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김우재 (2014-)

오보카타 하루코, 찰스 바칸티, STAP 세포

오보카타 하루코의 STAP세포 논문이 네이쳐에 처음 출판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마도 황우석 사태를 거치면서, 그리고 과학을 산업화의 도구로 바라보는 시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분야이기 때문에 일부러 줄기세포라면 쳐다보지도 않던 버릇 때문이었던 듯 싶다. 현재 진행중인 줄기세포 관련 연구들 중에 정말 난치병 치료에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될지도 불투명하지만, 실제로 줄기세포가 산업화되고 있는 분야를 보면, 강남 부자들의 불로장생 프로젝트를 위한 제대혈 주사 따위의, 금융자본주의 하에서 첨단기술이 처할 수 밖에 없는 기술양극화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이야말로 역겨운 것이다.

그래서인지 STAP세포 논문은 내게 흥미로웠는데, 만약 전능성세포가 약산성 용액에 담그는 것만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다면, 줄기세포 연구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따라서 그닥 성과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온갖 과학사기꾼들이 모여 연구비 타내기에 혈안이 된, 그래서 과학과 금융자본주의의 융합괴물이 되어버린 그 분야에 대한 투자가 기업으로 넘어가, 과학자들은 지긋지긋한 줄기세포 연구를 그만해도 되는것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보카타 사건의 전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현재 시점에서 네이쳐에 출판된 논문 두 편은 철회가 확정될 것 같다. 깐깐하던 찰스 바칸티 교수도 논문 철회에 동의했다고 한다. 일부 기사에선 오보카타가 논문철회에 동의한 이유가,  STAP세포 재현실험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고 언급되는데, 아마도 리켄측에서 논문을 철회해야만 오보카타에게 재현의 기회를 준다고 협상한 듯 하다. 논문을 철회하면서까지 재현을 하겠다고 팔을 걷어 부치는 젊은 과학자의 패기의 이면엔 뭐가 있는지 석연치 않고, 논문 이미지에서 몇가지 부정이 밝혀지는 바람에 이미 도덕적 손상을 입어버린 처지이지만, 앞으로 몇달간 STAP세포가 정말 만들어질 수 있는지 실험이 진행되고 나면 사건은 깔끔하게 마무리될 듯 싶다.

내가 원한 것이 바로 이러한 절차적 정당성이다. 사건이 터지자마자 이 사건을 일본판 황우석 사건으로 낙인찍는 것은 정당한 판결이 아니다. 황우석도 논문을 조작했지만, 실제로 그가 만든 줄기세포가 전혀 없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그 만행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논문 그림의 조작이 실수인지 고의인지, 논문에 결정적인지 여부를 떠나서, 이 실험은 짧은 시간안에 재현이 가능한, 즉 과학자의 손에서 접근이 가능하고 재현가능성을 시험할 수 있는 영역에 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재현실험이 해당 논문의 정직성을 판결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 판결이 이제 곧 내려질 예정이다.

낙인찍기와 음모론 [ref] 바칸티의 하버드와 크뇌플러의 실험실이 경쟁관계라는 말도 있고, 이 말을 검증이라도 하듯 크뇌플러는 http://www.ipscell.com 을 통해 STAP세포 사건에 대한 극한 양덕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이다. [/ref],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면 둘 모두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을 훼손할 수 있는 위험한 태도다. 오보카타가 리켄에 취직할 때부터 별다른 인터뷰 과정 없이 특채되었다는 뉴스가 새어 나온다. 황우석의 인간배아줄기세포 재현실험은 기술적으로 난해해서 재현이 거의 불가능했지만, 이 경우는 아니다. 오보카타의 STAP세포가 존재하던 아니던, 가능하던 아니던간에 과학의 재현성이 어떻게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과학이라는 지식체계를 떠받치고 있는 것인지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점점 건강성을 잃어가는 과학의 이미지는 이제 과학 자체를 위협할 만큼 위태해 보이기 때문이다. 다음번 과학혁명은 과학에 대한 정치적 탄압 혹은 사회적 지지철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추신: 현대의 과학행위는 기업행위와 유사해지고 있다. 줄기세포 분야처럼 산업화의 보루로 여겨지는 곳일 수록 이런 경향은 심하다. 사회과학의 방법론을 치열하게 고민중인 김웅진의 논문에서, 오보카타 하루코의 STAP사건을 근원적으로 이해하는 단초를 읽는다. 그 구절들을 옮겨 둔다.

“과학자들은 연구전통에 대한 적극적 순응이 보장해 주는 실익, 곧 과학자로서의 안정적 위상과 지식생산기회, 지식생산에 대한 정치적/경제사회적 보상 등을 확보하기 위해 과학행위를 자발적으로 통제하게 마련이다. 역으로 자신이 구축한 모형의 지속적 예측실패를 공개적으로 노출하여 연구전통의 명성을 훼손하는 과학자는 ‘무능한 과학자’의 낙인을 받게 되며, 때에 따라서는 연구전통에 대한 정치적 반항자로 간주되어 치명적 불이익을 입게 된다. 이에 따라 과학적/과학외적 실익의 박탈을 기꺼이 감수하면서까지 연구전통에 도전하려는 과학자는 적어도 성숙한 정상과학의 단계에 진입한 과학체계 내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부분의 정상과학자들은 예측의 의도적 기피를 통해 자신이 구축한 모형뿐만 아니라 모형이 입각하고 있는 유리스틱을 방어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요컨대 모든 연구전통이 지니고 있는 패권적 자기보호기제가 과학자들로 하여금 모형의 예측실패에 대한 공공연한 노출 혹은 예측 자체를 회피하게 만든다고 볼 수 있다.”

“국가를 필두로 한 정치경제적 패권기제는 과학사회와의 경제적 교환망을 통해 지식생산의 정향과 내역을 제어한다. 다시 말해서, 정치경제적 패권기제는 구입할 지식의 목록을 제시함으로써 과학의 산업화와 기업화를 유도하며, 생산자들 간의 치열한 경쟁을 조장하여 이러한 목록의 배타성과 폐쇄성을 더욱 강화한다. 예컨대 <한국학술진흥재단>을 포함한 각급 공적/사적 연구지원기구와 기금은 과학행위의 영역을 이른바 지식의 실천성, 곧 정치적/정책적 합목적성에 상응하여 조정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생산되는 과학적 지식의 규격화가 초래된다. 지식의 품질보증제도가 작동하는 것이다.”

“과학의 기업화는 또한 연구전통의 계서화, 더 나아가 인수합병을 야기한다. 즉, 우수한 품질의 지식을 생산하는 연구전통과 그렇지 못한 열등한 연구전통이 명백히 구분되고, 이에 따라 연구전통의 파산과 합병이 진행됨으로써 과학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 획일화된 지식생산라인과 기제가 구축된다. 최근 거론되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 혹은 대학교육과정의 대폭적 개편 등은 이러한 과학적 파산과 M&A의 표징일 뿐이다. 기실 정상과학은 패러다임의 획일화에 앞서 정치경제적 패권의 요구에 대한 순응성의 획일화를 함축하고 있다. “튼튼하게 만들어진 딱딱한 상자”, 곧 억압적 패러다임(유리스틱)에 따라 구축된 모형들은 정치경제적 패권의 기대에 부응하여 재구성된 실존일 뿐이다.” 김웅진. 2008. “기획논문: 방법론적 실존: 패권적 해체와 재구성.” 글로벌정치연구 1(2): 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