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식민지 혹은 한국적 학문의 부재 혹은 학문의 서구종속성 문제

올해 들어 갑자기 김경만 교수가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문학동네)이라는 책을 들고 나왔다. 이 책에서 그는 사회학자 김경동을 매판사회학자로 지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국 이론들에 관한 소개조차 깊이가 결여된 잡화점 나열식의 이런 글이 사회학자가 쓴 ‘논문이 되고 나중에는 ‘저서’가 되어 책으로 출간된 것이다. 이런 식의 글은 서양이론에 대한 비판적 이해와 깊이 있는 독해는커녕 그야말로 “소화도 되지 않은” 서양이론들을 2차 문헌에 입각해 쭉 세워놓은 꼴 이상은 아니다. 그럼에도 강신표는 이 문제를 지적하지 않은 채, 김경동이 외국 이론의 소개와 정리를 “잘하고 있다”고 칭찬한다. ‘문화제국주의 시대의 매판사회학자’라는 그 멸칭조차 과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원로 사회학자에게서 드러난 한국 사회과학계의 참상이다. 매판조차 아무나 하는 게 아니고, 제대로 한다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출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김경만은 한국의 사회과학자들이 ‘글로벌 지식장’ 즉 세계무대로 나아갈 생각은 안하고 우물 속의 개구리처럼 한국에서 자신을 신격화하는 이들에 만족하며 자위하고 있다고 진단하는데, 이 부분은 조한혜정에 대한 비판에서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조한혜정은 학생들과 한국에서나 통할 세미나로 자위하면서 세계적인 학자들과 교류도 하지 않고, 그 어떤 경쟁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조한혜정은 메이저 리그로 나가지 않는 비겁한 투수가 된 것이다.

이제 조한혜정은 두 가지 선택지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글로벌 상징공간의 경쟁 규칙을 무시하고 자신의 세미나에서 하듯 그들의 작업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평가함으로써 그 상징공간에서 스스로를 배제하는 것이다. 또다른 하나는 경쟁 규칙에 따라 상징권력이 있는 학자들과 싸워서 자신의 상징권력을 강화함으로써 자신의 세미나 결과를 즉각 세계적인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것이다. 전자가 마치 씨름선수가 모래판 밖으로 도망가 내가 이겼다고 외치는 것과 같다면, 후자는 물론 모래판 안에서 진짜 승부를 가리는 것이다. 포도가 시큼한지 달콤한지 따서 먹어봐야, 즉 씨름판에서 한판 해봐야 알 수 있지 그 판을 ‘외면’해선 절대 알 수 없다… 물론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조한혜정은 전자를 선택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글로벌 상징공간에서 상징권력이 있는 사람들과, 이들과 연계된 출판사나 학술지는 연세대학교에서 진행되는 조한혜정 세미나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출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더 재미있는 것은, 김경만이 사회학자 김경동과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을 넘어 최재천과 장대익의 ‘식탁’류 글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재천과 장대익과 같은 ‘식탁류’의 경우는 조한혜정보다 더 처참하게 비판당한다. 적어도 조한혜정은 국내의 학자들을 상대로 학문활동을 하지만, 식탁류는 대중만을 상대로 매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재천은 ‘기회주의자’로 명명된다.

이제 ‘식탁류’의 책들이 가진 폐해가 어떤 것인지 자명해진다. 왜 최재천은 르원틴, 굴드 등에 도전해 윌슨을 옹호하고, 나아가 윌슨의 이론이 가진 문제점을 보완하고 발전시켜 씨름판, 즉 ‘글로벌 상징공간’의 주인공이 되길 스스로 포기하는가? 최재천과 ‘식탁류’ 학자들은 박사학위를 받고 기여해야 할 전문분야, 즉 ‘씨름판’ 안에서 벌이는 진짜 승부를 포기하고 모래판 밖에서 대중에게 대중에게 말을 걸고 거기서 ‘권위’를 얻으려 한다. 이러한 권위, 명성, 유명세는 동료학자들이 아니라, TV를 비롯한 각종 미디어와 상업적 이득을 바라는 출판사가 공모해준 것이다. 왜 적장과의 싸움은 회피하고 별다른 노력 없이 무장도 하지 않은 양민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기뻐하는 것일까? 물론 과학의 대중화니,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이니 하는 온갖 구호를 갖다붙이겠지만, 나는 이런 행태가 지적 거인들과의 힘겨운 싸움은 회피한 채 세속적인 성공을 향한 ‘쉬운 길’로 가려는 ‘기회주의’의 소산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앞서 논의한 조한혜정과는 다른 의미에서 이들은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이 세계수준을 추격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들은 외국에서 한물갔거나 이미 결론이 난 논쟁을 수입해 ‘당의정’을 만들고 이를 상업적인 마케팅을 통해 유통하면서 ‘저자-출판사-미디어’라는 단단한 ‘삼각 연줄’을 형성한다. *출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모든 학자가 글로벌 지식장으로 나갈 수는 없다. 비영어권인 유럽에도 많은 학자들이 있지만, 그들이 굳이 영어로 된 글로벌 지식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 하지는 않는다. 김경만은 분과학문들이 지닌 독특한 다양성과 학문적 특성들로 인해 벌어지는 차이를 지나치게 간과하는 것 같다. 우선 조한혜정의 문화인류학, 특히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연구에 있어서는 굳이 그 연구들이 즉각적으로 글로벌 지식장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그런 인문학에 가까운 학문들은 기본적으로 ‘지역성 혹은 로칼리티’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것은 글로벌하지 않다. 오히려 이 경우엔, 지젝이라는 인문학자를 불러다 한국 상황에 훈수를 두게 만드는 이택광과 같은, 김경만의 틀 안에서는 ‘글로벌 지식장’ 워너비를 비판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택광은 글로벌 지식장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지식장에서 잘 나가는 학자의 권위에 기댄다는 방향의 비판이 옳을 듯 싶지만 말이다. 여하튼, 인문학의 글로벌화가 과연 옳은 것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따라서 인문학은 그 학문이 지닌 여러 맥락들과 어우러져 완벽하게 이해될 수 있는 공간에서 읽히고, 후에 글로벌 지식장으로 나가는게 맞다. 이 지점에서 김경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책을 다 읽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가 자신의 전공분야인 ‘이론사회학’ 즉, 자연과학처럼 보편적으로 글로벌 지식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분야의 특성을 모든 분야로 외삽한 것이라면 그건 큰 문제로 지적되어야 할 것 같다. 이건 마치 시인 윤동주에게 왜 시를 영어로 쓰지 않느냐고 질타하는 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과연 김경만의 주장처럼 모든 학자가 메이저리그로 나아가야 하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 K-리그나 국내프로야구리그에서 활동하다 은퇴한 선수들은 세계무대에 나가보지 못했으니 욕을 먹어야 하는가? 김경만은 이 문제에 대답해야 한다.

세번째 떠오르는 지적은, 과연 김경만은 한국의 자연과학자들이 태생부터 바로 그 글로벌 지식장이라는 씨름판에서 대결하며 성장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글로벌 지식장에서 경쟁해도, 한국의 자연과학은 여전히 추격형 연구들로 가즉할 뿐, 선도적인 그룹이 없다. 이건 한국 사회과학의 후진성 문제를 글로벌 지식장이라는 단 하나의 기준에서 찾으려는 김경만의 노력에 경종을 울릴 반례가 될 것이다. 학문의 성장을 가로 막는 구조적 원인들은 다양하다. 그걸 단지 학자들 개인의 윤리를 지적하는 것으로 무미하려는 김경만 식의 비판은 신나게 과학기술의 폐해를 지적하다가, 과학기술자윤리강령을 만들자고 주장하는 과학사회학자들, 즉 문제의 원인을 구조가 아니라 개인으로 환원하는, 김경만 본인이 속한 과학사회학이라는 학문에서 비롯된 습성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김경만의 아래와 같은 지적, 즉 실력도 없이 권력화된 썩은 학계의 원로교수들이 학문의 성장을 막고 있다는 지적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국의 과학도 ‘과총’이나 ‘한림원’처럼 이름만 있고 하는 일 없는 원로 과학자들의 사교단체들이 현장 과학자들의 목소리를 권력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것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미명하에 저자-출판사-미디어와의 관계를 공고히 해온 학자들은 자신이 대중적 지식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교묘히 감추고, 오히려 글로벌 지식장에서 상당한 상징자본을 획듯한 저명한 학자인 양 행세한다. 문제는 저자-출판사-미디어의 공모를 통해 탄생한 저명한 학자, 그 ‘스타 학자’가 종국에는 정부의 요직, 무슨 위원장, 무슨 연구기관의 우두머리로 둔갑해 승승장구한다는 데 있다. 이들은 각종 교육과 학술 정책을 좌지우지하면서 학문장에 난입해 장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부르디외가 주장한 바 있듯이 장 바깥의 정치와 행정이 결국 장 내부의 ‘물을 흐리고’ 학문 성장을 가로막는 것이다. *김경만의 책은 아직 읽지 않았다. 김경만이 이런 발언을 한건 역사가 꽤 오래되었는데, 그런 그의 글들이나 논문들은 많이 읽었다. 발췌는 페이스북에서 홍성욱 교수가 캡춰한 사진들에서 얻은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김종영은 한국사회과학의 미국종속성을 비판하며 재등장했다. 김종영의 논리는 오래된 것인데, 한국 대학을 지배하고 있는 미국유학파 엘리트들이 한국 학문은 물론 대학체계마저 완전히 망쳐놓았다는 것이다. 내가 처음 읽었던 김종영의 논문 “김종영. (2010). 미국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의 일상적 체화. 경제와사회, 237-264.”이 2010년에 나왔는데, 그는 여전히 그 틀에서 연구중인 듯 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김경만과 김종영 모두가 과학사회학이라는 학문적 장 속에서 성장한 이들이라는 것인데, 과연 그들이 연구하는 자연과학이 이런 비판적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반성적으로 사유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연구주제일 듯 싶다.

강정인은 이 문제를 ‘서구중심주의’로 파악하고 대안으로 ‘한국적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고 아주 오래전부터 주장해온 인물인데, 내가 몇년전 처음 읽었던 그의 논문은 “강정인. (2003). [특별기고] 서구중심주의의 폐해-학문적 폐해를 중심으로. 사상, 200-229.”이니, 그도 11년째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김경만과 강정인의 논쟁은 2007년의 재판이다. 김종영의 논의도 계속되는 재탕이다. 그 셋이 하는 이야기의 함의, 즉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전반과 학문 전반이 후졌는데, 그 후진성이 서구중심주의와, 한국적 이론의 부재, 미국유학엘리트들의 폐해, 글로벌 지식장으로 나가지 않는 비겁함 등에서 비롯었다는 것이다. 무려 10여년 동안 이런 이야기가 한국 학계에 떠돌고 있지만, 변한건 없다. 강정인은 어떤 한국적 이론을 만들어 종합했는지 알 수 없고, 김경만과 김종영은 ‘한국 사회과학 비판’이라는 메타학문의 창시자로 기려야 함은 분명하지만, 실천적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이끌어 냈는지 알 수 없다.

이젠 한국학문이 후졌다는 건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그 원인이야 다양하겠지만, 그 원인들 중 구조적인 것들의 대부분이 한국사회가 후진 이유와 비슷하리라는 예측에 누구도 섣불리 반대하긴 힘들 것이다. 한국 과학계가 놓여 있는 상황은 저들이 비판하는 바와는 또 다르다. 한국엔 아예 과학이라는 것이 제대로 정착된 적이 없다. 원인은 모두 다르지만, 해야 할 일은 같을 것이다. 이젠 움직일 때다. 문제를 분석하는 것은 움직이면서 해도 늦지 않다. 학문 식민지 혹은 학문종속성의 문제를 한국의 과학과 연계하여 다루었던 내 글을 인용하며 마친다. 2010년 계간 자음과 모음에 연재되었던 글이다. “김우재. (2010). 두 문화 따위: “과학의 과학화”를 위한 하나의 추측 3회. In 계간 자음과 모음 (2010 겨울호 10호). 자음과 모음.”


학문 식민지로서의 한국, 그리고 과학과 과학학

과학사가 박성래는 한국 과학기술자들의 뿌리 깊은 중인 의식을 지적한다.[1] 이러한 설명은 한국 사회에서 과학기술자들이 점유하고 있는 사회적 위치를 잘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박성래의 주장은 과학기술자들의 중인 의식을 국가나 사회에서의 단절에 대한 설명으로 제시함으로써, 암묵적으로 과학기술자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자들의 도덕적 우월감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특히 조선시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역사적 과정에 대한 상세한 분석도 없이, 조선시대의 중인 계급을 현재의 과학기술자 계급과 직접 연결하려는 시도는, 라투어가 과학과 사회의 유사성만을 근거로 적절한 논증 없이 비약하는 과학사회학을 비판한 데서도 자유롭지 않다.[2]

만약 박성래의 ‘중인 의식’과 같은 모호한 주장이 한국 과학자 사회에 대한 분석으로 정당하게 인정된다면,[3] 한국 인문사회과학자 사회에 대한 다음의 분석도 타당하게 인정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조선에서 물려받은 뿌리 깊은 인문주의가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자들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다는 주장이다. 편의상 이를 ‘인문학 우월주의’라고 부르도록 하자.[4] 만약 이러한 인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한국에 수입된 서구 학자들의 논의 속에서 일종의 편향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 문제는 ‘문화로서의 과학’의 전통이 부재한 한국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학문의 수입 과정에 보이는 인문학적 편향성을 다루기 전에 먼저 간단하게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종속성 문제를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이 문제는 바로 앞 절에서 다룬 과학사회학의 재귀성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필자가 아는 한 아주 오래전부터 한국의 학문 종속성 문제는 깊이 다루어졌지만, 이러한 분석을 과학과의 관련성 속에서 해석한 논의는 없었다.

한국사회의 인문사회과학이 지닌 종속성 문제는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 심각하게 숙고되고 논의되어왔다. 이러한 논의들은 한국 학문의 주체성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5] 특히 사회학은 가장 먼저 이러한 논의를 시작한 분야다. 선내규에 따르면,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대학에 정착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이미 한국 사회학의 자기성찰적 논의들이 존재해왔다.[6] 전문성과 자율성에 대한 논의가 주류를 이루던 1970년대를 거쳐, 연구자의 규모나 연구 성과의 양과 질에서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지는 1980년대에는 ‘민중사회학’, ‘분단사회학’, ‘민족/민중적 사회학’ 등의 독자적인 연구 주제가 성립되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 사회에서 1980년대는 사회과학의 전성기라고 불린다. 대학마다 사회과학 서점들이 봇물을 이루었고, 민주화 운동과 더불어 사회과학이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최적의 학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시기의 호황은 곧 꺼진다. 이러한 거품의 붕괴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지적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지식인들이 학문의 근본적 문제의식 설정에 실패했고, 한국 사회에서 절박했던 문제들은 이론화의 계기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한국 사회학의 분석 대상인 한국 사회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은 출현하지 않았다는 것이 잠정적인 결론이다.[7]

여전히 한국 사회학계의 논문들은 연구자 개개인이 연구해왔고 또 연구해온, 즉 수입된 서양 사상가들의 학문적 전통과 구도에 수직적으로 통합되어 있다. 강정인에 따르면 이런 방식으로 생산된 논문들은 ‘창백한 아류’에 불과하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서구 이론에 한국 현실을 통합시켜 해석해버리는 경향이다.[8] 뿐만 아니라, 주요 분석 대상이 되어야 마땅할 비서구 사회 또는 한국 사회의 ‘현실’과 ‘사실’은 주변화하고, 서구의 그것은 중심적 지위를 갖는다. 이러한 비참한 현실은 권력 이론을 이해하기 위한 푸코의 고전 연구를 통해 19세기 프랑스의 행형 제도에 대한 지식에 정통한 사회학 이론가가 정작 19세기 조선의 행형 제도에는 무지하다거나, 현대정치사 연구자가 광주민중항쟁이나 6월 항쟁에 대한 지식보다, 영국의 명예혁명이나 프랑스 대혁명에 더욱 해박한 지식을 갖는 식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현실은 사회과학 교과서가 외국 학자들의 이론을 소개하는 장으로 도배되고 심지어 사례들조차 우리의 현실과 괴리되는 사태로 드러난다. 특히 한국 사회과학의 미국 종속적 폐해는 심각하다. 미군정의 지원과 당시 사회 분위기가 맞물려 미국의 사회과학은 한국에서 교육되고 연구되는 사회과학의 ‘교과서’로 정착했다.[9]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수입한 미국의 사회과학이 유럽에 종속적이었던 미국 지식인들이 주체화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미국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현재의 치열한 사회과학 내부의 논의들이 결국 (시간은 걸리겠지만) 독자적인 학문 체계로 나타나리라는 기대를 가져봄 직하다. 특히 조희연 등에 의해 시도된 ’우리 안의 보편성’은 이러한 치열한 반성들이 이제 무르익었다는 반증으로 환영할 만한 일이다.[10]

한국 철학계의 학문 종속성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한국의 철학자들이 외국 철학자들을 수입하고 독점하고 이들의 논의를 주체성 없이 재생산해왔다는 비판은 오래되었고 여전히 진행 중인 문제다.[11] 심지어 한국 철학계 내부에는 학문의 건강한 발전을 위한 논쟁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김혜숙은 “우리는 서로 마주 보지만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우리의 논쟁에는 절대로 진짜 피가 흐르는 법이 없다”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철학의 공허한 헛바퀴 속에 서구 철학계는 우리를 보지 못하며 따라서 “우리는 마치 투명인간처럼 소리 없는 웃음, 반향 없는 주먹질을 하면서 헛되이 행복해하고 불행해한다”.[12] 이처럼 비참한 현실은 1980년대 후반부터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에서도 예외는 아니다.[13] “한국 문화 연구에 한국이 없다”라는 강명구의 외침에선 희망이 느껴진다기보다는 좌절이 느껴진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학문의 종속성에 관한 논의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넘쳐나고 있다. 인문사회과학이 다루는 대상들이 한 문화의 전통과 역사, 그리고 현실에 크게 영향받는다는 상식적인 관점을 견지할 때 이러한 논의는 크게 환영할 만한 것이다.[14]

[1] 박성래, 『한국사에도 과학이 있는가』, 교보문고, 1998, 300∼302쪽.
[2] 이에 대한 자세한 비판은 졸고, 「영원한 중인 계급」, 새사연 칼럼, 2010. 08. 13을 참고할 것.
[3] 실제로 송성수, 「한국 과학기술 활동의 성장과 과학기술자 사회의 특징: 시론적 고찰, 과학기술정책」 14, no. 1(2004): 77∼93쪽 등의 논문과 이를 참조한 여러 보고서에는 박성래의 중인 의식이 빈번하게 거론되고 있다.
[4] 사실 이런 분석은 박성래의 ‘중인 의식’보다 더욱 신빙성 있는 자료들로 뒷받침될 수 있다.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은 그 역사에서 과학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다. 두번째 이유는 인문사회과학은 과학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겪은 두 번의 단절, 즉 식민지 시대의 단절과 개발독재 시대의 단절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에서 과학자라는 계층의 성립에 빗대어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조선시대에서 식민지를 거쳐 개발독재 시대와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사회의 지식인 또는 사회지도층은 모두 인문 지식인으로 인식되었다. 세번째 이유는, 과학기술자들이 윤리적으로 인문사회과학자들보다 열등하다는 일종의 공감대가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교양 또는 교양인이라는 개념에서 가장 극대화되는데, 한국 사회에서 ‘공돌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와 한국 과학기술자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한국 사회의 과학기술자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서는 큰 권위를 갖지만, 사회 지도층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과학기술은 경제발전 또는 실용적 도구로 인식/정착했고, 과학기술자는 그러한 도구의 행위자로만 인식된다.
[5] 특히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이러한 논의가 활발하다. 김동춘, 『한국 사회과학의 새로운 모색』, 창비, 1997에서 시작된 논의는, 김정근, 『한국 사회과학의 탈식민성 담론 어디까지 와 있는가』, 지식산업사, 2000을 거쳐, 학술단체협의회, 『우리 학문 속의 미국 : 미국적 학문 패러다임 이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 한울, 2003 및 최근의 조희연, 『우리 안의 보편성: 학문 주체화의 새로운 모색』, 2006 등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6] 선내규, 「한국 사회학장의 낮은 자율성과 한국 사회학자들의 역할 정체성 혼란」, 『사회과학 연구』 18, no. 1(2010), 126∼177쪽.
[7] 가장 확실한 증거는 2006년에 이르기까지 사회학 내부에서 학문의 주체화에 대한 논의들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8]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학문의 식민지성을 다루는 논문들에서조차 외국 이론이 분석의 틀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 백창재, 「로스(Dorothy Ross)의 논의를 통해 본 한국 사회과학의 정체성 문제」, 『한국 정치 연구』 16, no. 2(June, 2007), 1∼25쪽; 선내규, 위의 글, 126∼177쪽.
[9] 강정인, 「서구 중심주의의 폐해: 학문적 폐해를 중심으로」, 계간 『사상』 2003년 겨울호.
[10] 조희연, 앞의 책.
[11] 백종현, “서양 철학 수용과 한국의 철학.” 철학사상, no. 5 (1995): 1-14.
[12] 김혜숙, “미국 철학의 지적 연원: 수입 철학에서 고유 브랜드 생산에 이르기까지.” 철학과 현실사 (1999): 345-368.
[13] 강명구, “한국문화연구에는 한국이 없다: 지식생산의 식민성을 넘어서.” 한국언론학회 (June 2002): 209-233.
[14] 또한 이를 통해 자연과학이 다루는 대상들의 보편성도 확인할 수 있다. 자연과학의 내용적 측면에 대해서, 학문의 종속성, 식민지성, 주체성을 비판하는 논의는 없거나 존재하기 어렵다. 과학사회학의 강한 주장처럼, 과학 지식의 내용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면, 이러한 현실은 이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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