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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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더 잘 이해하고자 한다면 글의 비유로서 ‘이게 다 해태 때문이다‘를 읽으실 것을 권한다. 상관관계로부터 인과관계를 도출하는 전형적인 오류이기 때문이다. 물론 풍수지리의 전통을 복원한다는 의미까지 축소시켜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그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공감대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모든 것을 과학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과학은 어떤 문제에 대해 정량적인 신뢰를 부여하는 작업일 뿐 그 이상의 가치 판단은 우리가 내리는 것이다. 물론 그 신뢰조차 부정하는 일들이 불행이겠지만.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에 대한 깊은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인터넷을 뒤지면 통계학, 의학, 경제학, 심리학 등등을 전공하는 이들이 작성한 많은 웹문서를 접할 수 있으니 그것으로 대신한다. 대신 조금 다른 시각을 소개해 주고 싶다.

과학의 최종목적은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불확실한 변수들을 모두 제거한 ‘단순화’가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기 때문이고, 상관관계로부터는 ‘확실성’을 보장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순성’과 ‘확실성’이라는 고전역학의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과학의 미덕은 여전히 유효하다. 만약 심리학자들이 인간을 대상으로 충분할 실험을 수행할 수만 있다면 회귀분석이나 기타 여러가지 통계학적 분석을 사용해서, 널가설을 제거하는 식으로 인과관계를 도출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인과관계를 밝히는 단 한가지 방법은 ‘조작(operation)’에 의한 실험 뿐이기 때문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다양한 상관관계들은 다양한 방법에 의해 얻어질 수 있다. 이렇게 얻어진 상관관계들을 주어진 조건에서 실험안으로 끌어들이고 그 안에서 ‘A가 B의 원인이다’라는 점이 최대한 많은 방법으로 증명될 때 우리는 ‘A가 B의 원인이다’라고 결론내린다.

인과관계를 밝히고자 하는 사건을 조작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수학이나 통계학과 같은 분석적 도구를 사용해, 상관관계로부터 인과관계를 도출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한 수학적 도구를 사용하더라도 그것은 널가설의 제거일 뿐 인과관계의 도출은 아니다. 이 점을 피어슨도 피셔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널가설의 제거가 가진 한계를 지적한 피셔의 경고는 묻혀버렸다. 기거렌쩌의 책에서 이런 역사를 알 수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기거렌쩌(Gerd Gigerenzer)의 책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아쉽게도 국내에 번역된 책은 없다.

이렇게 밝혀진 인과관계는 물리학에서는 하나 뿐이다. 칸트가 생물학의 미완성을 논하며 언급한 ‘목적론(Etiology)’이 물리학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별의 운동에는 목적이 없다. 하지만 동물의 운동에는 목적이 있다. 그것이 물리학과 생물학의 설명방식이 근본적으로 차이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이러한 목적론적 사고로부터 ‘근접인(proximal)’과 ‘궁극인(ultimate)’의 구분이 등장한다. 이것도 이전에 진화의학에 대해 쓴 글로 설명을 대신한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인간은 왜 털이 없을까’에 대한 두가지 인과적 설명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생리학적이고 분자생물학적인 관점에서 털이 안나는 돌연변이 등등을 설명하는 방법과, 둘째, 진화적인 관점에서 털이 인간의 적응도에 미친 영향을 따지는 방법이다. 모든 생물학적 설명이 이러한 두가지 인과적 설명의 총합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근접인이 언제나 궁극인보다 견고하다. 그것은 근접인만이 조작실험에 의해 직접적인 증거를 획득한 측정량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실험적 증거에 의해 이론이 제한 받는 과학적 상식을 의미하고, 과학적 사고에서 상식은 곧 인류학적 상식임을 나는 믿는다.

위의 설명을 이해했다면 자연스럽게 금강산 민간인 피격사건의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따져 볼 수 있게 된다. 이번 사건의 근접인은 초병에 의한 민간인 살해다. 초병이 총을 발사했고 민간인이 죽었다. 부정할 수 없는 인과관계가 성립된다. 초병에게 명령을 내리는 집단은 북한의 군부다. 당연히 군부는 초병과 근접인으로 연결되어 있다. 정부의 말단직원이 과실을 저질렀을 때 상사가 징계를 받는 것과 다른가? 다르지 않다. 이것이 요즘 회자되는 법치의 기본이다. 모든 사건은 그 인과관계를 밝혀야 죄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현대아산의 부주의는 궁극인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그들의 부족한 교육시스템이 이러한 사태를 초래했다는 것은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는 않지만 여러 정황상 궁극인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하지만 수사의 기본은 근접인을 밝히는 것이다. 궁극인은 정량적 신뢰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궁극인의 인정은 언제나 다양한 증거들과 인간의 두뇌가 지닌 합당함의 판단-기거렌쩌에 의하면 제한적 합리성-을 따른다. 나도 현대 아산의 잘못이 크다고 믿는다. 허나 수사의 촛점은 북한 초병과 군부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이 한 사람의 죽음을 수사할 때 우리가 취해야 하는 상식적 태도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는 상관관계로 기능할 뿐이다. 피격이 일어난 시점에서 국가를 운영하는 정부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것은 상관관계 이상이 될 수는 없다. 아무리 이명박 정부가 밉다 하더라도, 그동안의 정부의 북한에 대한 태도를 비난하는 것과 이번 피격사건을 억지로 엮어 보려는 태도는 상식적이지 못하다. 사람이 죽었다. 물론 정부의 그동안의 통일에 대한 철학이 과거로 회귀한 듯한 느낌이 있었다 하더라도, 사람이 죽었으면 그 살인사건의 근접인을 먼저 수사하고 이후 정부에 책임을 묻는 것이 옳다.

‘모든 것이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말이 유행했던 것이 몇 년 안된다. 이젠 ‘모든 것이 이명박 때문이다’란다. 나는 그 둘 사이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의 수구보수의 논리가 그대로 진보진영에게로 넘어 오는 것이라면 그건 어느쪽이건 비판받아 마땅하다. 사람이 죽었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건가?

  1. 목적론을 Teleology로 하지 않고 Etiology라고 하셨네요. 영어권에서 칸트의 책이 어떻게 번역되고 있는지 살펴보지 않았는데, etiology는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강조는 그 원인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찾고 있는게 원인이니까요.

  2. 지적 감사드립니다. 지적하신대로 이 경우 Etiology의 번역으로 목적론을 사용했습니다. 원인론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합니다. 제가 공부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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