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아카이브 (2002-2013), 취어생 (2002-2008)

실험실 생활

http://heterosis.egloos.com/773030 원글


분자생물학의 기초를 위한 책들에 대한 박우석 교수님의 반응에 답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위와 같은 제목의 사회구성주의 계열 책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 글은 그 책과는 전혀 관계 없습니다. 

자연과학계통의 수업들은 형식적으로 “XXX실험”이라는 과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공자들에게는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어 있죠. 문제는 바로 앞 문장에서 제시되었듯이 이러한 실험과목들이 “형식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대학에서 시행중인 실험과목들이 형식적이며 더 잔인하게 말한다면 불필요합니다! 왜 형식적인지는 뻔합니다. 첫째는 돈이 없으니 학부생에게까지 그 엄청난 실험비용을 대주지 못하겠다는 거고, 둘째는 실험에 소요되는 기간은 몇시간으로 되는 것이 아닌데도 그 몇시간안에 실험을 마쳐야 하니 당연히 형식적으로 흘러가게 되는 겁니다. 

물리학이나 화학실험에 관해서는 많은 지식이 없으니 생물학 실험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생명과학에 관계된 분야에서 대학원에 들어온 신입생들에게 처음 가르치는 일은 교과서에서 배우던 추상적인 세계를 현실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과서에서 DNA에서 RNA로의 전사가 일어난다라고 막연하게 배우던 것을 실제로 어떻게 반응시켜서 일어나게 하는지를 가르치는 겁니다. 교과서에 그런 방법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당연히 신입생들은 당황합니다. 그런생활은 반년에서 일년정도 하게 되면 교과서의 지식들이 몸으로 흡수되는 것을 (대부분) 느끼게 됩니다. 그때가 되어야 실험을 디자인하고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는 그런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결론은 학부에서 배우는 교과서의 지식은 시험실에서 적용되는 데에 일정시간의 몸수행을 요구하며 그러한 지식의 적용은 지식의 습득과는 완전히 다르다라는 것입니다. 

현재 대학에서 시행중인 실험과목들은 당연히 실험을 디자인 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미리 커리큘럼을 세워놓고 짜여진 커리큘럼대로 “실험방법!” 만이 강제적으로 가르쳐집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현재의 학부 실험과목들은 “실험을 디자인”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 방법을 배우도록” 하는 데에 그 주안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험을 디자인”하는 방법은 대학원에 와서야 배울 수 있도록 현재 한국의 자연과학의 구조가 편성되어 있는 겁니다. 

실험실에 가서 1년을 있는다는게 왜 실험과목을 듣는것과 다른지는 위의 설명으로 어느정도 해결이 되겠지만 대부분의 자연계통 학부생들이 가지는 경험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학부시절 3학년이나 4학년때 “연구참여”라는 과목을 통해서나 혹은 교수나 선배와의 친분등을 통해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며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물론 대학원에 가기 위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의도도 포함되죠. 그런데 이런 학생들은 처음에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한 6개월쯤 지나면 교과서를 이해하는 폭이 다른 학부생들과 완전히 달라지고 응용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을 느낍니다.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볼때에도 이런 학생들은 정말 이해의 강도가 완전히 다릅니다. 이건 머리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는 아닙니다. 분명히 연구참여라는 과정을 통해 무언가를 얻어낸 겁니다. 전 이게 교과서의 지식이 體化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제기하신 의문점은 실험과목과 실험실 생활에서 배우는 지식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으로 해결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제가 모교 교수님들을 만날때마다 실험과목을 아예 폐기하고 연구참여라는 수업을 만들어 아예 1년정도 실험실 생활을 하게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곤 합니다. 그런 수업형태를 이곳 포항공대에서는 실행하고 있습니다. 이곳 실험실에는 학부생들이 상당수 포진하고 있고 그아이들 1년쯤 지나면 교과서의 이해폭이 정말 엄청나게 진보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실험실 진입자체가 어려운 이유는 막노동 시장에 진입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와 비슷합니다만 교수님이시니까 인적 관계를 최대한 활용하시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전에 인지과학학생회 워크샵에서 카이스트에 강사로 계시는 장대익 선생님을 만나서 이런 주제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전 과학사회학이나 과학철학 과학사를 공부하는 분들은 실험실 생활은 의무적으로 1년정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장대익 선생님도 동의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대학원 박사과정때 성선택을 논문 주제로 잡고 최재천 교수님 실험실에서 1년 넘게 실험실 생활을 하셨다고 하더군요. 최재천 교수님이니까 가능한 일이겠습니다만 “좋다”라고 흔쾌히 허락하시고는 자리를 바로 내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최재천 교수님이 어디에선가 매트 리들리의 이야기를 하신적도 있습니다. 리들리는 실험실을 발로 뛰어다니면서 책을 위한 정보를 수집한다고 하죠. 실험실에 거의 상주한다고 들었습니다. 미국만 해도 그런 진입에 인색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재천 교수님같은 의식있는 분자생물학자가 많지야 않겠지만 (교수님의 의구심은 이런 과학자들의 닫힌 자세에 대한 질책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또 없는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 게시판 아래에 최근에 “인간의 사회생물학”을 쓰신 정연보 선생님은 그런 진입에 별 거부감을 가지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그렇지만 저는 교수가 아닙니다. (인맥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고의 방법일 듯 싶습니다) 

제가 장황하게 한 이야기는 생명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연구자들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이런 문제가 생물철학 하시는 분들에게 알려지지 않는다는 건 학문이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극을 의미하는 거겠지요. 

전 가끔씩 말이나 글로 철학자분들께 알려드릴 수 없는 실험실에서 얻은 어떤 지식의 구조를 알려드리고 싶다는 꿈을 꿉니다. 이러한 표현 불가능한 (이곳의 구성원들은 도가 튼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지식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공유하는 상식입니다. 물론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생물학에 국한된 겁니다. 물리학은 또 다른 실험실 생활을 격을 것이고 (어쩌면 이곳과는 판이하게 다른) 공학분야의 실험자들은 거의 회사생활과 다름없는 실험실 생활을 보낼지도 모릅니다. 고전강독회에서 만나는 다양한 분야의 전공자들과 대화하다보면 그런 실험실 생활들이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뭐가 비슷한지도 알게 됩니다. 

자연과학자들이 인문학자들과 다른 점은 책과 머리를 떠나 실제로 자연현상과 접하고 그것을 조작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는 지식이, 그 차이가 두문화 사이의 괴리감을 조성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곳에서도 중간자의 위치에 있고 가끔은 이렇게 책을 읽는 저를 뒤에서 욕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일과가 끝난 밤이라도 교수님의 눈치를 보며 책을 읽는 저로서는 이곳 사람들의 편협함을 옹호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저는 옹호할 수가 없습니다. 

두서없이 실험중에 막 쓴 글입니다. 이해하면서 봐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