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김우재 (2014-)

무상급식, 혁신학교, 그리고 기본소득

이 싸움은 장기전이다. 상황에 따라 다른 방식의 전략들은 가능할 수 있으나, 기본적인 철학과 목표와 가치가 변해서는 안된다. 상대진영은 능수능란하게 욕망을 이용하며, 심리전과 여론몰이에 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장기전의 승리는 정면돌파에 달려 있다.

여기 우리가 소중한 철학과 목표와 가치를 잃지 않고도 승리해왔고, 또 그 승리를 통해 저들의 국가를 개조해나갈 수 있는 전략을 제공하는 몇가지 사례들이 있다. 이 중 두 전략은 진보적 아젠다를 상실했던 여야권이 아니라 제3지대에서 등장해 시민사회로 퍼져나갔으며, 나머지 전략은 여전히 투쟁 중이다. 기본소득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 목표와 가치가 불분명해서가 아니라, 시민사회로 정당성이 확산되는 속도와 파장이 생각처럼 크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형태의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무상급식

가장 유명한, 그리고 진보진영에서 시민사회를 대상으로 성공시킨 몇 안되는 정책 중 하나다. 무상급식으로 야권이 큰 정치적 이익을 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끝낸다면 재원의 문제와 여러 행정적/실천적 문제들 때문에 무상급식은 진보진영의 실패한 기획으로 남을 가능성이 있다. 정책을 입안시켰으면 꾸준히 몰고 나가야 한다. 무상급식은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으며, 진보진영은 이를 수정보완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해야만 한다. [ref] 남찬섭, and 이명진. 2013. “공공성의 재구성과 생활공공성의 등장.” 아세아연구 56(2): 75–110; 김대호. 2010. “무상급식과 보편주의, 그리고 역동적 복지국가.” 월간 복지동향 (140): 12–18. [/ref]

혁신학교

곽노현이라는 이름이 떠오르지만, 혁신학교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는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ref] 신상명. 2005. “[RR2005-22]공영형 혁신학교 모형개발 연구.” [KEDI] 연구보고서. [/ref] 학교를 바꿔야 한다는 문제의식과 공감대는 훨씬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대안학교 등의 이름으로 계속되어 왔지만, 혁신학교는 첫째, 공교육 전체를 바꾸겠다는 거대한 희망, 둘째, 따로 정해진 모델 없이 즉, 외국의 모델을 그대로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과 그들의 경험을 동태적이고 개방적으로 섞어 잠정적 유토피아 개념을 실현시켰다는 점에서 기존의 좌파적 대안학교와 차별된다. 현재 혁신학교가 확산되는 기세는 무시무시하고, 실제로 6.4지방선거의 진보교육감 대거 당선에 1등공신이라는 말도 틀리지 않은 듯 싶다. 교육평론가 이범에 따르면, 실제로 진보교육감들에 대한 지지율은 꾸준히 오르고 있고, 이는 단지 보수교육감 후보들의 단일화 불발이라는 돌발변수 때문만은 아닌 듯 싶다. 혁신학교라는 꾸준하고 조용하게 흘러온 물줄기가 교육감이라는 영역을 진보의 텃밭으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기본소득

기본소득에 관한 체계적인 논의들이 생산되고 있다. 과연 기득권 정당에서 이 정책을 무상급식이나 혁신학교처럼 받을 수 있을 것인지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여러 이유로 인해 기본소득 진영이 헤쳐나가야할 문제들은 많다. 하지만 매우 매력적이고 급진적인 정책적 대안이다. 물뚝심송의 블로그에 이해하기 쉬운 자료들이 많이 올라와 있고, 곽노완 시립대 교수가 이 진영의 대표적 학자다. 기본소득 논의가 한국에서 진행된 지 10여년이 되었고, 내가 기본소득을 인지한지도 5년이 넘었다. 혁신학교가 이론적으로 논의되고 정책으로 체계화되고 실현되는데 꽤 오랜 기간이 걸렸음을 생각해본다면, 기본소득 진영도 새로 옷을 갈아입고 지속적인 상상력을 동원해 정치세력에게 영향을 미칠 방식과 전략을 생각해 볼 때가 된 것 같다.

진보이념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

2003년에서 2004년까지 홍기빈은 ‘진보이념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라는 연재를 ‘월간말’에 게재했다. 홍기빈은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번역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지만, 그 훨씬 이전부터 진보이념의 새로운 대안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몇 안되는 한국의 먹물이다. 특히 이 시리즈는 앞으로 계속될 그의 지적 궤적을 점쳐보는 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고, 특히 여야는 물론 현재의 진보정당의 구도 속에서 그 어느누구에게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참여형 과학기술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연재물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들을 남겨 둔다.


필자는 그래서 그러한 의미를 잘 드러내는 ‘진보進步”라는 한자어를 훨씬 좋아한다. 이 progress가 아닌 ‘進步’는 보수주의의 상대개념이 아니라 보수를 그야말로 ‘지양(Aufhebung: 포함하면서 초월한다는 뜻)’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존 체제의 가치 있는 것들이 수구세력의 잇속으로 변질되고 왜곡되는 것을 막고 거기에 새로운 가치를 결합하여 발전시키는 진정한 ‘보수’는 오로지 진보세력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생 고되게 일해 온 힘없는 노인들을 굶주리도록 방치하는 이 사회의 지배세력이 무슨 낯짝으로 ‘유교적 전통’을 떠든단 말인가. 분단과 반공으로 배를 불린 자들이 어떻게 ‘민족’과 ‘자유민주주의’를 입에 올리는가. ‘유교적 전통’ ‘민족’ ‘자유민주주의’에 소중히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이제 오롯이 진보세력의 몫이다. 

이렇게 ‘역사의 발전 법칙’ 대신 ‘인간적 가치의 확보’라는 화두를 내걸었으니 이제 ‘진보’라는 이념의 위기는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도대체 그 인간적 가치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는 질문이 바로 이어지게 되며,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진보란 그저 막연한 휴머니즘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런데 그 ‘막연한 휴머니즘’ 정도로는 안될까? 진보진영을 자처하는 일군의 ‘논객’들의 주장처럼, 그저 진보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 정도로 해두어도 불합리한 현실을 ‘비판’하는 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안 됐지만 충분하지 못하다. 그런 ‘논리적 비판’ 수준으로는 진보진영이 정치세력으로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갈파한 대로, ‘비판’이라는 것은 단지 ‘현실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논리적 모순을 낳게 된 현실의 구조를 해명하고 그 현실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진보진영이 그런 의미에서의 비판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논객’ 집단이 아닌 현실 정치세력의 모습을 띨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그 논객들의 ‘상식’은 사실 그들이 속하는 계층의 특이한 사고방식에 불과하기 십상이다. 그 내용도 서양 비판적 지식사회의 최신 유행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카스토리아디스(Cornelius Castoriadis)가 지적했듯이, 1968년 혁명 이후 서구 지식사회에서 나온 담론들 중 자유주의 정치/경제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담고 있는 것이 있었던가. 따지고 보면 ‘자유주의 좌파’ 정도에 불과한, 그야말로 기성 질서 내에서의 ‘상식’적인 이야기들이 아니었는가.

결국 진보이념이 소수 지식인들의 댄디즘을 넘어 대중 정치운동의 이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인간적 가치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 밖에는 길이 없다. [ref] 홍기빈. 2003. “새 연재 | 홍기빈의 ‘진보이념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 – 진보는 역사법칙 아니라 인간적 가치로의 강인한 도약.” 월간말: 106–11. [/ref]


요약하자면, 진보진영의 기치 아해 ‘집단적 실천’을 통해 새로운 ‘인간적 가치’를 창조하는 것만이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는 길이라는 말이 되겠다. [ref] 홍기빈. 2003. “홍기빈의 ‘진보이념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2-‘진보는 새로운 “인간적 가치”의 창조.’” 월간말: 88–93. [/ref]


지금까지 유럽 문명이 알아왔고 신봉해 온 모든 가치들이 그 근본부터 무너지는 상황에서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하여 그 ‘대안적 가치’의 구조를 건설한다는 말인가…. 새로운 인간적 가치를 만들어 내기 위해 니체가 취한 접근법은 ‘모든 가치의 재평가’였다. 지금까지 인간세계를 지배해 온, 하지만 지금 조각조각 무너지고 있는 그 수많은 가치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이해하여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든가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바꾸어버리든가 하는 것이었다. [ref] 홍기빈. 2004. “[홍기빈_’진보이념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 ③] 대안은 현존하는 가치의 ‘재평가’로부터.” 월간말: 170–76. [/ref]


1960년대미국 신좌파운동의 가장 강력한 지적원천의 하나가 이 『독점자본』 이었다는 것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스위지와 그가 창간한 『먼슬리리뷰』는 신좌파운동에 어떤 영향을미쳤을까. 첫째, 미국‘급진파정치경제학연합’ 등 진보적학문그룹의 태동이다. 이 진보적학자들은 성·인종차별 등 미국사회에 만연한 각종 모순과 부조리를 자본축적의 흐름에 연결시키며 좀더 정의롭고 인간적인 정치·경제체제를 요구하는 집단으로 자리잡고 있다. 둘째, 종속이론이나 세계 체제론 같은 주변부 정치경제학의 태동이다. 선구적이론가였던 프랑크를 필두로 종속이론진영의 이론가들이 『먼슬리리뷰』 진영과 맺은 긴밀한관계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스위지의이 ‘세가지패배’를 종합해보면 현재세계의 뚜렷한 흐름이 나온다. 그것은 사회에 대한 비판적 담론의 장에서 언젠가부터 ‘자본’과 이에 종속된 정치·경제체제에 대한 근본적비판이 원천적으로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대신 ‘참신함’ ‘개혁성’ ‘도덕성’ ‘진보’ ‘정의’같은 알쏭달쏭하지만 누구나 옳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김빠진 동어반복이 비판적담론의 자리를 차지했다. 모두 다 착하고 모두 다 지적이다. 하지만 오늘도 수 많은 사람들이 숨막히는 경제적·군사적·정치적 폭력 앞에 거꾸러지고 있는 데도, 미친듯이 질주하는 이 지구화의 세계가 어디로가고  있는지 시원하게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 위에서 지구적 자본과 전쟁세력은 ‘본업은 이제부터’ 라며 팔을 걷어 붙이고 있다. [ref] 홍기빈. 2004. “[홍기빈 _ ‘진보이념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5] 폴 스위지 : 역사와 정면대결한 거목의 위대한 패배.” 월간말: 212–19. [/ref]


하지만 몽양세대는 약관을 전후하여 이미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거쳐 국가조직에의 참여기회를 박탈당한 채성 장했다. 그들은 출발부터 ‘재야’로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지식인들은 그 이전 조선지식인들의 지독한 국가중심주의로부터 해방되어, ‘진정 근대의 정신은 무엇인가’란 문제와 백지상태에서 대결을 시작한 세대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사상적 상상력의 뿌리가 전통적인 동양의 지적배경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몽양은 정치가로서 손문, 장개석, 왕정위, 일본의 고노에 공작, 다나카 육군 대신은 물론 요시노사꾸조(吉野作造) 같은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숱한 동양의 명사들과 두루 대담하고 담판하면서 그의 이력과 명성을 쌓아왔다. 그 와중에서 그가 상대를 감복시키고 침묵시킨 언어들을 보게 되면 그 상상력의 원천이 기본적으로 한·중·일 삼국이 공유해 온 동양의 지적전통에 있음을 볼 수있다.

그래서 몽양은 20세기 한국사의 한 복판을 관통한 인물이면서도 서구사회에서 생겨난 이념적 틀에 이리저리 재단 당하는 일 없이 21세기의 우리에게고스란히 넘어왔다. 오늘의우 리들은 과연 그 내재적 근대화를 완수하였는가. 냉전이라는 지정학적 구조가 또 한번 바뀌고있는지금 한반도의 우리들은 아시아 연대와 남 북좌우합작이라는 두 가지를 함께 끌어안아야 할 상황에 있지 않은가. 이런 문제들을 풀어갈 21세기의 진보이념이라면 그래서 몽양이 남긴 거대한 정치적 자산의 보따리를 한 번 철저하게 파헤쳐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ref] 홍기빈. 2004. “[홍기빈의 ‘21세기 진보이념을 찾아서’ 8] 21세기 아시아의 진보이념으로서 몽양 여운형의 사상.” 월간말: 162–69. [/ref]


이 시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먹물들 중 자신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한국이라는 특수성 속에서 세계를 관통할 진보이념을 고민하는 자들이 더 많이 등장하길 바란다. 이제 한국진보세력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급진적 이념과 이를 정책으로 실현해 낼 한 무리의 진보적 씽크탱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