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라는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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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의 집행유예 판정으로 결정나 버렸다. 이 사회는 삼성을 단순한 재벌이 아닌 법체계로부터 자유로운 일종의 종교로 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재포스팅.

삼성을 하나의 종교로 보고자 한다면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 먼저 종교에 대한 명확하고도 구체적인 정의가 필요하다. 둘째, 이렇게 정리된 종교의 정의와 삼성을 비교분석해야 한다. 셋째, 비교실험으로 그렇다면 왜 유독 삼성만이 종교라 불릴 수 있는지를 다른 기업들과 견주어보아야 한다. 이 세 단계 작업을 통해 삼성이라는 기업이 지닌 종교성을 고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종교의 의미

이길용 교수가 말하고 있듯이
종교란 용어는 한마디로 정의내리기엔 지나치게 광범위한 무엇이다. 몇몇 종교가들은 “종교의 의미를 세분화하여 ‘종교적
체험'(religious experience or personal faith)과 ‘(종교적) 축적적 전통’(cumulative
tradition)’을 나누어” 보려는 시도를 한다고 하는데, 결국 “종교는 궁극적으로 사회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것이며,
제도적이라기보다는 내면적인 것이”라는 도올의 말과 통하는 것이라 본다. 도올은 종교의 시작이 집단적인 것이었지만 현재의 종교는
개인적인 것으로 변해간다는 믿음으로(기독교의 기도행위를 근거로) “종교란 개인적인 것”이라고 선언해버렸지만, 도올의 말은 결국
“종교란 개인적인 것이어야 한다”로 바꿔 읽어야 한다. 저 선언에 담긴 뜻은 “나 도올은 기독교가 개인적인 신앙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기 때문이다.

이길용 교수는 한 강연에서
종교를 ‘세계설명체계’ 그리고 ‘삶의 문제 극복체계’라는 두 축으로 바라본다고 말하지만, 결국 삶의 문제 극복이란 조금 강하게
이야기하자면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라고 바꾸어 말해야 한다. 아니라면 종교의 제도적, 사회적 측면을 깡그리 무시하고 도올처럼
“종교는 개인적이어야만 한다”라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박이문 선생도 결국 철학적 개념 및 의미에
집착하다가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아무 답도 못주고 계신다 본다. 결국 지나치게 철학적인 분석에 집중하다 보면 본말이 전도되곤
한다. 분명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존재할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본다면 어차피 종교를
정의한다는 것도 내 맘이고, 그 한계내에서 삼성의 종교성을 이야기하면 그 뿐이다.

결국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종교에는 개인적인 측면과 집단적인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전자를 ‘종교경험’, 후자를 ‘종교현상’
라고 해도 무방하고, 전자를 ‘종교의 개인적 기능’, 후자를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그렇다면 삼성이 가지는
종교로서의 측면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 우리는 삼성에 속한 이들이 가지는 ‘종교경험’적 측면과 ‘종교현상’으로서의 삼성, 이 두
가지를 말해야 하겠다.


‘종교경험’으로서의 삼성

요하임 바흐는 “종교경험의 보편적 요소
4가지로 정리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궁극성(Ultimacy), 전체성(Totality), 강렬함(Intensity) 그리고
행위(Action)”라고 한다. 그러니까 결국 “종교경험은 궁극적 실재를 체험한 인간의 반응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부분이
아니라 인간의 전체적 반응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경험 중에서 종교 경험은 가장 강렬한 것이고, 아울러 그러한
체험은 실제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궁극성, 전체성, 강렬함, 행위 따위의 정의가 너무 어려워서 이해
못하겠다. 그래도 우선 대충 비교라도 해보자.

궁극적 실재라던가 전체적인 반응이라는 건 결국 비슷한 이야기인 듯 한데, 그러니까 강렬하다는 것으로 표현될게다. 강렬하니까 직접 행동하게 되는 것일테고. 강렬하다, 전체적이다 그리고 행동한다는 걸 보니 삼성 신입사원들의 매스게임이 떠오른다. 음. 분명 이건 대충 종교경험과 비슷한 듯 하다. 궁극적이라는 데서 좀 의문이긴 한데 뭐 4개 중 3개 만족하면 된거다.


신입사원들의
행태만 보고 삼성을 종교라고 판단하면 너무 편협한 주장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인터넷엔 제임스 도우(James Dow)라는
사람이 쓴 <A Scientific Definition of Religion>라는 글이 떠돌아 다니고 있다. 그 사람
의견에 동의하던 말던 일단 종교에 대한 그의 정의가 재미있다. 도우씨는 “종교란 스스로 창조해 낸 현실의 체제 내에서만 뭔가를
쉽게 받아들이는 인간행동”(Religion is a human activity that can be easily accepted
only within the framework of reality that it creates for itself)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우물안 개구리고, 편협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종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뭐 제임스
도우씨의 정의도 지나치게 편협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행위(activity)라는 말을 경험(experience)로 바꿔 이해해
보기로 하자. 결국 삼성이 종교이려면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체제에 속박된 어떤 행태들이 드러나야 한다.

삼성의
직원들은 삼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세상을 바라볼까? 삼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이성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세상을 경험하게
될까? 이건 남겨진 숙제다. 예를 들어 노조 없이 기업을 운영하는 행태라던가, 아들에게 기업을 물려주기 위해 편법을
동원한다던가,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공권력을 돈으로 사버리려는 행태에 대해 삼성의 직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조사해봐야 알
수 있다. 근데 왠지 조사를 안 해봐도 그럴 것 같다.

‘종교현상’으로서의 삼성

<Unto
Others>라는 책으로 유명하기도 하고 새로운 집단선택이론인 다층선택이론으로 진화학계에서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인물이 있다. 데이빗 슬로안 윌슨(David Sloan Wilson)이다. 최근엔 도킨스가 쓴 <God
Delusion>이라는 책에 대해 쓴 소리를 늘어 놓기도 했는데, 이 인물이 쓴 <Darwin’s
Cathedral>이라는 책이 한국에 <종교는 진화한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좋은
책이 안팔린다)다. 부제가 <진화론과 종교, 그리고 사회의 본성>인 만큼, 어찌보면 정말 새로운 시도이고 이 사람 좀
멋지다. 그 이유는 여기서 이야기하기는 그렇고 아래에 링크를 주욱 달테니 그 글들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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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그가 엘리엇 소버와 함께 <Unto Others>에서 주장했던 ‘다층선택이론’으로 종교를 설명하려 한다.
‘다층선택이론’에 의해 종교는 일단 유기체로 정의된다. 그리고 종교가 집단선택 과정에서 적응적 이점을 가진다는 것이 여러
증거들을 통해 소개되고 있다. 그의 박학다식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녹녹치 않은 학자인데 국내에선 그의 집단선택이론을 매우
혐오하는 일부 과학철학자들 때문인지 별로 소개가 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내가 보기엔 도킨스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다. 한 인터뷰에서 “당신은 무신론자입니까?”하고 물으니까 “네,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하지만 좋은 무신론자예요”라고
대답하는 센스란.

종교는 진화한다 (진화론과 종교 그리고 사회의 본성) 상세보기

데이비드 슬론 윌슨 지음 | 아카넷 펴냄

교와 종교 집단에 관하여 진화론의 유기체적 개념을 도입하여 분석한 연구서적. 우리 인간 종에 관한 광범위한 문헌 조사와 생물학적
지식, 신학, 인류학, 역사학, 사회학 및 심리학과 같은 다양한 학문 분야 문헌의 검토를 통해 종교에 대해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인간 사회의 유기체적 본질을 탐구하였다.

여하튼
슬로안 윌슨이 이 책을 통해 주장하고 싶은 요점은 구시대의 인류집단에게 종교란 집단의 결속력을 높여 다른 집단과의 경쟁에서
생존하게 해주는 적응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집단의 적응이점을 조사하기 위해서 그가 정량적 연구를 했는데 무려 텍사스
한인교회가 대표적인 예다. 이게 윌슨의 이론에 딱 맞아 떨어지는 좋은 예다. 즉, 한인교회가 한인들에게 주는 세속적 이득은
종교가 가진 집단결속력의 아주 좋은 예가 된다.

실상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했던 것은 홍적세의 인류가 진화한 시공간이라고 예측되는(인류학자들의 민속지학에서 주로
증거가 나오는데) 곳에서는 종교가 결국 “만민평등주의”였을 거란 점이다. 우리 본성에는 이런 만민평등주의에 대한 향수(?)가
박혀 있을 거고, 따라서 집단의 크기가 커질 수록 집단의 안정성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누군가에게 권력을 양도하게 되긴 하지만,
그걸 견제하는 수단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게 된다는 나의 인생 최대의 철학을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나온다는 것이다. 즉 인류의 모든
제도가 결국은 만민평등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수렴될 수 밖에 없다는 나의 철학이 천군마마를 얻을 수도 있다는 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게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이렇게 바라보면 종교도 결국 집단이 커지는 과정에서 집단의 안정화를 위해 도입된 일종의 문화도구로
볼 수 있다.

말이
길었는데, 윌슨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삼성이라는 기업집단은 일종의 종교다. 기업은 원래 다른 기업과의 경쟁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윌슨의 경쟁이론, 적응이점이론이 딱 맞아 떨어지게 되고, 신입사원들에게 매스게임과 같은 종교경험을 심어주는 것은
삼성이라는 종교단체의 결속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애국심도 과하면 종교다. 지역주의도 과하면 종교다. 현재의 민주-한나라 구도는 경상도와 전라도라는 집단들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투쟁이다. 그래 삼성만 종교인 게 아니라 이런 모든게 일종의 종교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게 아니다. 그것이 가지는 의미가 진짜 문제인 것이다.

모든 종교는 필연적으로 세속화된다.

슬로안
윌슨은 구석기 시대, 즉 인류가 최초로 등장하던 시점에서 종교가 하나의 적응이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그러면
현재는 어떤가? 근대는 종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세속화로 이해될 수 있다. 유럽에서 진행된 세속화 과정이 가장 좋은 예가
된다. 이 말을 바꿔 표현하자면 집단의 결속이라는 이익을 위해 탄생한 종교가 인류가 발전하면서 그 효용을 다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즉, 종교현상으로서의 종교는 그 유명을 달리하고, 종교경험으로서의 종교만이 살아남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종교경험은
발전한 사회일 수록 다양화된다. 획일화된 종교경험은 또 다른 구석기시대의 종교현상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종교경
험과 종교현상이 지닌 이러한 역동성은 기독교의 발전과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기실 예수의 사상이 혁명적이었던 것은 집단의
결속력이라는 측면에서 구석기시대적이고 야만적이었던 유대교를 발전시켰다는 데 있다. 그는 유대인이라는 한정된 집단의 종교를 모두의
종교로 확장시켰다(그걸 예수가 했던 바울이 했던 이후의 누가 했던 그건 일단 신경끄자). 그런데 기독교라는 종교를 이처럼
도약시킨 예수의 시도가 미국이나 대한민국 같은 곳에서 다시금 구석기시대적 종교로 퇴보하기도 한다. 즉, 종교현상으로서의 종교가
종교경험으로 대체되는 과정은 반드시 ‘다양성’이라는 현상과 함께 일어나야 건강하다는 뜻이다. 이 말을 이해 못할 기독교
광신도들을 위해 쉽게 설명하자면, 같은 기독교인이라 해도 교리에 대한 경험과 표현이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단이니 뭐니 하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말이다. 그냥 그런건 이단이 아니라 광신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사이비종교들이 처벌되는 것이 신도들의 돈을 횡령하기 때문이라면 기독교 내부의 비이단적인 교회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 날 때 그걸
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건 교리로 이단을 심판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다. 성숙한 종교는 종교교리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모든 종교는, 내가 보기엔 구석기시대의 생존을 위한 종교일 뿐이다.

이걸 삼성이라는 종교현상에 적용시켜 보면 이렇게 된다. <굿바이 침팬지>라는 책이 나왔다더라. 읽어보지는 않았는데, 대충 내용이 이렇다. 저자는 리쳐드 콘리프의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이 책을 저술했는데 콘리프의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한다.


침팬지들은 우두머리에게 번갈아 가며서 절을 한다. 때때로 하위 침팬지들은 나뭇잎이나 먹을거리를 가져다 우두머리에게 바치거나 그의
발이다 가슴에 입을 맞추기도 한다. 우두머리 침팬지는 몸을 쭉 펴서 자신의 덩치를 과시하기도 하고 머리털을 곤두세우는 식으로
부하들의 인사에 답을 한다.” – <양복 입은 원숭이> 중에서


리처드
콘리프가 침팬지의 모습을 양복을 입은 남자에 비유했던 것처럼 저자는 서열을 철저하게 지키는 침팬지와 1970~80년대 고속 성장
시기의 한국 기업들과 비교했다고 한다. “말단사원 위로 주임, 계장, 대리가 즐비하고 과장, 차장, 부장이 조직을 관장하던 그
시절 한국의 기업은 끊임없이 윗사람의 눈치를 살펴야하는 침팬지 사회와 같”고 “이러한 서열화는 공장에서 공구 하나를 구입하려고
해도 20개의 도장이 필요했던 비효율적인 기업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 이 책의 골자다. 모방이라는 패러다임도 등장하는데 그건 이
글과는 관련이 없으니 제외하기로 한다. 결국 저자의 주장은 “서열화와 모방이라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유연한 조직과 혁신으로
진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두머리 중심이 아니라 소비자들의 입장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도 저자의 주장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구석기
시대의 종교는 일종의 적응집단이었다. 그것은 타집단에 배타적이었으며 이러한 배타성은 결국 자기집단의 결속을 이끌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초기의 종교는 집단에 적응적인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었고 따라서 진화할 수 있었다.

경제개
발이 숙원이었던 시기에 삼성이라는 기업은 구석기 시대의 종교처럼 진화해 나갔다. 이들은 기업 내에 다양성을 담보할 수 있는
노조를 억압하고, 신입사원들을 세뇌시키면서 자기결속력을 강화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그 방법은 매우 효율적이었다.

다양성은 그 세속화를 담보할 유일한 가치다

아이러니하게도 삼성출신의 저자
지적한 것들은 종교현상으로부터 종교경험으로 이어져 온 종교의 발전과정과, 획일화로부터 다양성으로 이어져가야만 하는 종교의
건강성에 일치한다. 그리고 재벌이라는 후진적 방식으로 발전해 온 국내의 다른 대기업들도 가지고 있을 이런 문제가 삼성에 더 크게
적용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삼성이 스스로를 종교집단으로 만드는 것을 넘어 국민들에게도 자신들을 일종의 종교로 보이게 하려 한다는
점이다.

국민들
에게 삼성이 종교화되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경제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삼성을 세속화하려는 모든 시도를 무력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삼성을 세속화시키려는 시도들이 계속될 수록 이들은 경제위기라는 공포심을 국민들 마음속에 심으며 사태를 무마해간다.
이건 종말론을 외치는 종교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설사 그렇다 해도 삼성이라는 종교가 걸어갈 길은 정해져 있다. 그것은
구석기 시대의 종교로부터 다양화된 개인종교로 탈바꿈하는 세속화의 길이다.


전히 재벌기업들이 난무하는 한국사회에서 삼성은 더욱 독보적인 존재다. 천주교와 불교가 한때는 부패한 정권과 결탁하기도 했어도
결국은 정화의 길을 걷고 있는데, 기독교는 그 정화의 속도가 느리다는 점과도 일맥상통한다. 재계의 삼성은 종교계의 기독교다.
그리고 그 두집단은 모두 구석기시대의 야만적인 종교행태를 답습하고 있다. 나는 삼성이라는 종교가 사라진 대한민국을 꿈꾸고 싶다.
그것은 삼성이라는 기업을 폭파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탈바꿈하자는 뜻이요, 기독교라는 종교를 해체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민족의 종교로 거듭나게 하자는 뜻이다.


성이라는 종교는 모든 종교가 그러했고 그러해야만 하듯이, ‘종교현상’에서 ‘종교경험’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그것은 삼성의
직원들이 삼성에 대해 광신적인 믿음을 가지지 않게 해야한다는 뜻이다. 철저하게 개인적인 신앙으로 탈바꿈함으로서만 건강해질 수
있는 기독교처럼 삼성도 직원들에게 개인적인 신앙을 보장함으로서(그것이 노조를 허용하는 것이 됐든, 매스게임을 안하는 것이
됐든간에) 건강성을 보장해야 한다. 그래야 현재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던 상명하달식의 기업구조가 더욱 건강한 유동적인 구조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이건
한국 기독교가 겪어온 경험과 일치한다. 국가적으로 힘든 시기에 그 힘을 획득한 기독교는 내부의 유연함을 잃고 점점
구시대화되어갔고 현재에 이르렀다.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획득했지만 그들에게 지나치게 적대적인 더 많은 세력을 양산하는 악수를
두었다. 이들이 어찌 될것 같은가? 무너진다. 그것도 크게 무너지게 된다. 지금 반성하고 제대로 된 길을 걷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내부로부터 무너질 운명에 처해 있다. 삼성은 한국의 기독교와 같은 길을 걸어 왔고 또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 안티기독교인들이
이토록 많은 것처럼, 안티삼성을 외치는 사람들도 많다. 그것은 지나치게 구시대적으로 종교화된 삼성에 대해 각성한 민중이 던지는
포효다. 기독교와 삼성은 너무나 비슷한 위치에 서 있다. 만약 희망이 있다면 그들의 운명은 그들이 결정하게 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재활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종교는 뽀개도 된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의 건강성을 위해 장기적으로 합당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말도
안되는 이론을 씨부려 놨는데 그래도 뭐 그렇다. 천상 과학자라 그런지, 삼성이 사회에 내놓았다는 그 8000억의 일부를(아니 꽤
많은 부분을) 락펠러 재단처럼 뚜렷한 철학 위에 기초과학을 위해 투자한다면 나는 삼성 빠돌이가 되련다. 미안하다. 나는 재야의
혁명가는 아니될 모양이다.

+ 데이빗 슬로안 윌슨(David Sloan Wilson)에 대해


 + A CONVERSATION WITH: DAVID SLOAN WILSON; The Origin of Religions, From a Distinctly Darwinian View
 + A Debate Between Natalie Angier and David Sloan Wilson Moderated By Thomas A. Bass
 + Atheism as a Stealth Religion
 + Beyond Demonic Memes: Why Richard Dawkins is Wrong About Religion

5 thoughts on “삼성이라는 종교

  1.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최근 글들을 거의 다 읽고 이전 글들로 역주행중이라 예전에 쓰셨던 글들에 종종 댓글을 남기게 될 듯 합니다. ㅍㅎㅎ

  2. 삼성을 종교로 규정해 보려면 그 종교 경험 부분이 좀 더 정리해 봐야 할텐데요. 궁극성, 전체성, 강렬함, 행위라는 요하임의 괜찮은 정의에 기대어 생각해 보자면 우재님의 부언처럼 종교적 경험이 될 만한 것은 매우 많습니다. 예컨대 대학 입학시의 경험, 그것도 소위 s대 같은 곳에 입학하게 된 어떤 학생들의 경험담을 보면 ‘매우’ 종교 경험적이라 할만 하지요.

    그런데, 이런 종교 경험은 반드시 그 사람의 변화, 정확하게는 아이덴티티의 변화를 가지고 온다고 봅니다. 그것이 영속적이거나 임시적이거나간에 말이죠. 삼성 직원들이 삼성을 갈구하고, 속하고, 빠져나오는 과정 중 그런 것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군요(다만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심각한 공황장애 상태가 된 사람 하나를 알긴 합니다만….). 아이덴티티의 변화는 또한 관점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하겠지요. 경제, 사회적 지옥(?)인 한국 사회에서 구원받은, 선택된 인간의 기분이 그런 경험과 수반하는 관점 변화라고 봐야 할까요?

    사실상 우재님이 말씀하신 삼성이라는 현상은 종교경험이 배제된 알맹이없는 종교, 즉 비판적 대상으로서의 종교의 모습에 아주 잘 들어맞는다고 보입니다. ‘종교경험’이라는 주관성, 그 개인 고유의 영역에 속하는 어떤 경험을 반복적으로 재창조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전수(전달)하고, 그것이 서로 같은가 다른가 비교-검증해보고, 다시 모여 그 경험을 확대시키고 더욱 확고한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여기서 기독교의 특색이 잘 드러남)이 사실은 그만큼의 인간의 불안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알맹이는 도망쳐나가 땅에 구르고 있는데 껍데기만 들고 있는 것이겠죠.

    물론 어떤 종교든, 기업이든 그 체계 속에는 그것이 처음 창조될 때의 그 의도가 감정적으로든, 지적인 형태로든 남아서 영향을 미치고 있겠지요. ‘기업은 이윤을 추구한다’는 것만이 기업의 속성은 아닐테고, 결국 관계하는 모든 사람, 모든 것들과의 연결 속에 어떤 정신, 에너지가 그런 시작을 만들어냈다고 할 때 그것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종교 경험으로 나타날 수도 있겠군요.

    종교(Religion)이라는 라틴 어원 그대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뭔가가 종교라고 했을 때, 인간이 기능화된 권력으로 대체되기 이전의 그 사람을 끌어당기는 정신,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련한 소리, 희미한 향기가 종교의 핵심이자 언어로 표현되기 어려운 어떤 경험이겠지요.

    그것이 권력을 자꾸 끌어모아 중력을 더해가는 그런 사악한 종교로서의 상황으로 변질된 지금,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 현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끌려들어가는 인간들의 메마른 영혼의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댓글이 좀 길었군요. 이건 뭐 다른 분 블로그에서 포스팅질이라니;; 그만큼 생각을 하게 만드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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