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폭력혁명의 정당성에 관하여

민중의 폭력적 혁명이 발생치 아니하면 그만이거니와, 이미 발생한 이상에는 마치 낭떠러지에서 굴리는 돌과 같아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아니하면 정지하지 않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조선혁명선언”中

내 나라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헌법은 이렇게 시작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이 땅은 단재의 뜻이 펼쳐지지 못한 곳이다. 그 시작부터 3.1운동이라는 비폭력 독립운동의 기치가 정체성으로 내세워진 곳이다. 폭력이 항상 부당한가? 아니다. 폭력은 언제나 정당화를 요구한다.
단재가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던 시절의 조선은 절박했다.
3.1운동의 실패가 가져온 좌절은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게 만들었다. 그래. 3.1 운동이 성공했다고
보아도 좋다. 어차피 인과관계를 밝힐 수 없는 역사의 이슈에서 모든 해석은 자유롭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땅의 헌법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3.1 운동으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규정한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단재는
민족주의자로 낙인 찍혀 평가받지 못했다. 크로프트킨을 탐독하고 아나키즘에 영향받은 단재가 얼핏보면 테러리즘에 가까운 사상을
전파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단재를 테러리스트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무정부주의에 영향받았을지언정 그가
독립시키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민족이다. 민족주의자가 무정부주의자가 될 수 있는가. 아니다.

역사에 만약 따위는 없다. 하지만 상상해보자. 만약 단재가 성공했다면 우리의 헌법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일제에 대한 폭력투쟁을 성공시켜 독립한 대한민국의 헌법은 그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았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패한 3.1 운동의 이념처럼 단재의 이념 또한 실패한 이 땅의 역사는 주구장창 어지럽게 흘러왔다. 오늘의 시위는 그렇게 혼재된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 쪽에선 비폭력을 외치고 한 쪽에선 폭력을 정당화한다. 굳이 내게 택하라면 지금의 시위엔
비폭력이 정당하다. 그리고 굳이 폭력을 정당화하고 싶다면 합당한 정당화의 논리를 획득해야 한다고 말하겠다.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물었다. 현재의 촛불은 폭력혁명을 이야기할 만큼 정당성을 획득했는가. 미안하다. 광우병에
걸린 소고기를 먹고 죽더라도 조금 싼 값에 소고기를 먹고 싶은 나에겐 그 정당성이 보이질 않는다. 이명박이 세운 정부가 추진하는
일들에 진저리가 나는 나지만 내게 소고기는 그 중 가장 나를 자극하지 않던 이슈다. 국민이 거리로 나섰을 때 내게 펜을 들게
했던 것은 국민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귀가 없는 정부의 태도와 다시 역사를 후퇴시키는 사대주의적 외교였지, 국민의 건강권 따위가
아니었다. 만약 촛불이 앞의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고 “언론 장악”이나 “건강보험 민영화”로 시작되었더라면 난 가차없이
폭력혁명을 정당화했을 것이다. 허나 가난한 자에게 소고기는 폭력을 정당화하기엔 턱없는 사치다.

언제부터 소고기가
서민의 음식이었던가. 언제부터 소고기가 민중혁명의 정당성을 야기할만한 힘이 될 수 있었던가. 전복이 아니듯 소고기도 아니다.
그건 어제도 아니었고 오늘도 아닐 것이고 내일도 아니어야 한다. 우리가 정부를 뒤짚을 힘이 있어도 나는 그것을 소고기로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내가 무서운 것은 조용히 다시 떠오를지도 모를 공공복지의 자본화인 것이다.

나는 굳이 거리로
나선 이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는 조언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부끄러울 뿐이다. 그리고 아무리 여론이 중요하다 해도
그 여론에 맞추어 공안정국을 유도하는 이 정부를 이해할 수 없다. 그래 굳이 말하라면 나는 이 정부가 더 밉고, 촛불엔
안타깝다. 지도부가 없다지만 정권퇴진을 외치기엔 촛불이 가진 정당성이 한없이 약해 보인다. 그래서 내가 이 힘을 기억하고 다음을
기약하자는 것이다. 촛불은 위대했으니 이 촛불을 저 3.1 운동처럼 실패한 운동으로 만들지 말자는 것이다.

겉보기
재협상으로 정당성을 획득한 이명박이 지금은 이겼다. 비록 그것이 겉보기였을지라도 그는 약삭빠르다. 우리는 그보다 더 약삭빨라야
한다. 지금의 정당성은 시위의 시작과는 다르게 반으로 갈렸다. 그것이 얼마나 유지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개욕을 먹더라도
말하고 싶다. “우리가 너희의 작태를 눈에 횃불을 켜고 지켜볼터이니, 그리하여 우리가 오늘은 너희의 폭력이 아니라 우리의 자각에 의해 촛불을 접을 터이니, 이 촛불을 끝까지 기억하라”고.
내가 대책위라면 작금의 상황에 이러한 성명서를 낼 것이다. 그것이 정당성에서 우리가 이기는 길이다. 그래 비록 정당성의 획득에서
약했으되 우리네 민중은 스스로 각오했다. 그리고 그 점이 내게 신채호가 꿈꿨던 강한 민초들의 혁명을 기대하게 만든다.

민중이 어떻게 각오하는가?

민중은 신인이나 성인이나 어떤 영웅 호걸이 있어 <민중을 각오>하도록 지도하는 데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요, “민중아, 각오하자” “민중이여, 각오하여라” 그런 열렬한 부르짖음의 소리에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다.


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체 불평·부자연· 불합리한 민중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함이 곧 <민중을 각오케>하는
유일한 방법이니, 다시 말하자면 곧 먼저 깨달은 민중이 민중의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됨이 민중 각오의 첫째 길이
다.
단재 신채호, “조선혁명선언”中

  1. 쓰신 글들은 잘 읽고 있습니다. 하지만 쇠고기에 대한 시각만큼은 동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미약한 필력으로나마 입장을 적어보려합니다. 현재 어지러운 세태의 중심이 되는 이슈인 쇠고기문제는 비단 쇠고기를 먹는 쪽과 먹지않는 쪽의 문제는 아닙니다. 쇠고기가격이 비싸서 서민적인 음식이 아니라 하셨는데 실제로 쇠고기가 (혹은 쇠고기의 성분이) 들어가는 식품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게 많습니다. 제 직업은 요리사고 뭐 직업상 이런 식품안전에 대한 관심이 다른 분들보다 조금은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 정부의 뜻대로 미국산 쇠고기의 국내 유입이 진행된다면 누구도 , 단언하건대 그 누구도 광우병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쇠고기를 ‘안사먹는’ 다고 해도 말이죠.
    실례로 쇠고기는 조미료의 성분이 되기도 하고(아무리 양심적인 기업이라도 미국산 대신 호주산이나 한우를 사용하리라 생각되긴 힘드네요.) 라면의 원료가 되며, 보이지 않는 가공육으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조용히 우리 입으로 들어갑니다. 단지 꽃등심을 안사먹고 갈비를 안먹고, 스테이크를 안먹는다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일이 아닌겁니다.
    물론 방법은 있습니다. 완전한 채식주의자로 살되 조미료는 자연조미료를 직접 만들어 사용하고, 외부에서 가공되어진 음식의 성분을 전부 조사하며 섭취하는 겁니다. 뭐 이런 일이 가능하신 정도로 시간과 금전적인 여유가 되시는 분이라면 그냥 정말 믿을 만한 곳에서 구입한 (비싸더라도 그나마 안전한) 호주산이나 한우를 드시는게 빠르겠네요.

    여론몰이를 하는 일부 인간들이 자꾸 확률론을 따지는데 뭐 40억이든 400억이든 상관없지않습니까? 확률로 본다면 로또같은 복권을 사는것은 미친짓이고 건물에 피뢰침을 설치하는것도 확률론적입장에서는 기우에 의한 과잉 시설투자가 아닌지요. 확률적으로 교통사고로 사망할 확률이 얼마나되는지 또 암에 걸려 죽을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하지만 사람들은 교통사고나 재해에 대비해, 또는 암이나 기타 질병에 대비해 보험이라는 안전장치를 만들어 둡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그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말이죠)
    미국산 쇠고기 물론 저렴합니다. 품질 나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프라임급의 고기는 굉장히 맛잇습니다. 인정합니다. 하지만 싸고 맛있으면 중국산 납이 들어간 생선이라도 드시겠습니까? 당장의 위험이 크지않다고 해서 괜찮다는 식의 그들의 발언은 정말 한치앞도 내다보지 못하는(아니면 그들의 위험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외면하는 것인지도)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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