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을 알리며: 혜강과 성실

http://heterosis.egloos.com/773148 원문


2004년 8월 20일, 고전 강독회에서 최한기 강독을 마치며, (hwp)

새로운 시작을 알리며

고전강독회를 시작하면서 처음 혜강을 읽자고 했을 때에는 한 가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혜강의 학문의 구조를 배운다거나, 조선말 혜강의 <기학>이 가지는 근대적 의미 따위를 알고 싶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혜강을 강독하며 우리에게 부여하고 싶었던 의미는 혜강이 학문했던 자세,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혜강은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서구라파의 거센 바람 속에 격동기를 거치면서도 왕정중심의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개벽의 입김을 혜강에게서 찾기는 어렵습니다. 혜강은 수운과 같은 혁명가는 분명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혜강은 상황성과 합리성으로 뭉친 사상가였습니다. 혜강은 서구의 두 가지 지적전통인 과학문명과 기독교를 택일해서 받아들일 줄 아는 선각자적인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서구의 과학문명이 일군 성과들이 實한 전통의 氣론과 합치하는 면이 있다는 점을 깨닫고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으나, 기독교와 이슬람은 불교와 도교와 마찬가지로 虛한 학문으로 규정하고 배척했습니다. 서구의 지적전통을 직수입해서 그 사상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의심 없이 따르는 현재의 인문학자들과 혜강은 그런 의미에서 분명히 다릅니다. 혜강은 무조건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시각 속에서 부조리를 타파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찾아나간 위대한 우리의 지적 전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혜강은, 혜강의 <기학>은 텍스트 속이 아니라 컨텍스트속에서, 공시적 맥락이 아니라 통시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변화되어 이해될 수 있습니다. 혜강의 <기학>은 현대에도 통용될 수 있는 우주론 따위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자세로서 기여할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혜강의 <기학>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은 기학의 구조가 아니라 혜강의 학문의 자세일 뿐이라는 이 말을 첫 시간 혜강을 소개할 때도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다는 것은, 현재 역사학자들과 인문학자들에 의해 유행하고 있는 혜강에 대한 인식이 단순한 역사적 인물로서만 머물고 있을 뿐, <혜강정신>은 실종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혜강정신>이란 혜강이 우리에게 제시한 학문방법론을 의미합니다. 학자로서의 끝없는 열린 자세와 역사인식, 그리고 상식을 기반으로 한 현실적 학문으로서의 기학은 실종되고 혜강의 기학이 현대에도 적용될 수는 없는가라는 쓰레기 같은 질문들과, 혜강 텍스트에 대한 끊임없는 해석만이 공허하게 난무하고 있을 뿐이라는 이 비극적인 현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이제 다음주면 혜강 최한기에게 우리는 작별인사를 하게 됩니다. 고전강독회의 첫발걸음으로 혜강은 우리에게 학문하는 이의 자세와 마음가짐을 일러줄 수 있었던 소중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와 더불어 혜강이 열린 마음과 함께 우리에게 전해주는 하나의 화두인 ‘誠實’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말의 ‘성실’은 국어사전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태도나 언행 등이) 정성스럽고 참됨. 착하고 거짓이 없음.”

그러나 우리말의 어휘 속에서 파악되는 성실의 의미가 혜강이 그의 텍스트 속에서 사용하는, 그리고 제가 가끔 사용하는 성실과 같을 수 없습니다. 이는 고대문헌속의 ‘自然’이라는 단어가 명사로 사용되는 현대어 용법과는 다르게 동사로, 즉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혜강의 ‘성실’은 ‘誠’과 ‘實’의 합성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誠이란 <중용>의 끝장의 중심테마를 이루고 있는 흥미로운 개념입니다. 뚜웨이밍은 그의 <중용강의>를 통해 誠의 의미가 ‘진실함’을 넘어 ‘참됨’이며 또한 ‘인간성 仁을 향한 내적 생성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는 일종의 도덕형이상학으로 유학에서 이야기하는 궁극적 인간 본체로서의 誠은 밝음明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어서 그는 ‘진실함 誠은 전부를 포괄하는 실재이다. 아마도 진실함은 다양한 영역에서 일어나는 존재의 자기 발휘일 것이다. 진실함은 존재이며, 활동이다. 동시에 끊임없이 삶을 생성하는 자존적, 자족적이며 창조적인 과정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용>에서도 ‘진정한 진실함은 멈추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교적 세계관의 현실적 변용 속에 서있었던 혜강이 말하는 誠 또한 이러한 <중용>의 세계관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誠이란 끊임없는 자기변화, 바로 그것입니다.

實이란 열매를 뜻하는 말입니다. 열매란 현실에서의 결과물을 이야기하며 혜강은 자신의 <기학>을 實한 학문이라고 규정하고 中古의 학문을 虛한 학문으로 규정합니다. 이미 짐작하시겠지만 혜강이 말하는 實이라는 개념은 일종의 현실주의이자 실용성을 내포하는 의미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 

이 두 단어가 모이면 기존의 ‘성실’이 가지고 있던 의미는 조금 더 구체화되고 현실화되며 한층 더 상승하게 됩니다. 성실은 ‘부지런함’이나 ‘게으름의 반대’로서의 따분한 의미가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과 변화, 그리고 역동적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일주일, 즉 168시간의 단 2시간 (길어야 3시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일주일의 1/84이고 소수단위로 표시하면 1.2%의 시간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 시간은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한다 해도 1.8%의 시간이며, 밥을 먹는 시간을 제외한다고 해도 일주일의 2%를 넘어서지 않습니다. 책을 읽는 시간이 남아 있지만 일상생활에 부담이 될 분량의 범위는 절대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화장실에서의 시간과 자기 전 30분정도만 투자해도 충분할 정도의 분량만이 여러분에게 제시됩니다. 저는 금요일 오후나절 2시간동안 읽어야할 범위를 모두 읽은 적도 있습니다. 결국 일주일의 2%, 길게 잡아봐야 5%의 시간을 고전강독회에 투자하는 것은 큰 부담이 되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誠實이라는 화두로 옮겨가게 됩니다. 처음부터 예상했던 것이지만 최초에 모였던 분들의 숫자는 허깨비였습니다. 저는 모인 분들 중에서 진실함을 보여줄 사람을 처음부터 원하고 있었고 현재 그러한 분들만이 (당연한 결과이지만) 남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약 5명쯤 됩니다. 처음에 약 15명 정도가 모였었고 연락한 분들을 모두 합계하면 30여명쯤 되니 1/3~1/6 정도만이 남은 셈입니다. 

하지만 전 다른 분들을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방학이라는 특수한 기간동안 시작한 탓으로 학부생들은 어쩔 수 없이 강독을 포기해야 했던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대학원생들도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모임에 불가피하게 불참하게 되는 사태가 속출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변명은 오늘까지였으면 하는 것이 저의 솔직한 바람입니다. 첫 시간에 말했던 것처럼 타인의 성실함에 나의 성실함이 부응했으면 하는 것이 저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이제 일리야 프리고진의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와 <확실성의 종말>을 읽으며 본격적으로 고전강독회의 성격이 드러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가 한문이나 라틴어를 칭얼대는 돋보기 쓴 고루한 학자가 아니라 과학도로서 또 공학도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치열함을 간직한 모임이라는 것이 점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과학과 공학이 보여주는 사상의 깊은 못으로 함께 헤엄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여러분이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보여주는 성실함이 서로에게 얼마나 큰 자극이 되는지를 알 수 있게 되기를 조용히 희망해 봅니다. 

2004년 8월 20일 실험실에서 김우재 씁니다.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다음의 HTML 태그와 속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 <strike> <str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