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아카이브 (2002-2013), 취어생 (2002-2008)

<분자생물학: 실험과 사유의 역사> 서평

http://heterosis.egloos.com/1003071 원문


중앙대학교 대학원 신문 기고글


분자생물학은 “분자를 통해 생명체를 분석하려는 학문”이 아니다. 오히려 분자생물학은 그러한 분석이 가능하게 했던 발견과 기술의 총체이고, 생명체를 “정보의 저장고와 전달자로서 이해하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다. 하지만 왓슨과 크릭, 휴먼게놈프로젝트, 환원주의에 대한 철학적 문제제기 등의 현대에 미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의 역사는 거의 연구되어 있지 않다. 전문적인 사가들은 엄청난 자료들 앞에서 주춤거리고, 몇몇 인터뷰로 구성된 책들과-<창조의 제8일>, 과학자들의 자전적 성격을 가진 책-<이중나선>들만이 이 학문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모랑쥬의 분자생물학은 분자생물학의 역사연구를 위해 초석을 제공한 얼마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다. 이 책은 1940년대 생화학과 유전학의 만남으로 시작된 학문의 역사를 1980년대까지 추적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지나친 서술로 지루한 면이 없지 않지만, 몇 가지 관점을 가지고 책을 읽어나간다면 의외로 많은 것들을 건질 수 있다. 첫째, 분자생물학은 다루는 생명체처럼 수많은 분과학문들의 융합을 통해 발전했고, 학제간 연구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좋은 지침서가 된다. 둘째, 과학의 발전에서 도구에 의해 주도되는 부분이 그동안 많은 과학철학자들에 의해 간과되어 왔음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많은 경우 도구가 이론을 가능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가설과 실험의 연결이 가지는 유연함과 그 과정에서 보이는 역사성이 이 책이 보여주는 미덕중의 하나다. 유전물질의 발견에서 에이버리가 담당했던 역할을 통해 이러한 점이 드러난다. 에른스트 마이어의 <이것이 생물학이다>에서 다루지 못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번역된 책이지만, 모랑쥬의 <분자생물학>은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오히려 진화론에 비해 과학학 분야에서 주목받지 못한 학문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시작이 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