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아카이브 (2002-2013), 취어생 (2002-2008)

전령 RNA의 발견, 프랑스 생물학의 부흥, 그리고 우리

http://heterosis.egloos.com/773059 원문

2005년 2월 23일, 미셀 모랑쥬의 <분자생물학, 실험과 사유의 역사>를 읽으며

유전물질인 DNA의 발견과 그 유전물질이 세포를 조절하는 방식에 대한 발견은 우리가 교과서나 언론으로부터 주워들은것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 2004년은 DNA doble helix 발견 50주년이 대서특필되고 여기저기서 파티가 열리면서 이미 왓슨과 크릭에게 집중된 관심에 다시 쐐기를 박는 한해가 된 것 같다. 하지만 유전물질의 발견과 그로부터 파생된 유전자 조절 (Gene Regulation)기작의 공이 모두 단 두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랑쥬의 책을 공부하면서 실험실의 동료들에게 누가 mRNA를 발견했는지를 물었다. 현장의 과학자들에게 이 사실이 잘못 알려져 있다면 일반인들에게 어찌 알려져 있는지는 자명해진다. 대부분의 동료들이 크릭이 아닐까라는 답을 했고 이중 제이콥과 모노의 이름을 거명하는 이는 한사람도 없었다. 크릭이 1960년 브레너와 함께 제이콥/모나드와 토론을 하며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크릭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조금 길지만 읽어볼 가치가 있다. 

“그때 나는 PaJaMo 실험(파디와 자코브, 모노의 실험)의 원논문에 혹시 어떤 실수가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이 점에 대하여 자코브(Jacob)와 여러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는 이 연구가 어떤 과정으로 발전되어 왔는지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는 버클리의 파디(Pardee)와 모니커 라일리(Monica Riley)의 최근 실험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서서히 우리는 그들의 실험 결과가 옳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실험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가 불분명했는데, 이는 그 다음 단계의 설명을 이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련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쉽게 재구성할 수 있었다. PaJaMo 실험에서 밝혀진 사실은 리보솜의 RNA는 전달 정보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전에 우리가 가졌던 모든 문제는 이 새로운 사실을 설명할 수 있도록 재조정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전달 정보는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점에 봉착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때 시드니는 이에 대한 해답을 발견했다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 당시 어느 누구도 이 해답을 찾지 못한 듯 하였는데 나도 해답을 발견했다.) 이 혼미에 빠진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하나의 부수적 의문은 대장균이 T4 박테리오파지에 의해 감염된 직후 나타나는 소량의 RNA의 정체가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 (대장균은 우리의 대장내에서 사는데, 실험실에서 흔히 사용된다.) 수년 전 1956년에 두 연구자 엘리엇 볼킨(Elliot Volkin)과 라자루스 아스트라찬(Lazarus Astrachan)은 파지에 감염된 대장균이 희귀 염기를 포함하는 새로운 종류의 RNA를 합성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RNA는 숙주 대장균의 염기 조성을 반영하지 않고 오히려 감염 파지의 염기 조성을 반영하였다. 처음에 그들은 이 RNA가 감염된 대장균이 대량으로 합성해야 할파지 DNA의 전구체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된 연구 결과 이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그들의 실험은 놀랄만한 내용이었으나 실험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시점에서 문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었다; 전령 RNA가 리보솜에 들어 있는 RNA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라면 왜 이것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시드니가 발견했던 해답은 볼킨과 아스트라찬이 발견한 RNA가 파지에 감염된 세균내에서의 전령 RNA라는 것이었다. 일단 이와 같은 통찰력이 생긴 이후, 다음 단계는 거의 자동적으로 진행되었다. 만일 개별적 전령 RNA가 따로 존재한다면 리보솜의 RNA는 서열 정보를 가질 필요가 없었다. 이것은 단지 판독기 역할을 할 뿐이다. 리보솜 한 개가 단 한 개의 단백질 합성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리보솜은 전령 RNA를 따라 이동하면서 단백질을 만들고 다시 다른 전령 RNA에 결합하여 다른 단백질 합성을 반복할 수 있다고 설명할 수 있었다. 전령 RNA가 분해되기 전에 단지 2-3회 사용된다고 가정하면 PaJaMo 실험 결과는 쉽게 설명될 수 있었다. (처음에 우리는 전령 RNA가 단 1회 사용되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곧 이와 같은 제한은 꼭 필요하지 않음을 알았다.) 이 점으로부터 시간에 따라 단백질이 직선 비례적으로 증가되는 실험 결과를 설명할 수 있었다.

즉 β-갈락토시다아제의 전령 RNA는 생성 속도와 소멸 속도가 같게 유지됨으로써 평형 농도에 도달한 후 이 농도로 유지된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낭비적 과정처럼 여겨질지 모르나 이렇게 함으로써 세포는 주변 환경 변화에 신속히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날 저녁 나는 골든 헬릭스에서 모임을 주최하였다. 우리는 가끔 모임을 가졌으나 이번 경우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분자 생물학자들의 모임은 케임브리지에서 가장 활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바이러스 학자 로이 마컴(Roy Markham) 등을 포함한 약 반수의 외부 인사들은 오전에는 참석하지 않았으나 저녁에는 모임에 와서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나머지 반수의 참석자들은 몇몇 그룹으로 나뉘어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실험 자료를 아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점과 이 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 새로운 결정적인 실험 계획을 세우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실험 중의 일부가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시드니, 자코브, 그리고 매트 메설슨(Matt Meselson)에 의해서 그 이후 수행되었다.

두 가지 내용이 내포되어 있는 생각을 한번에 나타내기는 어렵다. 그 하나는 새 아이디어를 처음 포착했을 때 느꼈던 섬광과 같은 감격이었다. 이것은 너무도 기억에 생생하여 그 당시에 시드니, 자코브, 그리고 내가 방 안에서 어느 위치에 앉아 있었는지도 기억을 한다. 다른 한 가지는 이러한 새 아이디어가 그렇게 많았던 우리의 난제들을 해결했다는 점이다. 단 하나의 잘못된 가설(즉 리보솜 RNA가 전령 RNA 역할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사고를 완전히 혼동되게 만들었으며 마치 우리는 짙은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그날 아침 일어날 때 나는 단백질 합성의 전반적 조절 기작에 대해서 혼동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날 밤 잠자리에 들 때 모든 문제는 해결되어 있었으며 우리 앞에는 밝게 빛나는 해답이 비쳤다. 물론 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정립하려면 수개월 혹은 수년이 걸릴 수도 있었으나 우리는 더 이상 정글 속에서 길을 잃은 상태에 있지 않았다. 우리는 앞에 펼쳐진 평원을 답사할 수 있었으며 먼곳에 보이는 목표의 산을 볼 수 있었다.

새 아이디어는 유전 암호를 풀 수 있는 결정적 실험에로의 길을 열었다. 즉 리보솜에 특정 전령 RNA(자연적인 것 혹은 합성된 것)를 가해 주는 실험을 계획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 그 전까지는 이 아이디어가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 –열광의 탐구(What Mad Pursuit?) 프란시스 크릭 범양사 출판부 P152-153 ” 

분명 크릭은 제이콥/모노와의 토론과정중에 해결된 미스테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분자생물학자들과 학생들, 그리고 일반인들은 1958년 크릭이 “On Protein Synthesis” 라는 제목으로 쓴 논문과 1957년 행한 대중강연에서 “DNA-RNA-Protein”으로의 도식이 해결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RNA-Protein의 관계와 DNA-RNA의 관계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부분적으로는 연결되어 있었지만) 발견되었다. 

RNA-Protein사이의 관계는 생화학적 전통속에서 해결되었다. 세포내 커다란 구조인 마이크로솜의 발견과 니런버그와 마테이라는 무명의 생화학자들에 의해 유전암호가 해독된다. 그러나 니런버그와 마테이의 실험도 1961년에 행해졌다. 

DNA-RNA사이의 관계는 더욱 모호하다. 1958년 크릭의 논문 속에는 유전물질은 DNA의 중요성과 세포내에서 RNA가 가장 풍부한 마이크로솜이 단백질 합성에 중요하다는 언급이 대부분이고 DNA에서 RNA 로 이어지는 정보의 이동은 단 한줄, 그것도 “DNA가 RNA의 조절에 중요할 것이다”라는 한줄만이 기록되어 있다. 크릭의 이말이 당시 연구자들의 사유방식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모량쥬의 말처럼 전령 RNA가 발견되기까지의 장애는 유전자에 부과된 과도한 위치 외에도 많은 연구자들이 단순히 DNA가 RNA를 조절한다는 것에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세포질 유전과 원형질 유전이론을 믿고 있던 생기론자들 (발생학의 학문전통속에 있던)에 의한 편견도 작용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의 편견은 후에 미토콘드리아의 발견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그러나 증거는 충분했다. 유전물질은 DNA가 핵내에 존재하고 단백질은 세포질에서 합성된다는 자명한 사실이 정설로 굳어 있었고, 무핵세포시스템을 이용해서 DNA없이도 단백질이 형성된다는 것이 증명되어 있었다. 1956년 볼킨과 아스트라챤이 T2 박테리오파지로 행했던 실험의 결과가 있었다. 전령 RNA는 유전자의 구조라는 압도적인 권위에 의해 가려진 연구자들의 발견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크릭이 회상하고 있듯이 볼킨과 아스트라챤의 실험은 받아들여지고 있었으나 해석이 불가능했다. 이 점이 바로 크릭의 Central Dogma가 당시로서는 완벽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크릭은 파자모 실험의 결과를 듣고서야 비로서 전령 RNA의 존재를 상정하게 되는 것이다. 생물학의 역사에서 과학자사회에 널리 받아들여지고도 해석되지 못했던 실험들이 많이 등장한다. 멘델이 그랬고, 에이버리의 DNA가 유전물질임을 밝힌 실험도 그랬고 볼킨과 아스트라챤의 실험도 그랬다. 이론은 연구자들에게 실험의 결과를 해석하기 위한 분석적 도구로 기능한다. )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전령 RNA는 아직 “발견”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분석적 도구로 상정된 것 뿐이었다. 제이콥과 모노는 사실 전령 RNA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가정한 것 뿐이었다. (그들의 1961년 논문 “Genetic Regulatory Mechanisms in the Synthesis of Proteins”에서 그들은 messenger의 필요충분조건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 mRNA는 폴리뉴클에오티드이어야 한다. 
2. mRNA의 염기조성은 그것이 규정하는 DNA의 염기 조성을 반응하는 것이어야 한다. 
3. mRNA는 크기가 다양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이유는 유전자, 즉 DNA의 길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4. mRNA는 단백질 합성 장소인 리보솜과 잠정적으로 결부되지 않으면 안 된다. 
5. mRNA는 대단히 신속하게 합성되고 분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후 이들의 가정은 (Trancription Hypothesis)는 DNA/RNA hybridyzation 실험으로 증명되고 mRNA의 존재가 과학자 사회에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제 우리는 유전자조절, 즉 크릭에게 모든 관심과 조명이 집중되어 있던 분자생물학의 핵심명제가 실은 매우 복잡한 발견들의 조합속에서, 그리고 때늦은 재발견과 해석되지 않는 데이터들 속에서 이루어진 과정임을 본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프랑스분자생물학파들의 역할이 매우 지대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사실 현대 분자생물학의 기둥을 만든 것은 제이콥과 모노로부터 비롯된 유전자조절 연구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암과 종양에 대한 연구, 바이러스를 이용한 유전자조절 연구등이 촉발되었다. 

앵글로 색슨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던 분자생물학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던 프랑스에서 제이콥과 모노가 이러한 발견을 주도한다. 왜 프랑스인가? 프랑스가 잘나서이기 때문은 당연히 아니다. 이들은 주류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류에서 벗어난 그룹은 항상 존재한다. 이들이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되는 데에는 반드시 재정적 지원과 더불어 연구분위기가 필요하다. 이부분에서 파스퇴르 연구소가 등장한다. 프랑스는 라마르크의 나라이기 때문에 유전학의 출발이 늦어지기도 했다는 단점이 있었디만 또한 파스퇴르의 나라이기도 했다. 프랑스는 생리학을 강조하던 베르나드의 학풍에 힘입어 매우 새로운 유전학을 만들 수 있었다. 파스퇴르 연구소는 연구자들에게 매우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안정된 환경을 제공했다. 획기적인 과학의 발견은 헝그리 정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록펠러 재단이 분자생물학의 초창기에 큰 역할을 했던 것처럼 과학자들에게 자유롭고 안정된 연구기반을 마련해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분자생물학 초창기의 획기적인 도약은 우리의 상황을 돌아보게 만든다. 크릭과 왓슨이, 제이콥과 모노가 맹렬히 활동하던 시절 우리는 전쟁의 포화속에 있었고 나라를 재건하는 데 한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빠른 시간에 이들을 따라잡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전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된 시스템으로 과학의 한 분야를 선점함 프랑스의 과학사를 우리는 반드시 보고 배워야 한다. 돈을 쓸곳과 돈을 어떻게 모아야 하는지와, 과학이 과학이 되도록 만드는 그 학문풍토가 무엇인지를 보고 배워야 한다. 황우석 교수의 (과학이 아닌 기술에 불과한) 연구에 열광하면 우리는 영원히 이중나선구조의 발견이라는, 상대성 이론이라는 과학사의 주요한 발견들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다. 과학은 플라스크가 신앙인 이들이 많을 수록 발전한다. 그런 이들이 많아지면 신약도, 암치료도, 백신도 함께 발전되어 나갈 수 있다. 주춧돌이 없는 이런 상태로 계속 나아간다면 우리는 영원히 인류발견사에서 잊혀질 것이다. 우리는 기형적인 구조속에서 매우 잘 버텨왔다. 이제 무엇인가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올리는 파일은 모노의 노벨 렉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