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뇌샤워를 한 느낌이다. 많은 것을 배웠다. “김웅진, 김윤정, 김윤환, 김치호, 박상현, 박신영, 양일국, 이미나, 최별, and 황수환. 2011. 과학의 진보와 창조성. 파주: 한국학술정보.”에서 재인용했다.
이안 해킹은, 내가 과거에 썼던 저작들 및 AM의 일부에서 언급한 것보다도 과학이 더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나는 이와 같은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과학의 요소들과 그 관계를 아주 단순하게 보았다. 과학에는 분명 이론이 있다. 하지만 이론만이 과학의 전부는 아닐뿐더러, 그 이론이란 것도 확실한 설명이나 여타 논리적 산물로 적절히 분석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공리적 형식화가 있다는 것, 일부 과학적 사고는 정확한 방식으로 설명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또한 과학자들이 때때로 이러한 노력의 결과에 의존해서 연구하기도 한다는 것 역시도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다른 영역들에서 도출한 공리를 조합하는 다소 느슨한 방법을 사용한다. 즉, 그들은 논리의 단순한 형태밖에 모르는 철학자들이 보면 기겁하여 나자빠질만한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논리 그 자체는 지금 형식논리화가 자유롭게 사용되고, ‘인류학적’ 고려(유한주의)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요컨대 과학 연구는 나이 진득한 논리학자와 과학 철학자들(특히 나)이 한때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예술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서구사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추상적 및 역사적 전통들은 서로 반목해왔다. 이들의 싸움이 시작된 것은 ‘철학과 시의 고대 전투’에서부터이다….이것은 오늘날까지도 물리학(행태주의 vs 해석방법), 생물학(분자생물학 vs 생물 연구의 질적 연구유형들), 의학(‘과학적’ 의학 vs 모든 종류의 치료), 생태학, 그리고 심지어 수학(칸토주의 vs 구성주의)에서까지도 나타난다. 수차례의 위기와 혁명 기간 동안 추상적 전통들이 역사적 전통으로 바뀌며, 이것은 좋은 과학은 예술이거나, 인간다움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교과서 식의 과학은 아님이라는 나의 테제를 지지해준다. 이안 해킹의 실험 과정에 대한 분석은 과학적 연구의 기술적 측명을 잘 나타내 준다.

과학이 성공하는 것은 가끔씩일 뿐, 과학은 자주 실패하는 녀석이다. 과학의 여러 성공담들은 루머일 뿐 사실이 아니다. 게다가, 과학의 효율은 과학적 전통에 속한 규준이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 판단으로 여겨질 수 없다.

내 연구에서 다루는 두 번째 주제는 바로 과학의 권위에 관해서이다. 나는 과학과 서구의 합리주의를 여타 전통보다도 선호한다는 것에 다른 ‘객관적’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현재 서구과학이 전염병처럼 전 세계를 감염시키고 있는 것과 수많은 사람들이 그 (지적, 물질적) 생산물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을 하자면, 이것이 주장의 결과였던가? 예를 들어, 이 모든 진보의 각 단계가 전부 서구 합리주의의 원칙에 따른 이유들로 치장된 것이었단 말인가? 감염이란 것이 그 손길을 스쳐간 사람들의 삶을 더 나아지도록 만들었는가? 두 질문 모두 대답은 아니오이다. 서구문명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무력에 의해서 서구문명이 강요된 것이지, 서구의 주장이 본질적 진실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즉 서구문명이 더 강한 무기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칼 포퍼는 ‘우리 시대의 일반적인 반합리주의자적 분위기’에 대해 애통해하고, 뉴턴과 아인슈타인을 인류애의 위대한 후원자로 숭배하지만, 이성과 문명의 이름으로 자행된 범되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 반면에, 그는 문명의 이익이란 것이 때로는 ‘제국주의의 형태’로, 그것을 원하지도 않는 희생자들에게 강요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서구문명 바깥에 존재하는 삶이 만들어내는 긍정적 업적에 대해선 털끝만치도 아는 바가 없다. 우리가 이 분야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이라고는 (그리고 불행히도, 여전히 그 모양 그 꼴이지만) 과학은 우수하고 과학 이외의 것들은 꼴 같지도 않다는 헛소리 정도이다. 두 번째 이유는 합리주의자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한 면역화행동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합리주의자들은 기초과학과 그것을 적용하는 행위를 구분했는데, 만약에 어떤 한 파괴행동이 이뤄졌다면, 이것은 과학을 사용해 파괴행동을 벌인 자들이 한 짓이지, 선하고 결백한 이론가들의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론가들이 그렇게 아무 잘못 없이 깨끗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과학의 합리성과 객관성을 칭송한다. 모든 인간적 요소를 제거하려는 핵심 목표의 진행이 비인간적 행위로 이끌어내는 반동이 되는 줄도 모르는 채 말이다. 어쩌면 그들은 과학이 원칙상 행할 수 있다는 선과 실제로 행하는 악을 구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에게는 조금도 위안이 될 수 없다. 모든 종교들은 원칙상 선하지만, 불행히도 이 추상적 선이란 그 종교의 행위자들이 미친놈들처럼 행동하지 못하도록 막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내 비판적 측면에서 보건데, 내가 뒤흔들어 놓은 건 많지만 정작 이뤄놓은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은 내 접근이 완전히 부정적이라고 말한다. 나는 어떤 절차에 반대하지만, 그것 대신에 내 놓은 것은 없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내가 자기들이 가장 좋아하는 두 가지, 서구과학과 인도주의를 실컷 비웃고 무시한 것에 대해 격노해 왔다.

확실히 이 의견들은 옳다. 게다가 내가 해줄 긍정적 제안도 없다. 그러나 아무런 제안도 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문제를 잊어버려서도 아니고, 우리 동료 학자들의 사변적 재능에 필적할 수 없어서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바로 전통들을 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이 내려주신 나의 고매한 지적 재능을 이 전통들에다 잔뜩 베풀어주겠다고 마음먹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전통들은 역사적 전통이지, 추상적 전통은 아니다. 역사적 전통은 멀리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전통들의 가정, 가능성, 역사를 이끌어가는 자들의 (종종 무의식적인) 희망들은 깊이 파고들어가야만 발견될 수 있다.

사회문제에 대한 지적 해결책에 있어서 내가 주로 반대하는 것은 그들이 협소한 문화적 배경에서 시작하고, 거기에 보편적 타상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지금의 정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 정치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개인적 소망을 고려하며, 투표에 의해서든 인류학의 현지 조사 작업에 의해서든 그들을 ‘연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학은 사람들을 내부로부터 이해하고자 하며, 이해와 같은 것들로부터 흘러나오는 사고와 감정들로 변화하기를 제안한다. 한마디로 분명하게 이해된 정치는 철저하게 ‘주관적’이다. (정치에 있어) ‘객관적인’ 이론적 계획을 발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극단적 파시즘조차도 비난하는 것을 거부한 점과 그러한 사상이 지속될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한다는 나의 제안을 통해, 나는 많은 독자들을 분노하게 하고 많은 친구들을 실망시키는 지점에 이르렀다. 이제 명확하게 되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파시즘을 지지하지 않는다. 즉, 파시즘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나의 태도의 적절성에 있다. 이러한 나의 자세가 내가 따르는 사람들의 생각에 편승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로 하여금 파시즘에 대항하여 싸우는 이유가 단지 나를 불쾌하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본래적으로 사악한 체제이기 때문이라는 객관적 본질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인지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답은 “우리는 모두 그런 경향을 갖고 있고, 이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이다.

지금 만약 누군가가 이러한 더 나은 삶에 대한 꿈과 객관적 가치라는 아이디어를 포괄하며 이러한 것을 통해 도덕의식이라는 결과물을 원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전쟁, 심신의 파괴, 그치지 않는 살육과 같은 우리 시대의 가장 끔찍한 대부분의 것은 사악한 개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개인적 희망과 선호를 객관화시켜온 사람들, 즉 그들 스스로를 비인간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최상의 교육은 교육에 있어서 체계적인 시도에 대하여 면역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내가 AM을 썼던 이유는 라카토시를 조롱하기 위함도 있었고, 과학적 전통을 철학법칙의 규칙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함도 있었다.

내가 존경할 만한 행동을 보인 다른 문화에서 온 사람들을 보았을 때 나는 많은 감동과 놀라움을 경험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마침내 나는 내 자신의 냉소주의를 버리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그라지아를 위해 정말 좋은 책을 쓰기로 결심하였다. 내가 그녀를 알고 내가 나의 최고의 글을 나의 눈앞에 펼쳐진 선한 미소의 얼굴 앞에서 썼기 때문에(내가 AM을 쓸 때 라카토시를 마음에 품고 썼다는 것을 기억해라) 그 어떤 비천함 사람일지라도 그들을 위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러한 책을 쓰기 위해서 나는 나에게 추상적인 접근방법으로 묶고 있는 끈들을 끊어야만 한다. 또한 평소에 무책임한 방식의 화법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이성이여 잘 있거라. FAREWELL TO REA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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