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공대 고전강독회 공고문

http://heterosis.egloos.com/772998 원글


2004년 6월에 시작해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제가 만든 강독회의 초기 공고문입니다. 강독회를 계기로 최한기를 읽었고, 이를 통해 도올을 만났습니다.

포항공대 고전강독회 

일주일에 한번 함께 모여 고전을 읽고 토론할 포항공대내의 숨은 지성들을 모십니다. 하루 일과 중 남는 시간을 이용해 고전을 읽고 일주일에 몇 시간을 투자해 함께 나눌 열정만 있다면 그 누구든 환영합니다(신비주의자와 초자연주의자는 사양합니다). 

자연계에 있어서 단 한 가지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다면 그것은 정지해 있는 것이며, 변화는 깨어있는 이에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과학자이며 과학자는 비판정신을 존중해야 합니다. 과학자가 다른 사람보다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그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변화하는 현대과학의 세계 속에서 과학과 공학의 구분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과학은 공학이며 공학은 과학입니다. 

과학 혹은 공학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은 자연을 힘이 아니라 이해로 지배해왔습니다. 이것이 마술이 실패한 지점에서 과학이 승리한 이유입니다. 마술은 자연에 걸린 주문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과학이 성공한 이유 중의 하나는 오류 수정의 기제가 과학 그 자체에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과학을 지나치게 넒은 의미로 생각한다고 하겠지만, 우리가 자기비판을 하거나 우리의 생각을 외부의 세상에 적용해서 검증할 때 우리는 이미 과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관대하고 무비판적일 때, 희망과 사실을 혼동할 때, 우리는 사이비 과학과 미신에 빠져들게 됩니다. 최한기는 무엇이라 했습니까. “그런데도 여기서 지나쳐 천지와 인물의 소이연(所以然)의 이치를 궁구한답시고 허무하여 전혀 알 수 없는 데로 빠져들어 가면, 비록 혀가 닳도록 도를 말한다 하더라도 어찌 그것을 믿게” 할 것이냐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150년 전 과학적 지식의 창도를 외친 그의 가르침에 얼마나 부흥하고 있습니까. 최한기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허망한 진리를 외치는 인문학자들이 대한민국에는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의 외침이 과학 하는 우리의 상식과 어긋나는 부분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과학은 과학 외적인 것과 대립되는 학문이 아닙니다. 과학의 대가들은 과학 이외의 분야에서 끊임없이 상상력의 샘을 발견하고 이를 과학으로 이해하려 했던 위대한 사상가들이었습니다. 과학적 지식의 성장에는 패러독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들이 많이 누적되면 될수록, 끊기는 부분들과 알 수 없는 미스터리들이 등장하여 이것들이 혼돈에서 단순함을 부각시키고, 합리적인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시기에 종종 자신의 좁은 전공분야의 외부로부터 개념적인 진보의 결정적인 실마리를 얻는다는 것은 사실이며, 또한 인류의 사상사(思想史)에 있어서, 두 개의 다른 사상의 조류가 만나는 그러한 지점에서 가장 풍요한 발전이 자주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마도 전적으로 타당한 얘기일 것입니다. 이러한 조류들은 인류 문화의 전혀 다른 분야에, 상이한 시대와 상이한 문화 환경과 상이한 종교적 전통에 그 근원을 두고 있을 것이지만, 그리하여 그들 둘이 실제로 만나는 일이 이루어진다면, 행여 그처럼 긴밀히 서로 연결을 맺어 하나의 진정한 상호 작용이 일어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새롭고도 흥미진진한 발전이 뒤따라 전개될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을 것입니다. 

진정한 학문과 잘못된 교의의 중간에 무지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자연적인 감각과 상상력은 불합리에 빠지기 쉬운 것이 아니며, 자연 자체는 과오를 범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풍부한 언어를 가지고 있으므로 보통의 상태보다도 더욱 현명해지거나 더욱 무모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호기심은 그 자체만으로 존재할 이유가 있으며 누구라도 영원성과 생명과 놀라운 세상의 신비를 생각하면 경외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비를 매일 조금씩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우리는 신성한 호기심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과학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과학과 공학은 진정 하나의 기술로서만 파악되는 그런 하부구조의 학문일 뿐이었습니까. 대한민국의 과학역사 이제 150여 년, 과학은 아직 “우리의 과학”이 아닙니다. 자기를 잃어버렸다는 일이야말로 우리 역사에서 모든 질병의 근원입니다. 대한민국의 철학자들은 철학이라는 완제품을 수입하고 있으며 이는 대한민국이 자멸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수입해야 할 것은 철학이라는 완제품이 아니라, 철학 하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학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우리의 과학”이라 말하려면 과학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과학이 기술이상의 그 어떤 의미를 갖기 위해, 과학자가 하나의 인격자가 되기 위해 대한민국의 과학은 어떠해야 하며 과학자는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는 그 모범을 과학의 탄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과학의 역사는 말합니다. 과학은 하나의 기술이기 이전에 사상이라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과학사상을 창출할 수 있습니까. 

독서는 충실한 인간을 만들고, 회의는 각오가 선 인간을 만들며, 저술은 정확한 인간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속기 쉬운 동물이므로 무엇인가를 믿어야 하며 선한 믿음의 기반이 없을 때 인간은 악한 믿음에 만족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독서와 사색은 우리를 이러한 악한 믿음으로부터 탈출시키는 방법론적 도구가 됩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며, 그 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오늘 실험실과 강의실에서 외롭습니까. 학문을 하는 자는 많되 용기 있는 자는 너무도 적다라는 말의 진의를 느끼십니까. 고전강독회에 참가하십시오. 당신의 외로움은 당신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가 느끼게 해드리겠습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걷는 것을 보십시오.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춥니다. 천도를 즐거워하는 즐거움이라야 대동의 즐거움이 된다고 했습니다. 모입시다. 그리고 웃지 않는 진리는 진리가 아님을 증명합시다. 우리는 서로 외로운 곳에서 홀로 해왔으며 이제 함께 걸을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 고전강독회로 오시기 바랍니다. 

웰스, 파스퇴르, 베르너, 베이컨, 도킨스, 공자, 칸트, 맹자, 데카르트, 순자, 하이젠베르크, 뉴튼, 마이어, 세이건, 홉스, 니체, 갈릴레이, 아인슈타인, 헉슬리, 포퍼, 하이에크, 부르디외, 뚜웨이밍, 맑스, 해밀턴, 쿤, 함석헌, 안창호, 코페르니쿠스, 크로포트킨, 도브잔스키, 카우프만, 레비스트로스, 해리스, 미드, 슈마허, 슈레딩거, 데닛, 최한기, 튜링, 울람, 프로이드, 굴드, 흄, 니덤, 김용옥, 윌슨, 비트겐슈타인, 러셀, 유한준, 정약용, 화이트헤드, 다윈으로부터. 
* 연락처: xxx-xxxxxxxx (고전강독회를 찾는다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첫 모임은 도서관 세미나실에서 6월 18일 저녁 7시에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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