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시대정신과 동시다발성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돈도 벌고 글쓰기에 대한 욕구도 해결하고자 사이언스타임즈라는 인터넷신문에 “미르이야기“라는 재미 없는 글을 쓰고 있다. 광우병에 관한 글도 몇 개 썼었는데, 그것 때문에 미르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재미 없게 읽힌다는 걸 알게 됐다. 정말 대충 쓴 “프리온 발견이 생물학에 끼친 변화“라는 글은 무려 몇 주간 조회수 1위를 달리고 있었는데도 미르이야기는 참패였기 때문에. 슬프다.


내가 개인적으로 애착을 가지고 쓰는 글은 단연 미르이야기다. 분명 일반인에게 어려울 수 있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걸 강행하고 있는 이유는, 한국의 과학칼럼이라는 것의 수준이 지나치게 초딩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뭐 대충
“알기쉬운 DNA이야기” 이런 게 대세다. 과학이라는 지식체계를 쉽게 알린다는 취지는 그것을 저질화한다는 뜻은 아니다. 아마도
너무나도 다르게 흘러온 문화적 내력이 그러한 문화를 조장하는 것일테지만, 그러기엔 이 땅의 과학의 역사가 너무나 길다.
과학칼럼은 전문적인 용어를 술해하고 거기에 철학적 사회학적 가치를 부여하는 절묘한 줄타기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은 어렵다.
그것이 굴드와 같은 논객에게도 고민을 안겨준 이유다. 뭐 내가 굴드의 발끝에라도 닿았다는 건 아니다. 그저 쳐다보고 가고는
있다고 하소연하고 싶은 것 뿐.

여하튼, 어쩌다 닿은 미몹이라는 곳에서 마구 글을 쓰다보니 혀가 풀리듯 글발이 좀
풀렸나보다. 딱딱하기만 했던 사이언스타임즈의 글들이 조금 수월하게 써지고 있다. 이게 수요일이 마감이라 화요일 오전까지 보내야
한다는 압박때문에 월요일 저녁은 꼬박 글을 써야 한다. 오늘은 RNA간섭이라는 발견이 가진 의미에 관한 주제였다.

1990
년대에 식물 및 초파리, 선충, 곰팡이를 연구하던 서로 다른 학자들에게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현상들이 연속적으로 발견되고
그 배후로 RNA가 지목되기 시작한다. 분명히 당시까지 유전자 조절기제의 주인공은 DNA와 전사인자들이었는데 말이다. 아마도
이런 것일지 모른다. DNA와 전사인자를 통한 연구가 폭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열망이 싹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과학자들이 좀 그렇게 웃기다. 사회에서도 누구나 색다른 개성으로 주목받고 하는 심리가 있듯이,
과학자들도 항상 권위적인 이론의 약점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성공하면 엄청난 주목을 받으며 화려하게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실패하면 쪽박을 찰 수도 있는 도박이기도 하다. 그래서 조심해야 한다. 원래 도박이 그런 거 아닌가. 정립된 이론에 대한
도전은 언제나 도박이다.

뭐 그런 와중에 눈에 띈게 RNA였을 수 있다. 유전자 발현의 조절과정에서 늘 수동적이던
RNA가 혹시 능동적인 조절인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사고가 싹틀 시점이었을 수 있다. 이미 단백질이 감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프루시너의 노벨상도 있었으니 별반 문제될 건 없었다. 오히려 시기가 너무 늦었다고 봐도 된다.

그러다가 1922년에 오그번과 도로시(William Ogburn and Dorothy Thomas)라는 사회학자들이 발표한 논문을 찾았다. “발명은 필연적인가? (Are inventions inevitable? A note on social evolution)”
라는 제목의 이 도발적인 논문은 과학과 발명사에서 무려 148개의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한 발견들을 소개하고 있다. 뉴턴과
라이프니쯔의 미적분학, 다윈과 월러스의 자연선택, 줄과 헬름홀쯔의 에너지 보존법칙이 다 그런 예에 속한다. 이런 수많은
동시다발성은 사회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다. 문화적/사회적 요소가 성숙하면 비범한 인물에 의해 발견이
뒤따라 나온다는 일종의 역사적 필연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윈이 아니었어도 누군가는 자연선택을
발견했을 것이고, 왓슨과 크릭이 아니었어도 DNA의 이중나선 구조는 발견되었을 것이며, 아인슈타인이 아니었어도 상대성 이론은
발견되었을 것이라는 건데..글쎄. 앞에 두개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개인적인 생각이 있고, 뒤에건 잘 모르겠다. 아인슈타인의 발견은
글쎄다. 그런 이론은 사회적인 요소와는 별개로 좀 유별난데가 있어서 개인적인 역량이 좀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제는 과학에서다.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정말 역사적 필연론이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실험에 의해 얻어지는 데이터들은
시간만 주어지고 충분한 숫자의 과학자들만 있다면 결국은 얻어지고야 말것이라는 데에 나도 동의한다. 그래서 왓슨과 크릭의 이중나선
구조는 그들이 아니었어도 결국엔 풀렸을 것이라는 점에 내가 수긍하는 것이다. 이게 흔히 과학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정당화의
맥락”이다. 이론을 관찰된 경험으로 테스트하는 과정을 말한다. 하지만 그 데이터를 이론으로 풀어내는 작업은 다르다. 흔히
과학철학에서 “발견의 맥락”이라고 부르는 이 부분은 개인적인 역량에 의존되며 따라서 과학철학이 다루지 않겠다고 선언한 부분이기도
하다.

지금 오그본과 도로시는 “발견의 맥락”을 사회학적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에이. 농담도
잘한다. 그렇다면 세상이 정말 재미없지 않을까. 도대체 서양의 사고는 이렇게들 종말론적이다. 신은 하나고, 지구는 망하고,
역사는 필연적으로 몇 단계를 거치고 그렇게 말이다. 난 재미 없어서라도 그런 사상은 발로 차버리겠다.

이걸
멀티플스(Multiples)라고도 하던데 이러한 동시발견의 사회학적 설명은 때때로 시대의 성숙(readiness)을 가정한다.
발견이 사회적 인지에 지탱된 개념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이런 것 아닐까? 시대정신이 있어 그것을
지각할 정도의 지성이 있는 이들은 그 시대정신으로부터 무언가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는 교훈.

근데 실은 난 이것보다 더 무서운게 있다. “발견이 갖는 이 사회적 측면에는 보통 발견에 대해 학문적 우선권을 주는 사회적
제도가 확실히 얽혀 있으며, 학회에서 “등록”이나 학회지에서의 발표 등 발견을 발견으로서 사회적으로 인지시키기 위한 제도가
발견을 참된 발견답게 한다”는데 그러니까 뭐냐. 결국 먼저 발표해버리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 아닌가.

이와 발견해서 유명한 통계학자 스티글러의 유명한 법칙이 있다. 보통 “law of eponymy”라고 부르는데
Eponym은 어떤 것을 명명한 시조를 의미하는 말이다. 과학엔 어떤 법칙이 과학자의 이름을 딴 경우가 많은데 이 법칙의 이름을
파고들어가면 거의 대부분 진짜 시조가 아니라는 게 이 법칙의 내용이다. 그러니까 결국 못되고 정치적 파워만 있는 과학자가 착하고
똑똑한 과학자의 발견을 가로채 왔다는 거다.

결국 교훈은 이런거다. 발견이 시대정신의 산물이라면 지금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놈도 있을 터. 그리고 스티글러의 법칙이 알려주듯이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라는 점. 아 시바. 지금의 내
생각들을 표현하기가 두려워진다. 이거 어디다가 콕 인쇄해서 박아버려야 하나. 여하튼 그래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꼭 한번은 만나보고 싶다.

  1. 프로그래머로서도 들곤하는 생각이 내가 겪거나 생각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에 대한 답을 이미 지구상의 누군가가 이미 해결해 두지 않았을까 입니다. 작업중에 비즈니스로직이야 새로 구성해야 하지만 그외의 기술적인 이슈나 문제점은 인터넷을 뒤지면 거의 해답과 라이브러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새로운 기술을 탐구해가는 게임은 어디선가 독점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조금은 맥이 빠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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