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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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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는 다루는 대상의 특성에서 기인되는 경우가 많다. 이미 블로그의 이곳 저곳에서 이야기했었는데, 때마침 우석훈씨의 블로그에 올라온 글을 보고 포항에서의 마지막 포스팅을 이 글로 장식하려고 한다.

아마도 우석훈씨가 주목하고 있는 두 학문의 차이는 첫째, 학문을 구성하고 있는 데이터들의 안정성과 지속성 문제와 둘째, 이로부터 비롯되는 프레임의 변화 속도인 듯 하다. 두번째 문제는 쿤이 패러다임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과 중첩되는데 실상 쿤이 이야기하는 패러다임이라는 거대한 변화는 사회과학에서의 변화와 그 속도면에서 그닥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는 쿤이 물리학과 화학의 일부만을 그 분석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에서도 실험을 주된 작업으로 하는 과학분야와 관찰 및 이론을 주된 작업으로 하는 분야의 차이는 우석훈씨가 이야기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만큼이나 뚜렷하다.

자연과학에서 대체적으로 데이터의 안정성 혹은 신뢰도는 그것이 ‘양(quantity)’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이를 ‘측정량’이라고 부른다. 17세기에서 19세기로 이어지는 과학의 역사는 결국 양화의 역사다. 그리고 측정량은 반드시 재생산 가능해야 한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만이 이론의 토대로 봉사할 수 있다(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적어도 과학자들은 그렇게 믿는다).

이러한 자연과학의 특징은 인간의 인지구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인간의 두뇌는 양으로 표시된 것들과 재현되는 것들에 무한한 신뢰를 보내도록 진화했다. 두가지 전략 모두 생존에 유리하다. 재현되는 것들에 대한 신뢰는 당연히 생존에 유리하다. 항상 맘모스가 나타나는 곳으로 사냥을 나가는 형질은 홍적세의 인간에게 분명 유리한 형질이었을 것이므로. 양에 대한 신뢰는 문화적 진화와도 연관이 있다고 보여지는데, 이에 대해서는 인지심리학의 연구들을 좀 더 공부한 후에 덧붙히고 싶다.

우석훈씨의 표현처럼 자연과학에서 ‘프레임을 뒤엎는’ 시도가 빈번할 수 있는 이유는 자연과학의 이론들이 의존하고 있는 데이터들이 측정량과 재생산 가능성이라는 확고한 토대위에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거대한 주류 이론이라도 반복되는 실험결과들을 이길 수는 없다. 이러한 과정을 ‘과학에서의 세속화’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자연과학에서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과학의 세속화’란 두가지 의미로 읽힌다. 첫째, 종교로부터 과학이 분리되는 근대의 과정을 의미하고, 둘째, 이론이 실험에 의해 제한되어가는 과학의 전반적인 역사를 의미한다. 나는 두번째의 의미로 과학의 세속화라는 말을 사용한다. 파이어아벤트의 책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갈릴레이의 시대는 여전히 실험에 의한 이론의 제한이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천문학이라는 학문이 가지는 특징과 관찰을 토대로 발전하는 자연과학 분야의 경우, 측정량이 가지는 신뢰성이 다양한 이론으로 모두 설명이 가능한, 즉 특정량에 의한 제한이 상대적으로 느슨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파이어아벤트가 ‘무엇이든 괜찮다’라고 말한 것은 내 기준에서는 당시가 과학이 세속화되기 전이었으므로 공허한 곳에 비판을 해댄 셈이다. 하지만 파이어아벤트가 과학의 역사성을 읽었음에는 분명하다.

따라서 천문학이나 지리학과 같이 관찰을 토대로 발전한 학문들의 경우 학설을 뒤엎으려는 시도는 사회과학에서처럼 어렵다. 이러한 경우 주류학자들에 의해 정립된 이론은 쿤의 말처럼 과학자 사회의 이념으로 봉사한다.

하지만 실험과학과 같이 실험실에서 ‘조작(operation)’실험을 할 수 있는 과학의 분야들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신뢰도가 높은 측정량을 산출할 수 있다. 이것이 실험이라는 분석도구를 사용하는 과학에서 얻은 측정량들이, 수학 혹은 통계학과 같은 분석도구를 사용하는 과학에서 얻어진 측정량들보다 상대적으로 지속적인 이유가 된다. 언제나 실험을 통한 측정량들이 관찰 혹은 통계에 의한 측정량보다 오래간다.

다양한 방법으로 얻어진 측정량을 이론과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우석훈씨가 이야기한 ‘프레임 뒤집기’가 등장한다. 상대적으로 신뢰도가 높은 측정량을 가진 학문영역일 수록 이러한 프레임 뒤집기가 쉽다. 이를 세속화된 과학, 혹은 ‘실험에 의한 이론 제한성’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경제학이나 사회과학의 제분야들처럼 ‘조작실험’을 통한 측정량의 확보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경우, 과학자들은 통계나 수학과 같은 분석도구 혹은 역사적 사료를 통한 논증을 사용하게 된다. 이렇게 얻어진 측정량들은 상대적으로 신뢰도가 약하고 따라서 이론에 대한 제한력이 약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측정량 혹은 실험에 의한 제한이 높은 학문분야일수록 이론을 뒤집기가 쉬워진다. 반대의 경우 이론을 뒤집기가 어려워진다. 전자의 경우 나는 세속화가 완결되었다고 말한다. 양화와 재현가능성이라는 미덕이 이론이라는 일종의 이념성을 약화시키는 세속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론은 절대적인 신념으로 봉사할 수 없다. 실험물리학과 화학, 생물학은 이러한 역사를 보여주는 분야들이다.

후자의 경우 나는 세속화가 진행중이라고 말한다. 양화와 재현가능성이라는 미덕이 부족한 학문분과들에서는 이론이 절대적인 이념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런 경우 학문의 내부층위를 떠나 학자들 사이의 사회학적인 정치가 개입할 여지가 커지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프레임 뒤집기’가 어렵고 상대적으로 느려지는 원인이 찾아진다. 경제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의 제반 분야들은 세속화가 진행중이다. 데이터 혹은 측정량과 이론이 연결될 때 여전히 이론이 이들을 제한한다. 실험과학은 데이터 혹은 측정량이 이론을 제한한다.

단순화시켜 말했지만 상황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선을 확연히 그을 수는 없지만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서 ‘프레임 뒤집기’의 정도 차이는 이러한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잘 읽힌다.

하지만 나는 사회과학이 세속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얼마가 걸릴지도 모르는 여정이며, 불가능한 과정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세포하나를 조작하는 것은 쉽지만, 인간사회를 조작하는 것은 원천적, 윤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사회과학의 가장 큰 측정량은 ‘역사’라고 보는 것이다. 역사란 사회과학이 가진 거대한 측정량들의 집합이라고 바라보는 것이고 그것이 내가 가끔 역사와 상식을 거론할 때의 맥락이다.

어쩌면 사회과학의 세속화는 없을지도 모르고, 나는 그것을 사회과학의 열등함이라고 읽지 않는다. 그건 오히려 자랑이며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정당성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데이터가 이론을 제한할 수 있다면야 그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우리가 기대야 할 것은 역사와 주어진 상황에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얻은 양화된 데이터들, 즉 측정량 뿐이다.

추신1: 이 글에서 다루어진 이야기들은 희미하게나마 미시경제학의 수학공식들과 거시경제학의 담론들의 차이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고전경제학이 수학이라는 도구를 도입하게 되는 배경을 경제학의 일종의 양화의 역사로 읽어도 무리는 없을 듯 하다. 실상 18~19세기를 걸쳐 대부분의 학문들이 자연과학에서 일어났던 거대한 변화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양화의 역사이자 모방의 역사다. 자연과학에서 확률혁명이 일어났을 때의 변화도 곧바로 사회과학으로 퍼져나갔는데 크루거를 비롯한 학자들의 책이 도움이 된다. 나도 다 읽어보지는 못했다.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의 관계는 분자생물학과 진화생물학의 관계와 비슷한 측면이 있는데 내가 아직 경제학을 제대로 알지못하므로 패스.

추신2: 우석훈씨가 언급한 굴드의 책은 아마도 김동광씨가 번역한 <Wonderful Life>인 듯 하다. 굴드의 책들 중 가장 구체적인 사안을 파고들어간 책이고 고전 중의 고전이다. 실상 이 책을 읽고 고생물학이라는 분야와 다른 자연과학들의 차이, 양화의 역사, 이론과 측정량의 긴장관계 등을 생각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아마도 우석훈씨는 그것을 직관적으로 읽어낸 듯 하다. 분자생물학자의 입장에서는 버제스의 화석들이 가지는 의미가 단속평형을 이끌어 낼 만큼 거대하다고 보지는 못했는데 아마도 그건 과학이 가지는 다양성 때문일 것이다. 상당히 구체적인 책이라 기대만큼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고생물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에 대해 알 수 있는 계기가 된 그런 책이다. 예를 들어, 캄브리아기의 대폭발이 다윈 시대부터 알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고된 논쟁과 암투를 견디는지를 읽으면서, 과학의 세속화, 즉 이론이 측정량을 제한할 때 벌어지는 약간의 비극을 읽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 <풀하우스>와는 다른 굴드의 전공학자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과학 오디세이 3) 상세보기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 경문사(박문규) 펴냄
1909년 캐나다 서남주의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 발견된 버제스 혈암, 그 고대 화석을 둘러싸고 벌어진 80년에 걸친 과학자들의 해석이 한편의 드라마처럼 흥미롭게 펼쳐지는 책. ‘캄브리아기 폭발’이라고 알려진 생물 진화를 매우 독특한 현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전문 화가가 그린 복원도를 비롯해서 다양한 그림 자료들을 수록했다. 또한 브리시티컬럼비아주의 버제스 혈암의 발굴 과정과 이 화석에 대한 고생물학자들의
풀 하우스 상세보기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 사이언스북스 펴냄
다양성으로 가득 찬 생물계를 의미함과 동시에 기존의 빈약한 진보주의적 진화론을 누를 수 있는 강력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한 교양서. 다윈의 『종의 기원』 이후 약 150년간 왜곡되어온 진화론의 진실을 이 책을 통해 소개했다. 플라톤에서 다윈까지 우수성의 확산, 죽음과 말-변이의 중요성에 대하여, 4할 타자의 딜레마, 생명의 역사는 진보가 아니다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추신3: 굴드는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지만, 왜 고생물학자들에게 선형분석이나 회귀분석과 같은 통계학이 필수였는지가 위에서 내가 말한 주제와 일맥상통한다. 아이큐를 둘러싼 굴드의 통계학 강의는 <인간에 대한 오해>에서 볼 수 있다. 굴드는 설명의 천재다.

인간에 대한 오해 상세보기

스티븐 제이굴드 지음 | 사회평론 펴냄
이 책은 시대의 조류에 편승해서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 생물학적 결정론의 역사에 얽힌 많은 자료를 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과학 이론, 역사, 철학, 사회, 문화를 모두 다루면서 수많은 개념과 관점들의 대비, 다의적(多義的) 비유 등으로 생물학의 핵심적인 개념들을 극적으로 대비시켜낸다.

추신 4: 좀 더 학문적인 이야기는 이상하 박사의 홈페이지 이곳저곳에서 읽을 수 있다. 위의 글들은 그의 견해를 내가 나름대로 입맛에 맛게 정리한 것 뿐이다.

  1. 글의 일부분을 허락없이 인용하려 하는데 원치 않으시면 지우겠으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2. CCL을 깜빡하고 과도한 예의차리기 였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3. 그나저나 이 글 쓸때 정말 가장 고뇌하고 열심히 퇴고했던 듯 한데 이제야 답글이 하나 달린다는…참 대단한 블로고스피어라는..

  4. 요즘 안그래도 그 뚱땡이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많이 받고있습니다.
    좋아하는 가수 이름이에요 ㅎㅎ

  5. 네 항상(이래봤자 이틀전 부터지만) 좋은 글 감사히 잘 보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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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yangchun's me2DAY 2009/02/08

    급진적 생물학자 Radical Biologist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