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촛불의 동역학

생명이 어떻게 가능한가. 생명은 어떻게 살아
있는가. 자잘히 주워들은 지식을 종합해 보면 생명은 먹고 싸는 행위에서 시작된다. 먹고 싸는 행위만으로는 자손을 낳을 수 없는
생명은 복제라는 행위로 스스로를 유지한다. 복제란 기억의 전달이다. 나의 기억을 너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생명체의
내부에는 경험한 환경을 기억하는 메커니즘이 숨어 있다. 그래야 그것이 생명이다. 그래서 유식한 말로 생명은
로부스트(robust)하다고 한다.

분자수준에서 뭔가를 기억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면역계는 아예 기억을
전담하는 세포를 지정한다. 적응면역이라 불리는 우리 몸의 2차 면역계는 한 번 나를 침범했던 놈들을 기억하는 세포들을 만들어
둔다. 그렇게 승리한 면역계는 다시 또 쳐들어 온 이물질을 잡기 위해 들일 시간과 노력을 아낀다. 이물질을 인식하는 백혈구들을
선별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면역세포들처럼 물질 속에 기억을 심어두는 경우와는 다르게,
분자들의 관계 속에 기억을 숨겨 두는 경우가 있다. 유전자 발현 네트워크가 그렇다. 환경으로부터 주어진 자극은 피드포워드
루프(feed-forward loop)와 같은 회로를 통해 정보로 저장될 수 있다. 이처럼 관계 속에 저장된 정보의 수명은 길지
않다. 주기적으로 자극이 주어지지 않는 한 이처럼 저장된 정보는 소실된다. 만들어진 단백질이 언젠가는 사라지며 항상성의 유지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으로 희석되기 때문이다.

신경계는 이러한 두 가지 기억의 장점을 모두 활용한다. 뉴런은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다른 세포들과는 기능과 구조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세포군이다. 피부와 내장 및 혈액과 같은 세포들은 몇 년이면
모두 바꿔치기 되지만 뉴런은 아니다. 뉴런은 고상한 귀족세포집단이다. 혈관과 내장기관에서 고군분투하며 하루에도 수없이 죽어나가는
세포들과는 다르게 뉴런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하나의 세포로서의 품위를 오래도록 지켜나간다. 어떤 놈은 그러더라. 뉴런
외의 다른 세포들은 잡세포라고. 미친넘. 여하튼 핵심은 그게 아니다. 유전자 발현 네트워크와는 다르게 뉴런은 물질적 관계망을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다는 특징 때문에 오래도록 무엇인가를 기억할 수 있다. 뉴런의 관계망을 구성하는 부분을 시냅스라 한다.
단기기억이건 장기기억이건 무슨 기억이건 두뇌가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건 시냅스라는 물질적 기억과 관계적 기억의 특징을 모두
가진 뉴런 덕이다.

생명이란 거대한 수의 개별 입자들이 조직화된 질서 속에 혼재하며창발된 현상이다. 따라서 거대한
집단도 하나의 생명이다. 군중을 보라. 거대하게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이 안 느껴지는가? 일단 군중이 결집하면 어디로 갈 지 알기
힘들다. 그들을 통제하는 것은 쥐박이가 얘기하는 배후세력일까? 아니다. 분명 오래전엔 그랬을지 모른다. 민중이 결집하는 법을
모르던 시절엔 누군가 분명 모이는 법을 가르쳐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항상 지도부가 존재했고 그들이 휘두르는 장단에 따라
움직이는 군중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은 민중 속에도 존재한다. 민중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배웠고
기억했으며 진화했다. 물질적 기억은 민초들의 머리와 그들이 보고 배운 텍스트 속에서 함께 흘렀고, 관계적 기억은 통신수단의
발전과 인터넷이라는 연결망으로 인해 향상됐다.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 민중은 이제 기억을 가진 생명체가 되었다. 꿀리지 않는다.
모이고 싶으면 모이고 흩어지고 싶으면 흩어진다. 예전에 한번 당한 이물질에 다시는 당하지 않는 면역계처럼 민중은 한번 당한 일을
다시 당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젠 지도부도 필요 없다. 향상된 연결망이 그들의 두뇌다. 그들은 스스로 결정하고 흘러간다.
누구도 그들을 조종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들은 하나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기억은 무섭다. 역사를
흐르며 민중이라는 집단 속에 각인된 기억은 더욱 무섭다. 오늘 우리는 또 한번 기억해야 한다. 이땅의 민초들은 너무나 착했다.
그래서 한번도 아래에서 위로의 개혁을 이루어낼 수 없었다. 무엇인가 뒤집기에는 이 땅의 민초들이 가진 역동성의 주기가
지나치리만큼이나 짧았다. 하지만 50일이다. 전국민적이고 자발적인 함성이 이토록 오랫동안 지속된 일은 없다. 이제야 민중은
준비된 것이다. 그들은 모이는 법을 알았고 기억하는 법을 습득한 거대생명체가 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한다. 문제는 당장이 아니다. 장관 고시를 감행한 지금 이 땅의 착한 민초들은 또 다시 각자의 일터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조선 이래 단 한번도 진행되지 못했던 그래서 불행했던 혁명의 준비는 끝났다. 태풍엔
전야가 있다. 지금 촛불이 꺼진다 해도 그것이 다시 타오를 땐 더욱 무서워진 기세로 당신들을 덥칠 것이다. 그것이 기억의
기능이며 기억하는 자의 무서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