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아고라는 욕하면 안돼?

아고라(agora)는 도시국가 그리스의 광장이었다. 어원은 “모이다”라는 뜻의 “아고라조”요, 도시국가 폴리스에서 정치와 사상을 토론하던 장소였다.

원래 내가 자주 다니던 아고라는 서강포럼(http://www.agora.co.kr/)이다. 이곳이 조용해진 것은 너무나 오래 되어서 발길을 멈추었지만 말이다. 아고라는 광장이고 모이는 장소이므로 사람이 모이지 않는 곳은 아고라가 아니니까. 요즘의 아고라라 하면 미디어다음이 운영하는 아고라를 의미한다. 무려 구글에서 “agora”를 검색하면 미디어다음의 아고라가 제일 먼저 뜨니까.


가 아고라에 가서 제일 먼저 경험하는 현상은 어지럼증이다. 조회수가 수십만에 이르는 글들이 즐비하고 댓글은 보통 수천개가 따라
다닌다. 댓글은 읽을 엄두도 못내겠고 그냥 헤드라인에 뜬 기사들을 본다. 어제 백분토론을 보니 메인화면은 미디어다음의 운영진이
결정하고 나머지는 조회수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더라. 그러니 대충 믿을만 한 여론이 형성되려니 싶다.

그래
다음아고라는 아고라가 맞다. 우선 그곳엔 분명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그리고 정치적 사안에 대한 토론이 오고 간다. 그러니 대충
아고라인거다. 뭐 원래 아고라는 정치뿐 아니라 철학이나 사상과 같은 고품격 토론도 오가던 장소였지만, 정치만큼 토론하기 쉬운
주제는 없으니 대충 양보해서 다음아고라는 반쯤아고라라 하자. 정치를 주로 다룬다 해서 저품격인 것은 아니다. 정치가들이 나라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어찌 그리 쉽게 정치를 저품격이라 이야기하겠는가. 정치가 저품격이라면 정치가도 저품격이겠지. 사실 고품격이라는
말을 써놓고 보니 왠지 철학과 사상만이 고품격 토론 주제라는 인상을 줄 듯 싶다. 사실 그걸 의미한 건 아니다. 사실 과학이
토론의 주제로도 인식되지 못하는 이 땅의 현실이 난 슬픈거다. 이건 내가 두고두고 이야기해 줄테니 오늘은 관두자.


치가 논하기 쉬운 이유는 별다른 근거 없이 호불호로 귀결되는 정치적 토론의 특성 때문이다. 초딩도 좋다 싫다는 안다. 좋고
싫고에 이유와 근거를 대기 시작해야 고딩도 되고 대딩도 되는 거다. 보통 초딩들이 이렇다. “너 이거 싫어? 왜 싫어?”
“그냥”. 철학과 사상을 논하기 어려운 이유는 근거와 이유를 대야 하기 때문이다. 뭐 다들 어려운 토론 싫어하는 거 잘 안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다음아고라가 촛불정국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다. 고등학생들로부터 시작된 촛불문화제가 현재의 사태를 불러 온것도 사실이다. 다음아고라는 아고라로서의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이런 다음아고라가 무지하게 꼴보기 싫었는지 조선일보는 “다음 아고라, 3.3% 이용자 글이 절반차지”라는 글을 싫었다가 다음아고라의 열성적 네티즌들에 의해 몇시간 만에 패퇴했다. 자신이 고용한 알바들을 욕하다니 이처럼 소비자를 욕보이는 일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아 맞다. 조선이 고용한 알바가 아니라 한나라가 고용한 알바였던가. 여하튼 내 눈엔 기깡이 기깡이다.


실 조선일보의 글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인터넷이 보여주는 주요한 특성이다. 유식한 말로 파워로(Power Law)라고
한다. 유전자 조절 네트워크나, 인적 네트워크나 대충 네트워크를 이루는 복잡한 집단은 파워로를 그린다. 모든 집단이 그런 것은
아니다. 보통 생명체와 같이 정말 복잡한 시스템만 그렇다. 일반적으로 대충 수집한 모집단들은 대부분 정규분포곡선(bell
curve)을 그린다. 조선은 3.3%의 이용자가 글의 절반을 차지하는 게 이상해 보였나보다. 근데 그건 원래 그런거다.
웹페이지를 분석한 바라바시에 따르면 웹은 2:8의 파레토의 법칙에 따르는 파워로 분포를 따른다.

사실 난 이
파레토 법칙이라던가 파워로 따위를 그닥 달가워하지 않는다. “부익부 빈익빈”을 대변하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생명체의 내부에선
매일 이러한 부익부 빈익빈의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분명 어떤 진화의 과정은 파워로를 선택했다.
그리고 인류사도 파워로를 선택했었다. 근데 한번 상상해보자. 소수가 대부분의 재화를 차지한 사회가 아름다울까? 거꾸로 말해 다수가 거의 거지나 다름없는 사회가 아름다울까?

근데 이런 시스템이 요구되는 경우가 있다. 시스템의 역동적 성질이 파워로 분포를 가질때 가장 효율적으로 최대의 정보를 전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음아고라가 어떤 정보를 가장 효율적으로 전달하고자 할 때 취해야 할 스탠스가 파워로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파워로가
이번 촛불시위에서 나타낸 위력을 우리는 아주 잘 봤다. 훌륭했다. 민중은 다음아고라를 매개로 효율적으로 정보를 전달했고 또
움직일 수 있었다.

근데 이건 본질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무슨 말이냐면 다음을 하나의 정당으로 만들려 하면 안된다는 말이다. 20:80의 파레토 법칙을 따르는, 본질적으로
강건한(robust)한 척도 없는(scale-free) 네트워크를 진정으로 강건하게 만들어 주는 힘은 20:80이라는 그 비율에
있다. 그 비율을 벗어나 1:99가 된 시스템은 멈추어 붕괴한다. 혹은 경직되어 죽는다. 재미있게도 촛불정국의 법칙은
20:80이었다. 80%의 국민이 미국산 소고기의 수입을 반대했고, 정부는 그제서야 그것을 민심으로 읽었다. 그렇게 성난 민심은
무려 50일을 밝혔다.

나는 다양성이라는 화두에 목맨 자다. 그래서 다양성을 가진 집단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다양성이란 의견의 다양성이요, 집단을 구성하는 이들이 다양성이기도 할게다. 그렇다고 다양성에 목매어 평범한 진실을 놓칠 수는
없다. 물론 “다름”은 “틀림”이 아니지만, 이 논리는 우리 사회의 수구꼴통들에 의해 사용되는 전형적인 논리가 되어버렸다. 가끔
다른 것은 틀린 것이기도 하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는 말이 또 다른 법칙이 되는 순간 그건 이미 다양성을 침범하고 있는
것이다.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 할 때에는 평등이 보장되어 있어야 하고, 위계가 존재하지 않아야 하며, 그 사회가 열려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 그래 원래 세상이 이렇게 복잡하다.

실상 가장 행복한 상황은 다음아고라에 다양한
의견이 울려퍼지는 현실일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아고라의 문화다. 하지만 현실을 바꾸기 위해 모인 이들에게 그것은 딜레마로
자리잡는다. 파워로의 파워는 괜히 붙혀진게 아니다. 힘을 발휘하기 위한 시스템은 반드시 파워로라는 형태를 거쳐 지나가야 한다.
뭐 이렇게 되면 박정희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다는 귀결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 이야긴 좀 남겨두자. 괜히 역사적 필연론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다름이 틀림은 아니라는 추상적인 구호보다는 조금 구체적인 숫자를
제시해 주고 싶다. 상황이 극단으로 흐르더라도 20% 정도의 다양성은 품어야 한다. 용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정규분포를 그리면 된다. 다음이 아고라가 되려면 그래야 한다. 그리고 좀 세련될 필요가 있다. 지나치게 글들이 난삽하다.


은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그래 나도 그런 글은 쓸 줄 모른다. 누가 이거 읽고 마음 움직이길 바라기는 하지만 나도 그런 글
정말 쓸 줄 모른다. 하지만 정제되지 않은 글에 움직인 마음은 반드시 정제되지 않은 행동으로 흐른다. 그래도 참 착하다 우리네
민심은. 욕투성이의 댓글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숨어 있는 상식을 참으로 잘 찾아나간다. 그래서 생각한다. 촛불을 아름답게 만든
것은 다음아고라의 힘이 아니라 이 땅에 흐르는 민중이 가진 본성일 것이라고.

제발 부탁이다. 아고라 깃발을 들고
시위에 나오지 말아다오. 아고라의 의견을 그 깃발로 하나로 묵지 말아다오. 너희를 대표하는 것은 아고라가 아니라 소소히
살아숨쉬는 민중의 숨결일뿐임을 잊지 말아다오. 그리고 진화해다오. 아나운서의 한마디에 마녀사냥을 하는 사이트가 아니라, 정제된
글로 이 땅을 움직이는 곳이 되어다오. 그리고 제발 경망하게 행동하여 실명제를 부르는 계기가 되지 말아다오. 그러기에 너희는
너무나 아름다웠으니까 말이다.

누가 진실을 볼까. 다수가 진실을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럼 누가 진실을 볼까. 나도
모른다. 누구나 자신이 진실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래 진실은 지금 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항상
평가는 역사에 의해 내려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누군가는 이것이 진실이라고 우겨야 하고, 누군가는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항상 진실을 보는 자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 진실을 보았다고 다음에도 진실을 보라는 법은 없다. 세상은
원래 복잡하니 우리는 다양성의 힘에 희망을 걸 수 밖에 없다. 다양성이라는 보험이 아고라에서 사라지면, 아고라도 죽는 것이다.

그래 미안하다. 나는 아고라에 죽치는 사람은 아니지만 너희가 한 일에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아고라를 욕한다고 노하지 말아라. 너희들의 실체는 아고라가 아니라 그냥 너희니까.

쓰고 나니 욕 같지 않다. 그냥 낙시글이라고 생각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