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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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로부터 시작된 대한민국의 각성은 5.16과 전씨의 독재로 잠시 멈추어서긴 했으되 단 한번도 멈춘적이 없다. 아니 그것은 멈출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다. 민중에게 기억이란 집단지성 따위가 아니라 거대한 시대정신으로 각인된다. 그리고 민중들 사이의 간극이 좁아지면 좁아질 수록, 네트워크가 강해지면 강해질 수록 권력은 민중의 눈치를 살피고 민중은 권력을 견제하는 그런 구조가 형성될 필연의 역사적 구조가 형성되어야 맞다.

이명박은 똑똑하다. 그가 똑똑한 것은 그저 우연은 아니다. 그는 이미 서울시장 재직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만큼 똑똑하다. 어차피 촛불이 타올랐다 한들 그것은 서울이라는 한정된 지리적 공간 안의 상황이었다. 이명박은 그러한 거센 반대를 두루 보아온 인물이다. 70만이 모인 촛불집회조차 그에겐 사과 한방으로 끝나는, 그래서 거의 모든 정책들을 겉으로만 사과하고 철회하면 되는 그런 의미밖에 안되는 것이다. 스스로가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착각으로 그는 끊임없이 밀어붙힌다. 인정한다. 그대는 진정한 불도져다.

촛불은 동력을 잃어간다. 무더운 여름에 휴가철에, 게다가 지속된 집회는 시민들을 지치게 했다. 교육감 선거는 시민들의 기대를 저버린 채 강남 아줌마들의 잔치로 끝나버렸고, YTN과 KBS는 이명박의 의지대로 하나씩 넘어가고 있다. 거리에서의 투쟁은 거리에서의 투쟁이라는 한계 속에 그렇게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의 반응은 분노라기보다는 당황스러움이다. 나조차도 당황스럽다. 이렇게 뻔뻔하게 대한민국을 철저히 말아먹으려는 시도를 진행하는 이 정부의 태도가 너무나 당황스러워서 할 말을 잃을 정도다. 결국 이러한 당황스러움의 기원은 이명박이라는 사람이 가진, 아니 어쩌면 그가 가진 철저한 위치에 있을 것이다.

국민은 앞으로 그를 선거로 심판하지 못한다. 정치인들은 폴 크루그먼의 말처럼 상위 20%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이거나, 적어도 선거에서만 서민을 대표하는 집단이다. 국회는 물론 시의원과 구의원, 그리고 정부조직 전부를 장악한 그는 ‘합법적 독재’를 수행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각성한 민중은 그 징조를 느낀 것이다. 그것은 단순하게는 국민을 기만한다는 논리로 표출되었고, 결국은 기나긴 촛불의 분노로 표현되었다. 그는 합법적 존재다. 법치주의의 갑옷을 입고 촛불을 폭력으로 규정하고 나면, 국민 건강권을 요구하는 촛불의 요구는 고려해볼 만한 하나의 사항쯤 되는 것일 뿐, 대통령에게 절박한 어떤 위협은 이미 아닌 것이다. 게다가 촛불이 반정부 시위로 변화되는 것은 오히려 그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촛불이 ‘변질’된 것이며 이를 ‘합법적’으로 탄압할 명분이 된다.

솔직히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우리 주변의 많은 어르신들이 ‘촛불집회 반대’와 ‘이명박 의심’이라는 구도에 놓여 계시다는 점이다. 그분들은 대통령에게 일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를 몰아내려 하는 촛불이 못마땅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말을 쳐들어먹지 않는 이명박을 욕하는 그런 분들이다. 이런 분들 중 상당수가 탄핵당시에 노무현을 도왔던 분들인 것이다. 조선의 왕정은 그 제도만 사라졌을 뿐, 여전히 이 땅의 문화적 양식은 왕정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왕의 지위는 민초들의 불만이 역치에 이르기전까지는 지켜주어야하는 어떤 고귀한 보석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촛불이 당황하는 이유는 하나다. 그것은 이명박의 ‘무반응’이다. 겉으로는 강경진압을 일삼고 언론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몰래 대운하를 파는 이 작자는 실상 소고기 문제를 들고 나온 촛불이 즐겁다. 그것에 대해서는 ‘무반응’으로 일관해도 국가적 혼란이 오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소고기 문제는 누누히 말하지만, 독재타도나 유신반대와 같은 국가를 흔들 정치적 이슈가 되기엔 턱도 없이 모자란 정당성을 가졌다. 그것을 지난 10년에 대한 반동으로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한 촛불은 당황스럽다. 이정도 했으면 반응이 나와야 하는데, 정부는 여전히 소고기를 미봉책으로 막아두고 다른 무모한 정책들을 밀어붙히고 있기 때문이다. 소고기를 정당성으로 들고 나온 시위대가 시위의 주제를 다양화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초기조건에서 결정 난 것이다. 국민들에게 이번 시위의 목표는 소고기다. 이명박에게도 시위대는 그가 이미 해결했다고 믿는 소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집단이다. 다른 주제를 펼치는 시위대는 변절한 것이며 법에 따라 심판할 정당성이 이명박에게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시위대에 대한 무반응은, YTN으로 피디수첩으로, KBS로 넘어가고 있지 않은가. 더이상 촛불은 소고기에 대한 것이 아니고, 따라서 촛불은 촛불이 아니다. 부시가 방한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타오르지 못한 촛불은 첫째, 영리한 이명박의 무반응이 불러온 결과이며 둘째, 정치적 이슈가 아닌 건강권을 들고 거리에 처음 나온 시위대가 자초한 결과다.

팃포탯이 단독으로 붙어서 만방으로 깨지는 전략이 하나 있다. 그 하나는 ‘무차별적으로 변절’하는 전략이고, 또 하나는 ‘무반응’ 전략이다. 상대의 전략에 맞추어 협동과 변절을 결정하는 팃포탯에게 ‘무반응’은 참으로 난감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재 이명박이 ‘소고기’에 무반응을 보이는 행위는 변절에 변절로 대응한 팃포탯의 시위대에게 치명적이다. 대국민 사과나 여타 그 어떤 협동의 제스츄어에도 춧불은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촛불은 끝없는 변절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의제가 다양화되면서 모든 곳에서 변절을 목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촛불이 처음부터 추구했던 ‘소고기’ 문제에 대해 이명박이 보이는 ‘무반응’은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존중받는다. 형식적이나마 이명박은 협동의 제스츄어를 취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촛불의 딜레마다. 계속된 역사의 흐름을 지켜가고 싶어하던 민중이 ‘소고기’라는 비정치적 사안에 갇혀 역사상 가장 악랄한 정부의 틀에 갇혔다. 혁명은 정당성의 싸움이다. ‘소고기’문제는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악랄한 정책들 중 가장 작은, 어쩌면 다른 것들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무시해도 좋았을 그런 정책이다. 공기업의 민영화가 진행된다면 광우병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을 그런 일이 생길 것이다. 현재 촛불을 무시하며 진행중인 언론장악은 서서히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입과 행동을 막을 무시무시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해서 ‘광우병 대책회의’라는 구호 아래 모여야 하는 것인지, ‘광우병’을 통해 이명박 정부를 심판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하는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소고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들을 잃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민중이 웹을 통해 단결하고 그것을 오프라인으로 끌고 나오는 값진 교훈을 배웠다고 믿는다. 자전거는 한번 배우면 절대 잊지 못한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동력을 충전해 둘 필요가 있다. 결국 계속된 반서민 정책들이 임계점에 다다르면, 모이는 법을 배운 민중은 이번엔 정권을 제대로 뒤집기 위해 일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제대로된 정당성으로, 이미 70만을 경험했기에 왠만한 시위엔 놀라지도 않을 이 뻔뻔한 쥐새끼의 가슴을 조를 심정으로 모여야 할 것이다.

이런 글을 쓰면 테러를 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도대체 소고기가 국민의 ‘불만’을 알리는 데 중요했다는 데에는 동의할 지언정, 이 악랄한 정부의 이 악랄한 정책들을 ‘심판’할 제대로된 명분은 아니었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소고기에 연연하기엔 이 거대한 악을 타도하기 위한 우리의 정당성의 역치가 너무나 크다. 여전히 촛불을 들고 계신 분들에게 죄송할 따름이다. 그러나 내 눈엔 소고기보다 중요한, 그래서 우리가 힘을 모아야 할 문제들이 너무나 많이 보이기 때문에. 5년의 교육이 공정택에 의해 망가지고 나면 30년후쯤엔 어이없는 사태가 더욱 많이 등장할 지 모른다. 나는 그것이 더욱 두렵다.

7 thoughts on “촛불의 딜레마

  1. 아… 오늘도 무척 더운데, 참 시원한 글 잘 읽었습니다.

  2. 비밀글입니다. :)
    윗 분 말씀처럼 시원하게 글 잘써주셨네요.

    사소한 착오..(인 것 같아서요)

    광우병 대책회의.
    공정택의 임기는 1년 10개월입니다. ^ ^;

  3. 글 잘 읽었습니다.
    팃포탯을 이런 식으로 현실에 적용해 볼 수도 있군요.
    농담입니다만, 그렇다면 명박은 진화의 도도한 흐름에서마저
    비켜나 있는 초울트라 반다윈주의자겠군요. ^^
    하긴 서울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기도를 하신 강남 교회 장로님이시니…

    삶의 경제적 조건(물적 토대)이 사람의 전부를 규정하지는 못하더라도
    상당 부분을 규정하는 건 맞는 듯합니다.
    그런 점에선 마르크스가 부분적 진리를 얘기한 것이 맞겠지요.
    그런데 명박은 마르크스만으로는 도무지 해석이 안 되는 인간입니다.
    심리적 요소까지도 고려를 해야 불완전한 대로 전반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까 싶고요.

    굳이 철 지난 지 오래인 마르크스 얘길 꺼낸 까닭은…
    상위 10%에 해당하는 위인들의 속물적(실로!) 멘탈리티를 감지하게 될 때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거부감, 또 그로 인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슬슬
    피어오르는 맹렬한 분노를 근래 제법 징~하게 반복 학습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나아가 그런 속물들이 학문이 뭔지도 모르면서 학문 한다고 설쳐대며
    학문을 자신의 지적 허영심과 맞바꾸려 들 때, 자신의 능력 부족과
    자질 부족을 학계의 무능과 엄숙주의와 부패 탓으로 돌리면서 자신이 무슨 대단한
    학문적 순수성을 지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꼬락서니를 지켜보고 있을 때 울컥 화가 치밀기 때문이지요.

    학문에 순수가 어디 있나요? 다 잡종이지. 요즘 정통으로 인정받는
    분자생물학도 처음엔 잡종 교배로 탄생한 것이 아닙니까?
    다 섞이면서, 선생님 쓰신 글처럼 술 마시고 놀고 어울리면서 생겨난 것이지요.
    공부의 엄숙주의에 사로잡힌 속물들을 경멸합니다.
    전공 바보들의 순수 혈통주의 추구를 경멸합니다.
    좀 해 보다가 아니면 말고 식의 무사안일주의를 개무시합니다.
    언제나 아니다 싶으면 돌아가 숨어버릴 안전한 항구가 있어
    학문을 취미 활동쯤으로 여기는, 지가 아마추어인지도 모르면서
    프로인 척하는, 문맥도 제대로 안 통하는 문장 갈겨대면서
    쪽~팔린 줄도 반성할 줄도 모르는 유한마담 언니들이 제일 짜증납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와서 분풀이 하고 갑니다. 헐~
    무례를 용서하시길.

  4.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부자들만을 위한 정책을 쏟아내면서도 그것이 진정 국가를 위한다는 위선적 발언에도 그저 맥없이 바라만 봐야 하는 현실이 절망스럽고 무척이나 당황스럽습니다. 신명나는 대한민국 언제나 찾아올지 걱정이 앞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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