 전개하가기 위해서는 확증이 미약하다. 현재로서는 효소작용을 근거로 말하고 있지만 아직 논증이 허약한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단순히 관념적으로 보보거나 물리주의적 환원태로 보는 입장에서 벗어나 진화의 적응대상으로 보았는 점에 높은 점수를 줄만하다. 

원래 이야기로. 

준비는 적응의 과정을 통해서 확대한다. 어떤 종은 지향으로 어떤 종은 마음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인간의 마음은 매우 독특한 적응과정을 보인다. 
호모사피언스에서 준비 적응의 독특성은 이성 혹은 종교에서 잘 나타난다. 인간이 이성적이냐 종교적이냐는 논의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오냐면 인간의 이성과 종교성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의 적응과정의 한 결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죵교의 이성을 인간만의 독특한 특이성으로 간주하는 것은 결국인간만의 마음을 비환원적 지위로 억지로 행상시키는 일이다. 단지 준비의 적응, 혹은 마음의 적응은 인간 스스로 (1) “나는 이성적이야” (2) “우리 호모사피언스의 정체성은 이성과 종교성에 있어.” 등등 처럼 그렇게 느끼고 마치 그것이 사실인냥 뽐내고 자랑하고 계발하려는 인식의 차원이 바로 마음의 적응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가설적 자기존재 설정 과정인데 이 점은 당위적 인간 행위를 유발한다. 이것이 나중에 윤리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것이 제가 전개하려는 진화인식론의 주요 포인트이다. 자세히는 나중에 다시 
오늘은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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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5일 
네트워킹으로서 마음 

<재>,<하> 두 분 모두 네트워킹이라는 방식에 동의하였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설명방식으로서만의 동의인가, 아니면 대상 구조 자체의 기술방식까지를 포함한 동의인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논의를 통해 밝혀지겠지요. 

네트워킹이라는 설명방식은 설명의 포용성이 매우 큽니다. 그래서 현상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네트워킹 설명방식은 현재의 과학이론 수준에서 볼 때 수사적이거나 이야기식 narrative 설명에 국한되고 마는 우려를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실은 저의 입장도 네트워킹을 이용한 설명방식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트워킹 설명방식의 구조를 잠시 살펴봅시다. 

(1) 먼저 자체 내의 되먹임 구조를 갖는 대상 및 현상에 대하여 적용력이 높으며, 설명방식 자체도 되먹임 인식구조를 보여 줍니다. – 철학자들은 존재와 인식을 구분하는 관성이 있어서 전자와 후자를 굳이 구분하려 듭니다만, 저는 그렇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2) 또한 네트워킹 구조는 자기 재생산의 구조를 autopoesis 은연 중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3) 나아가 네트워킹 구조는 자기 구조 자체 내의 자기조직성 외에 타자와의 내적 상호성 (external, but is seeming as internal)을 포함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는 <재>께서 말한 “서로간의 위계적 네트워킹“ 경험적 차원을 다른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위계성이란 hierarchy 결국 타자와의 관계를 설정하지 않고서는 의미가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위계성이라는 표현 대신에 중층성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듯합니다만 – 
다시 말해서 자기와 타자, 자기 수준과 타자 수준 사이의 상호성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독립적 자기가 아니라 상호적 환경론을 수용해야 합니다. 
(4) 이렇다 보니 분분들의 합이 곧 전체 이하이거나 이상이 되어버리고, 그렇게 되면 기존의 물리적 환원주의와 불일치하게 됩니다. 이 부분이 골치 아픈 문제로 되곤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몇 가지 견해가 가능합니다. (i)하나는 강한 환원주의 견해이며, (ii)다른 하나는 현재의 기술방식descriptive 혹은 과학기술 technique 로 표현만 못할 뿐이지 나중에 가서 결국은 환원이 가능하다는 견해와, (iii)존재 자체의 어쩔 수 없는 비환원 구조를 인식의 기술 환원성으로 descriptive reductionism 결코 대치할 수 없다는 비환원주의 견해가 있을 수 있으며, (iv)아니면 불가지론의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불가지론은 사실 따지고 보면 환원주의와 비환원주의 중간 정도에 위치할 것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유물론자이지만, (ii) 와 (iv) 둘 사이에서 정착을 못한 채 유랑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5) 마지막으로 네트워킹 구조는 그 자체로 불완전성 구조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완전성은 구조자체 및 기술방식의 불완전성을 다 포함하며, 괴델적인 의미를 연상하면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괴델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불완전성이란 완전성에 대한 단순한 부정적 수식어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채워질 수 있는 잠재 구조의 자체적 동력을 생산할 수 있는 생물학적 모멘텀을 유지하는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인정할 수 있다면 철학자가 그렇게나 고집하고 싶은 환원주의와 비환원주의의 벽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제 진화론이야기로 들어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 geneticism을 완전히 부정하는 그런 진화생물학자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단지 gene이 설명방식의 전부라는 강한 입장을 반대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 있을 뿐이겠지요.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이점에 대하여 도킨스나 루스나 윌리엄스나 굴드나 르원틴 모두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epigeneticism을 “수정된(완화된) geneticism” 으로 보는가 아니면 “anti-geneticism” 으로 보는가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일 것입니다. 저는 그 차이를 크게 부각하지 않습니다. 그 차이를 자꾸 거론하는 것은 논문 쓰기에는 적당하지만 자연을 제대로 설명하는 데는 아주 비경제적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적응만능주의를 비판하는 그룹 중에서 강력한 그룹은 형태론자 그룹일터인데, 그들은 일단 발달론을 중시할 것입니다. 이들 그룹 즉 neoepigeneticism 은 발달 구조론자들과developmental structuralism 발달 구성주의자들로developmental constructionism 대충 구분할 수 있습니다. ( 이 구분은 Mario Bunge, Foundations of Biophilosophy, 1997 에서 한 것입니다) 나는 후자 즉 발달구성주의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 입장은 기본적으로 developmental system을 어떻게 기술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오야마의 정의를 받아 써보겠습니다. 

“The developmental system … encompasses not just genomes with cellular structures and pprocess, but intra- and interorganismic relations, including relations with members of other species and interactions with the inanimate surround as well”. (Oyama, S. , The Ontogeny of Information. Cambridge, 1985, p.123) 

기존의 단위 유기체 개념 대신에 발달계 developmental system 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아시다시피 많은 비판과 비난을 가져 왔습니다. 그 비판의 핵심은 발달계 개념은 holism의 오류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를 holism으로만 비판하며 몰고 갈 경우 이는 과학자들에게 아주 치명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저에게도 2/1 치명적입니다. 또한 반대로 철학자들에게 reductionism으로만 비판하며 몰고 갈 경우도 철학자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아주 묘한 감정 대립이지요. 

(나에게 말 그대로 그런 상황은 감정적 대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간판을 내리고 계급장 띄어 버리고 다시 잘 본다면 그 차이는 이론의 다양성일뿐이지 위상간의 싸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쓸데없는 싸움을 하지 말라는 충고는 Sterelny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의 논문 “The Extended Replicator”, in Biology and Philosophy 11; 377- 내용 좋음 ) 
자, 이제 원래 논의였던 마음의 이야기로 들어 갈 수 있을 같습니다. 

즉 국소적 유기체의 개념으로가 아니라 발달계로 단위 생명체를 볼 수 있다면 마음의 문제는 많이 풀리게 됩니다. 좀 구체적으로는 CES 분석 설명장치로 접근해 본다는 말입니다. 시스템의 CES 분석이란 composition, environment, and structure Analysis의 약자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만 하지요 너무 많이 써서 저도 헷갈립니다. 오늘 쓴 것은 사실 <재>, <하> 그리고 우인 님께 대한 답변이 어느 정도 약간 포함된 것입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더 두고 봐야겠죠. 

나의 말도 안되는 반박글

마음은 없다. 

최종덕 교수님의 논리적 설명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공들여 쓰신 글인지 직접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해야만 할 겁니다. 그 노고를 인정하며 전 조금 본질적인 문제를 건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마음의 문제를 의식적으로 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마음의 문제를 의식적으로 피하는 이유는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철학자들이 논구하는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관한 무수한 이론들은 철학자들이 마음이라는 현상에 지나친 무게를 부여하면서 파생된 가짜 논의들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초월적인 신의 존재를 해결하기 위해 서양철학이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붙잡고 몇백년을 소비했듯이, 인간에게 특이한 “마음”이라는 존재를 해결하기 위해 또 몇백년을 소비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철학자들은 마음에 중대한 위치를 부여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로 보입니다. 반면에 과학자들은 마음의 지위를 깍아내리기 위해 안달이 난 사람들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 할 수 있는 일만 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행동유전학과 신경생리학, 진화심리학의 성과들을 활용해서 마음이론을 만드는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반론이니 물리주의니 하는 말은 모두 필요없는 논의라고 봅니다. 기본적으로 물리주의외를 전제로 하지 않는 논의들은 과학적 논의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할 수 있는 것만 한다. 그게 최한기가 말하는 추기측리고 제가 말하는 과학적 소심함입니다. 

착한왕님이 마음을 적응기관으로 말할때에는 이미 마음이 몸의 발현현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거라고 봅니다. 마음이 정말 기관인가 아닌가는 철학적 문제가 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과학적 문제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착한왕님의 문제제기는 과학계에서는 정설이고 단 한가지의 문제만 파생시킬 뿐입니다. 그건 “적응된 마음은 어떤 식으로 프로그래밍되는가?” 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이미 해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마음은 몸의 발현현상이고 적응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DNA속으로 정보가 코딩되어야 합니다. 이미 이런 문제가 다 전제되어 있는 물음일 뿐이기 때문에 최종덕 교수님의 문제제기는 철학적 문제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제가 끼어들 과학적 문제꺼리가 없습니다. 전 마음이 적응인가 아닌가보다 도대체 그 정보들이 어떤식으로 코딩되어 있는가에 더 관심이 많으며 이 문제만이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진화심리학의 가장 큰 문제는 마음이 적응이다 아니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응된 정보들이 도대체 어떻게 코딩되며 또 코딩되어 있는가를 설명하지 못하는 겁니다. 

또한 네트워킹 설명방식이 서술적인 설명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에 전 좀 더 확실한 기반아래 서려고 하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마음의 문제가 DNA 정보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본질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그래서 분자신경생리학적의 연구결과들을 적극적으로 마음의 문제에 가져다 써야 합니다. 그래야 서술적 설명방식에서 벗어나 네트워킹에 한발짝 다가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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