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김우재 (2014-)

조성주, 알린스키와 과학기술

민주당의 일부 의원들을 제외한다면, 한국사회 정당에 소속되어 있는 이들 중 사회의 상식적 믿음에 부합하는 세력이라곤 정의당 정도일지 모른다. 왜 정의당이냐는 노동당원들의 불만이 여기까지 들리지만, 개인의 취향이라고 넘기자. 진보진영의 이념적 스펙트럼 모두를 만족시키는 발언이란 존재할 수 없다, 특히 한국에선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말은 행동을 이길 수 없다는 상식이다.

청와대와 여당의 절망스러운 국가운영에 진절머리가 났어도, 반대쪽의 세력에게서 대안을 희망할 수 없는 국민들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이라고 불러달라는 민주당 세력은 혁신위를 가동시켰지만, 기득권을 내려놓자는 이야기와, 민주당 내부의 개혁과 공천혁명에 관한 아이디어는 내부문건으로도 이미 차고 넘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첫째, 민주당은 혁신의 방향을 몰라서 혁신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당이 선거에서 진 게 한 두번이 아니고, 그럴때마다 별 도움도 안되는 민주당 싱크탱크에서는 혁신안을 내놓았었다. 문제는 그것이 실현된 적이 한번도 없다는 것 뿐이다. 둘째, 혁신의 내용에 과거로부터의 탈피 외의 미래로의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다. 기득권을 내려놓자, 공천과정을 투명하게 하자, 전국 정당이 되자. 이런 구호들은 모두 일견 옳은 듯 보이지만,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자는 소극적 개혁 이외의 움직임이 아니다. 이런 “~로부터”의 구호로는 이길 수 없다. 국민은 “~로”라는 적극적인 구호에 움직인다. 셋째, 그런 적극적 혁신을 위해 필요한 패러다임은 민주당 내부의 인적 구조나, 전통으로부터 등장할 수 없다. 반독재로 일관했던 민주당의 독재항거세력은 치열한 선배들일지 모르지만, 그들에겐 전세대를 아우를 참신함과 긍정적 프레임이 없다. 그 프레임은 다니엘 튜더의 말처럼 구체적이고 긍정적인 것어야 한다. 나는 한국 진보진영이 그 프레임을 얻을 수 있는 지적/인적 혹은 무형/유형의 자산이 모조리 한국과학기술계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에 대한 대강의 밑그림은 2012년 대선 패배 직후 ‘과학기술혁명지계: 한국진보진영의 재편을 위한 전략‘에 간략히 정리했었다.

내 입장을 위와 같이 간단히 정리하고, 이제 ‘2세대 진보정치’를 표방하고 정의당 대표후보로 출마한 조성주에 대해 정리해 두려고 한다. 노회찬, 심상정에게 과연 이길 수 있을런지 (아마 그것이 정의당의 갈림길이 될 것 같지만) 모르지만, 정의당 내부에 존재하는 젊은 목소리에 어떤 철학과 비전이 들어 있는지는 정리해 두어야겠기 때문이다. 조성주 스스로 밝힌 이력은 다음과 같다.

  • 전) 민주노동당 연세대학교 학생위원장
  • 전) 민주노동당 홍희덕 의원 보좌관
  • 전) 청년유니온 정책기획팀장
  • 전) 경제민주화운동본부 공동대표
  • 전) 서울특별시 노동전문관
  • 현) 정치발전소 공동대표

그는 37세다. 언론은 젋은 나이라고 하지만, 김영삼과 김대중, 그리고 386 정치인들이 국회의원이 된 생물학적 나이가 언제인지 생각해보면, 결코 젊은 나이라 할 수 없다. 어쩌면 한국정치가 지속적으로 후퇴해 가는 이유 중 하나에 생물학적 노화가 포함되어 있을지 모른다. 젊은 나이에 정치에 입문한 이들이 자신들과 같은 세대의 등장을 원하지 않을 것은 자명하고, 또한 그들로 포화상태에 이른 정치계에 젊은이들을 위한 니치(생태적소)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청년 유니온의 설립에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보좌관 출신인 점에서 알 수 있듯, 이미 어린 나이에 정치에 입문하기로 작정한 인물이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인지는 출마의 변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첫 저서 <대한민국 20대, 절망의 트라이앵글을 넘어>에 나와 있는 자기 소개에는 진보적 황색 저널리즘 스포츠 신문 기자가 장래 희망이라고 적어 두었다.

장래 희망은 진보적인 황색 저널리즘 스포츠 신문의 기자가 되는 것이다. 본인의 장래 희망만큼 모순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오늘도 내일도 그가 가장 관심 있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청년들의 진정 어린 삶의 모습들이다. 지금은 청년유니온의 정책기획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대한민국 20대, 절망의 트라이앵글을 넘어>가 있다. 소스: aladin

그는 이 출마의 변 <두려움 없이 ‘광장’ 밖으로 과감히 나아갑시다  미래를 준비하는 2세대 진보정치가 필요합니다, 소스: 당원게시판<정의당로 유명해졌는데, 강한 진보세력이 필요하고, 진보세력이라 할지라도 노회찬, 심상정 등의 스타 중심의 정당이 가진 한계를 적시했다는 점 등으로 국민의 상식에 한 걸음 다가섰다. 조성주가 출마의 변에서 한 말들중, 내게 와 닿은 말은 이것이다. 그는 중앙집권적인 정치의 구조와 권력의 집중화를 분산시키고 싶어하며, 정당정치에서 진짜 중요한 이들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고 있다. 아마도 지역에서 묵묵히 정의당의 존립을 위해 노력해온 젊은 정치신인들일 것이다.

우리 당에는 진보정치 1세대를 이끌어온 천호선, 노회찬, 심상정, 유시민 같은 걸출한 리더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당의 훌륭함은 단지 그분들 때문만은 아닙니다. 서울 마포에는 오진아가 있고, 관악에는 이동영이 있습니다. 인천 부평에는 이소헌이 있고, 강화에는 박종현이 있습니다. 경기 고양에는 김혜련이 있고 박시동이 있습니다. 대구 수성에는 김성년이 있고, 전남 영광에는 이보라미가 있으며, 광주에는 강은미가 있고 문정은이 있습니다. 모두를 일일이 열거하지는 못했지만 바로 이들이 우리 당 리더십의 미래입니다. 우리는 이미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스: 당원게시판<정의당

그 외의 나머지 발언들에서 나는 정의당 노회찬과 심상정의 발언과 다른 큰 패러다임의 변화를 느낄 수는 없었다. 다만, 이 구절,

정의당은 박근혜 대통령과 싸우는 정당이 아닙니다. 정의당은 새누리당이나 새정치민주연합과 싸우는 정당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우리 정당의 본질적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정의당은 미래와 싸워야 합니다. 오늘의 이 폭력적이고 불평등한 체제가 강요하는 미래를 바꾸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목표입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다른 미래를 개척합시다. 소스: 당원게시판<정의당

정의당 젊은 정치인의 입에서 바로 이 긍정의 구절을 읽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정의당이 강한 진보정당이 되기 위해서는 노회찬, 심상정이 대변하는 구시대 반독재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조성주는 알고 있다. 자 그럼, 긍정적인 프레임 외에, 구체성에서 조성주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는 알린스키의 <급진주의자를 위함 규칙>을 교본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설립한 정치발전소의 강의 목록에 조성주의 <변화의 정치학>이라는 코너가 있는데, 여기서 조성주는 알린스키의 정치를 공부하고 있다. 알린스키는 누구인가? “안재웅. (1973). 조직의 사도 알린스키-그의 생애를 중심으로. 기독교사상, 17(6), 70–78.”에 알린스키의 생애가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알린스키는 미국대통령 오바마와 현재 민주당의 대선후보인 힐러리 모두에게 영향을 준 미국 시카고에서 활동했던 급진좌파 활동가였다고 한다. 강준만에 따르면 힐러리는 알린스키에게 이론적 사사를, 오바마는 실천적 사사를 받았다고 한다. 미국 민주당의 두 거인에게 끼친 알린스키의 영향력은 ‘이상적 현실주의자’로 살았던 그의 삶을 그대로 대변한다. 아래는 “강준만. (2012).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인물과사상, 40–65.”을 읽고 발췌 및 요약한 내용이다.

두 사람의 대선 전략에서도 알린스키의 유산이 드러났다. 둘 다 공허한 이상에 기울기보다 대중 개개인에 접근하려는 알린스키의 조직 전략을 사용한 것이다. 이합집산과 타협을 통해 정치적으로 가능한 방안을 찾으려는 ‘이상적 현실주의자’의 면모 역시 ‘알린스키적’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오바마는 ‘행동’을, 힐러리는 ‘이론’을 알린스키로부터 배웎다는 점이었다. “강준만. (2012).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인물과사상, 42.”

조성주는 알린스키를 어떻게 읽어내려 하는가. 그의 지상강의 프롤로그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실 알린스키를 강독하고 토론하는 이 과정은 조금 불편한 과정이 될 지도 모른다. 특히 사회운동이나 어떤 단체들에서 과거에 빛나는 성과와 주목을 받았던 집단이나 사람들일수록 그럴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더 평등하고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굳건하게 믿고 그렇지 못한 현실에 더 많이 분노하는 사람일수록 더욱더 불편하고 반박할 것이 많을 것이다. 왜냐면 알린스키도 그리고 필자도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고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우리는 열정보다 냉정을 장렬한 투쟁보다 타협을 고뇌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소스: [지상강의 변화의 정치학] 1강. 시작

이 구절이 왜 중요한지는 뒤에 말하기로 하고, 알린스키와 그의 책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알린스키는 1909년 일리노이 주 시카고의 러시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시카고 대학 고고학과를 졸업하고, 범죄학으로 대학원 공부를 했다. 이후 알 카포네 폭력단에서 체험연구를 하는 등 현장을 중시한 활동을 계속하다가, 노동운동에서 빈민운동으로 거리의 정치학자로 거듭나는 과정을 겪는다. 그는 사회사업가나 지식인과 같은 공상적 사회개량주의자들에게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빈민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경험하지 못한 그들이 자기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자기들의 아젠다를 아래로 부과”하기 때문이었다. 그 대안으로 그는 빈민의 관심과 필요를 스스로 찾게 해 해결하게 하는 것을 중요시했고, 그 방법론을 개발해 ‘지역사회 조직화 방식’을 개발했다고 한다.

그렇게 시카고 뒷골목의 빈민가에서 빈민 스스로 지역사회를 조직할 수 있도록 돕는 알린스키에게 감동한 마셜 필드 3세가 기금을 만들었고, 알린스키는 그 돈으로 ‘산업사회재단 IAF’를 설립했다고 한다. 1946년에는 자신의 지역사회 조직화 경험을 <금진주의자를 위한 기상나팔>이라는 책으로 출판했는데, 이 책에서 급진주의자는 자유주의자와 대비된다.

“자유주의자와 급진주의자의 근본적 차이는 권력을 보는 시각에 있다. 자유주의자는 권력이나 권력의 행사를 두려워한다. 권력의 대중적 사용에 대한 두려움은 ‘목표에는 동의하지만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자유주의자들의 모토에 잘 나타나 있다. 자유주의자는 항의하는 반면, 급진주의자는 항쟁한다. 자유주의자는 분노하는 반면, 급진주의자는 전의에 불타 행동으로 돌입한다. 자유주의자는 개인적 삶을 포기하지 않으며 대의는 삶의 작은 일부인 반면, 급진주의자는 대의에 모든 걸 바친다. 자유주의자는 꿈을 꾸는 반면, 급진주의자는 꿈의 세계를 건설한다.”

그렇다고 알린스키의 급진주의를 급진적이라는 단어에 녹아 있는 선입견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알린스키의 사회운동은 매우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실주의적 철저함을 선호했고, 1960년대 미국 민권운동 지도자들, 예를 들어 마틴 루터 킹의 이상주의를 싫어했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의 민권온둥의 “치명적인 약점은 그것이 안정적이고 규율이 잡힌 대중 기반 권력 조직으로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린스키의 법칙이라고도 불릴 그의 현실주의적 철저함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우리가 원하는 세상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는 말에서 정점을 이룬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사람은 주로 이기심 때문에 행동한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옳은 일은 나쁜 이유 때문에 행해지며, 나쁜 일은 좋은 이유 때문에 행해진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타협’은 추한 단어가 아니라 고상한 단어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이른바 도덕성은 대부분 특정 시점의 권력관계에서 자신이 점하고 있는 위치의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다음 책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은 중산층의 재발견을 새로운 전략으로 내세운다. 그는 이 책에서 중산층의 문화적 경험을 소중히 해 그걸 운동의 자산으로 삼으라고 조언한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시작한다.

“이 책은 세상을 지금의 모습에서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자신들이 믿는 모습으로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군주론>은 마키아밸리가 가진 자들을 위해 권력을 유지하는 법에 대하여 쓴 책이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은 가진 것 없는 자들을 위해 권력을 빼앗는 방법에 대하여 쓴 책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중조직을 만들어서 권력을 빼앗아 민중에게 돌려줄 것인지를 다룬다.”

내가 이해하는 알린스키의 이상적 현실주의는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을 닮았다. 특히 그가 과학자 닐스 보어의 말 “내가 말하는 모든 문장은 확언이 아니라 질문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를 인용하면서, 운동가들이 독단적 교리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과학적 아나키즘을 주창했던 크로포트킨을 닮았다. 알린스키는 독단적 교리를 막는 것은 ‘호기심’이라고 말했다. 호기심은 질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바라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독단의 교리를 경계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타협을 진보의 구태로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타협은 존재하는 방식이며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박상훈의 입을 빌려, 진보의 언어폭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미국 진보파들 사이에서 정신적 지주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사울 알린스키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1930년대 시카고에서 빈민운동을 주도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진보적 활동가들을 교육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가 교육했던 주제 가운데 하나는, 말의 공격성 혹은 상대에게 모욕을 주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누군가를 향해 ‘돼지’나 ‘파시스트’라고 인격적으로 비난하는 활동 방식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운동권이 원래 그렇지”라는 식으로 정형화된 이미지를 갖게 해 사회운동의 고립을 초해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려면 일반 대중의 경험 세계 속에서 자신의 말이 어떻게 공명될 것인지를 중시해야 하고, 또 “상대의 가치관을 온전히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진보의 언어적 실천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알린스키가 죽고나서 그와 교분을 가졌던 이들이 그의 사상과 강연, 운동을 평가한 것이 논문으로 정리되어 있다. “스텐리도날드 R. (1973). 알린스키와 사회개혁원리. 기독교사상, 17(6), 79–85.” 이 글에서 도날드 스텐리는 알린스키의 사상을 이렇게 대변한다.

“사울 알린스키와 대면한다는 것은 문제거리다. 그의 앞에서는 낡은 관념, 가치, 프로그램들이 먹혀들지를 않는다. 흔해 빠진 논쟁이나 술술 나오는 대답은 그의 도전 앞에서는 묘하게 텅 빈 듯이 느껴진다. 뿐만 아미라, 그의 스타일 자체가 특히 이론가에 있어선 모욕적이 된다. 지성 사호에서 어마 어마한 탑을 세운 바 있는 객관적이며 냉정한 질문과 비평적 분석도 그의 출현에 의해 멸망까지는 안되었더라도 흔들리고 있다.” 스텐리도날드 R. (1973). 알린스키와 사회개혁원리. 기독교사상, 17(6), 79–85.

조성주는 후마니타스 박상훈 대표의 <정치의 발견>에서 알린스키를 만났다고 한다. 그의 지상강의에 알린스키를 이해한 조성주의 방식이 정리되어 있으니 조성주가 펼칠 정치의 청사진은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제 위에서 잠시 언급한 조성주의 ‘구체성’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는 자신이 펼칠 정치의 구체성의 청사진을 알린스키의 조직화원리에서 얻고 싶어하는 것 같다. 문제는 그것이 구체적이냐는 것이다. 그가 설립한 정치발전소의 활동이 알린스키의 조직화원리에 부합하는가 반추해봐야 한다. 그것은 흔한 연구소 타이틀이나 운동권의 독서모임과 다른가? 알린스키의 조직화 원리가 이런 식의 연구소와 일치하는가. 정의당이 새로 태어나야 한다면, 조성주라는 정의당의 젊은 세대 정치 지도자의 ‘행위’도 새로워야 한다. 조성주의 정치행보는 이제 시작이지만, 청년유니온을 비롯한 그의 운동들이 과연 2세대 진보정치로 불릴만큼 새로운가에 대해서는 고민해봐야 한다. 내 생각엔 아직 그렇게 불릴 수 없다. 그저 80년대 노동운동이 세대의 이름으로 간판을 바꾼 것 뿐이다. 여기에 중산층 조직화 운동을 통한 강한 진보정당의 꿈은 없다. (정말이지, 혁신파크에 청소년 정치책 읽기 카페 같은걸 만드는 사업이 상상력의 전부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조성주에겐 기존의 진보정치인들에게 없는 긍정의 통찰이 있다. 문제는 그것을 이룰 구체성의 결여다. 그는 타협을 모르는 진보의 기득권들에게 현실주의자가 되자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야 강한 진보정당으로 국민의 표를 얻어 한국을 변화시킬 수 있는 권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현실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패러다임으로만은 안된다. 구체성이란 정책과 그 정책이 민심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힘이다. 알린스키에게 배운 오바마와 힐러리는 대선과정에서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들과 다양한 과학기술계의 젊은 인재들을 영입하며 그 구체성을 실체화했다. 실리콘밸리는 미국을 먹여살리는 힘이고, 민주당은 바로 그 실리콘밸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그 지지는 정치에 무관심했던 과학기술계 인재들의 관심을 실제 정치로 돌려낼 줄 알았던 오바마의 전략/전술로 인해 가능했다. 오바마는 실제로 과학기술계 인재들에게 전권을 주었고, 그들과 대화했으며, 그렇게 젊은 이미지로 미국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현대사회에서 정치적 구체성은 과학기술로부터’만’ 온다. 정책 이슈도 근거에 기반해야 하는 ‘근거기반 정책’으로 가야 하며, 그 기저에는 정치적 실천에 있어서도 과학적 삶의 양식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이런 정치의 변화에서 한국 진보진영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한 축에는 문성근 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네트워크정당 운동이 있지만, 민주당 내부의 혁신위가 어떤 식으로 그 운동을 포용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의당의 변화를 지켜볼 일이다. 조성주의 이상적 현실주의에 민주당 내부의 혁신세력과의 연대까지도 포함되어 있을지 지켜보겠다.

거리의 정치학자, 사회운동가 대부분이 책상발림인 한국에서 알린스키가 주는 울림은 크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오바마와 힐러리 모두 알린스키에 대한 인터뷰를 자제했다. 급진좌파로 몰리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힐러리는 훗날 알린스키가 맞았다고 회고한다. 한국에 지금, 알린스키가 어떤 대안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 한다. 강준만은 그걸 안철수 현상으로 연결시키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알린스키의 글 <수단과 목적>도 번역되어 있다. “알린스키 S. D. (1968). 수단과 목적. 기독교사상, 12(11), 73–82.” 진보진영에서 항상 논쟁에 오르내리는 주제이니 알린스키의 입장도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알린스키를 국내에 처음 도입했고, 그의 사상을 풀뿌리 민주주의를 위한 조직화 규칙으로 소개한 오재식의 육성 강의가 남아 있다.

[widgets_on_pages id=”PayPal Don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