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발췌록

신채호: 차라리 괴물을 취하리라

신채호의 아나키즘은 복잡한 역사를 지니는데, 그는 중국, 일본, 서양 사상가들의 책을 읽고 직접 서신을 교환하며 자신의 사상을 수립했다. 이 때 읽은 책들 중에 다윈의 <종의 기원>을 필두로, 웰스의 <세계문화사>,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밀의 <자유론>, 게다가 에드워드 기본의 <로마제국멸망사>는 직접 영문으로 자습해 읽었다고 한다. 이 점에서 “신채호는 당시대의 개명 유학적 역사학자들과는 다른 시야와 지평을 가지고 있었다”는 신복룡의 평가는 주목할만 하다. 신복룡. 2008. “신채호의 무정부주의.” 동양정치사상사 7(1): 67–97.

아래 인용하는 글은 신채호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언제 지었는지 알려지지 않은 글이다. 지금 다시 읽어도 일독의 가치가 있다. 古語지만 짧은 글들이니 (고등학생들 논설로 읽히는 것 같다) 천천히 음미해보면 좋다. 예를 들어, “이같이 단조(單調)로 진행되는 사회가 어디 있느냐. 예수교를 믿어야 하겠다 하면, 삼두락(三斗落)밖에 못 되는 토지를 톡톡 팔아 교당(敎堂)에 바치며, 정치운동을 한다 할 때에는 이발사가 이발관을 뜯어 가지고 덤비나니, 이같이 뇌동부화(雷同附和)하기를 즐기는 사회가 어디 있느냐.”는 구절은, 교회에 모든 재산을 가져다 바치고, 정치한다고 집안 재산을 다 말아 먹으며, 무엇을 건설적으로 꾸준히 하지 못하고 잠시잠깐 흥분하고 마는 한국의 구조적 문제가 오래된 것임을 시사한다. 3절에서 손민의 삼민주의는 그래도 주체적인 이념이라는 말로 당대 조선의 먹물들의 비주체적인 학문수입을 비판한다. 4절은 사회와 개인, 그리고 지식인 모두가 외세의 문화에 예속되어 있는 상태보다는 차라리 괴물이 되는 것이 나으리라는 결론을 내린다. 어쩌면 21세기 한국이 여전히 괴짜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신채호의 바람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건 아닐까 싶다.

이런 시대에는 괴물이 등장한다. 그 괴물이 온전히 민중의 편이기를 기대하려면, 사회는 과학을 문화로 흡수해 두어야 한다. 과학적 아나키즘의 함의가 바로 그것이다.


차라리 괴물을 취하리라 (신채호)
1
한 사람이 떡장사로 득리(得利)하였다면 온 동리에 떡방아 소리가 나고, 동편 집이 술 팔다가 실패하면 서편 집의 노구도 용수를 떼어 들이어, 진(進)할 때에 같이 와— 하다가 퇴(退)할 때에 같이 우르르 하는 사회가 어느 사회냐. 매우 창피하지만 우리 조선의 사회라고 자인할밖에 없다.
삼국 중엽부터 고려 말일(末日)까지 염불과 목탁이 세(勢)가 나, 제왕이나 평민은 물론하고 남(男)은 여(女)에게 권하며, 조(祖)는 손(孫)에게 권하여 나무아미타불한 소리로 8백 년을 보내지 안하였느냐.
이조(李朝) 이래로 유교를 존상(尊尙)하매, 서적은 사서오경이나 그렇지 않으면 사서오경을 되풀이한 것뿐이며, 학술은 심(心)·성(性)·이(理)·기(氣)의 강론뿐이 아니었더냐.
이같이 단조(單調)로 진행되는 사회가 어디 있느냐.
예수교를 믿어야 하겠다 하면, 삼두락(三斗落)밖에 못 되는 토지를 톡톡 팔아 교당(敎堂)에 바치며, 정치운동을 한다 할 때에는 이발사가 이발관을 뜯어 가지고 덤비나니, 이같이 뇌동부화(雷同附和)하기를 즐기는 사회가 어디 있느냐.
2
개인도 사회와 같아 갑종교(甲宗敎)로 을종교(乙宗敎)를 개신(改信)하거나, 갑주의(甲主義)로 을주의(乙主義)에 이전(移轉)할 때에 반드시 주먹을 발끈 쥐고 얼굴에 핏대가 오르며 씩씩하는 숨소리에 맥박이 긴급하며, 심리상의 대혁명이 일어나 어제의 성사(聖師)가 오늘의 악마가 되어 무형(無形)의 칼로 그 목을 끊으며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구적(仇敵)이 되어 무성(無聲)의 총으로 그 전부를 도륙(屠戮)한 연후에야 신생활을 개시함이 인류의 상사(常事)어늘, 근일(近日)의 인물들은 그렇지도 안하다.
공자를 독신(篤信)하던 자가 이제야 예수를 믿지만 벌써 36년 전의 예수교인과 같으며, 제왕의 충신으로 자기(自期)하던 자가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존봉(尊奉)하지만, 마치 자기의 모복중(母腹中)에서부터 민주의 혼을 배워 가지고 온 것 같으며, 그러다가 돌연히 딴 경우가 되면 바울이 다시 안연(顔淵)도 될 수 있으며, 당톤이 다시 문천상(文天祥)도 될 수 있으며, 바쿠닌의 제자가 카이제르의 시종도 될 수 있으니, 이것이 무슨 사람이냐.
그 중에 아주 도통한 사람은 삽시간에 애국자·비애국자, 종교가·비종교가, 민족주의자·비민족주의자의 육방팔면(六方八面)으로 현신(現身)하나니 어디에 이런 사람이 있느냐.
그 원인을 소구하면, 나는 없고 남만 있는 노예의 근성을 가진 까닭이다.
노예는 주장은 없고 복종만 있어, 갑의 판이 되면 갑에 복종하고, 을의 판이 되면 을에 복종할 뿐이니, 비록 방촌(方寸)의 심리상(心理上)인들 무슨 혁명할 조건이 있으랴.
3
손일선(孫逸仙)의 삼민주의(三民主義)는 민주주의·사회주의 등을 혼동하여 그리 찬탄할 가치는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주의는 주의다.
우리의 사회에는 수십 년 동안 지사(志士)·위명자(爲名者)가 누구든지 한 개 계시한 소주장(小主張)도 없었다.
그리하여 일시의 활용에는 썩 편리하였다.
실업(實業)을 경영하는 자를 보면 나의 의견도 실업에 있다 하며, 교육을 실시하려는 자를 보면 나의 주지(主旨)도 교육에 있다 하며, 어깨에 사냥총을 메고 서북간도의 산중으로 닫는 사람을 보면 나도 네 뒤를 따르겠노라 하며, 허리에 철추를 창해역사(滄海力士)를 꿈꾸는 자를 보면 내가 너의 유일한 동지로다 하고, 외인(外人)을 대하는 경우에도 중국인을 대하면 조선을 유교국이라 하며, 미국인을 대하면 조선은 예수교국이라 하며, 자가의 뇌 속에는 군주국·비군주국, 독립국·비독립국, 보호국·비보호국, 무엇이라고 모를, 집을 수 없는, 신국가를 잠설(潛設)하여 시세를 따라 남의 눈치를 보아, 값 나가는 대로 상품을 삼아 출수하는도다.
애재(哀哉)라. 갑신 이후 40여 년 유신계(維新界)의 산아(産兒)들이 그 중에 시종 철저한 경골한(硬骨漢)이 몇몇이냐.
4
어떤 선사(禪師)가 명종(命終)할 때 제자를 불러 가로되,
“누워 죽은 사람은 있지만 앉아 죽은 사람도 있느냐.”
“있습니다.”
“앉아 죽은 사람은 있지만 서서 죽은 사람도 있느냐.”
“있습니다.”
“바로 서서 죽은 사람은 있으려니와 거꾸로 서서 죽은 사람도 있느냐.”
“없습니다. 인류가 생긴 지가 몇만 년인지 모르지만 거꾸로 서서 죽은 사람이 있단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 선사가 이에 머리를 땅에 박고 거꾸로 서서 죽으니라.
이는 죽을 때까지도 남이 하는 노릇을 안 하는 괴물이라, 괴물은 괴물이 될지언정 노예는 아니 된다. 하도 뇌동부화를 좋아하는 사회니 괴물이라도 보았으면 하노라.
관악산중(冠嶽山中)에 털똥 누는 강감찬의 후신이 괴물이 아니냐.
상투 위에 치포관(緇布冠)을 쓰고 중국으로 선교(宣敎) 온 자가 또한 괴물이 아니냐.
이는 군함·대포·부자유·불평등·생활곤란·경제압박 모든 목하(目下)의 현실을 대적하지 못하여 도피하여 이상적 무릉도원의 생활을 찾음이니 무슨 괴물이 되리오.
5
조선인같이 곤란·고통을 당하는 민족 없음을, 따라서 조선에서 무엇을 하여 보자는 사람같이 가읍(可泣)할 경우에 있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우가 그렇다고 스스로 퇴주(退走)하면 더욱 자살의 혈(穴)에만 근(近)할 뿐이며, 남의 용서를 바라면 한갓 치소만 살 뿐이니, 경우가 그렇다고 남의 용서를 바랄까, 취소만 살 뿐이니라. 스스로 퇴거할까, 더욱 자살의—중간 누락—우가 이러므로 조선에 나서 무엇을 하려 하면 불가불 그 경우에서 얻는 전염병을 예방하는 방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안순암(安順庵)이 처음 이성호(李星湖)를 보러 가서 목이 말라 물을 청하였다. 그러나 물은 주지 않고 이야기만 한다.
밤이 으슥한 뒤에 성호가,
“이제도 목이 마르냐.”
하거늘,
“사실대로 목마른 증은 없어졌습니다.”
한즉, 성호가 가로대,
“참아 가면 천하의 난사(難事)가 다 오늘밤의 목과 같으니라.”
하였다.
이같이 목말라도 참고, 배고파도 참고, 불로 지져도 참고, 바늘로 손·발톱 밑을 쑤셔도 참아, 열화지옥의 만악(萬惡)을 다 참아 가는 이는 아마 도학 선생(道學先生) 같은 이가 아닐까. [ref] 신채호. 2003. “신채호-차라리 괴물을 취하리라.” 담쟁이교실 8. [/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