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제국으로의 역습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 본 비행기는 제국의 LA행이었고, 지금까지 나가본 외국 여행도 모두가 미국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몸소 몸으로 체험해 본 외국이라는 이미지는 모조리 미국의 그것뿐이다. 서부로 3번, 동부로 1번의 여행을 했으니 미국에 오래 살아본 사람들만큼은 못되겠으나, 그래도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만은 어느정도의 체득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처음 제국에 발을 디뎠을 때는 복학을 앞둔 20대의 창창한 나이였다. 처음으로 나가보는 외국행에 마음이 들떠 있었던 것 같다. 지루한 비행기 여행을 마치고 도착한 LAX는 크고 단촐하고 또 삼엄했다. 뭔지 모를 기대감과 또 타지에서의 두려움으로 묘한 감정선이 교차하던 나날이었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참으로 묘한 경험을 했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떠난 여행이라 가뜩이나 형편이 좋지 않은 부모님께 효도한답시고 한국 사람들과는 말도 안하던 시절이었다. 덕분에 아랍 친구들로부터 ‘형제’소리까지 들으며 밥이며 술까지 얻어 먹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친구가 늦은 밤에 편의점에 다녀오다가 흑인들에게 강도를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학센터의 스태프들은 되도록이면 밤에 나가지 말라는 주의를 다시금 당부했고, 들뜬 마음에 들리지 않았던 첫날의 경고는 현실이 되었다. 차가 없던 나로서는 생활권이 좁아질 수 밖에 없었다. 밤이 되면 심심함에 몸부림을 쳐야했고, 결국 두어달이 지난 후에 차를 가진 한국 복학생 그룹에 끼고 나서야 생활권을 조금 넓힐 수 있었다.

서울처럼 밤에도 별다른 위험없이 나도아 다닐 수 있는 대도시가 세계에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다녀본 미국의 대도시들은 밤이면 공동화라는 현상을 겪는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도심 외곽에 거주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밤에 차도 없이 도심을 배회한다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에 가깝다. 뉴욕처럼 서울과 비슷한 곳도 관광객이 많은 몇몇 섹터를 제외하고는 위험하다는 것이 통념이다. 미국의 밤은 두려움이고 왠지 모를 공포감이다.

분명 모두가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텐데도, 낮이면 다시 활기를 찾는 그곳에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그 어두운 밤을 잊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로 태어나서 참 부끄러웠다. 내 주위의 많은 여자들과 남자들이 미국에 그리도 살고 싶다는데, 나는 그 밤이 못내 두려워, 미국에 살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 포기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뉴욕이라는 곳은 더더욱 재미있는 도시였다. 낮의 뉴욕은 활기차고 건강한 도시처럼 보인다. 금융가는 바쁜 걸음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회사원들과 사업가들로 분주하고, 택시의 경적소리와 관광객들로 도시는 활기차다. 하지만 도대체 그런 이상한 현상을 나만 본 것인지, 아니면 소위 단일민족이라는, 아니 적어도 피부색은 같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뉴욕은 색깔 천들의 누더기를 기운 모양처럼 생겼음을 곧 알 수 있다. 주의 깊게 보지 못하면 그저 그렇게 지나칠 수 있겠으나, 맨하탄에서 브롱스의 양키스 스타디움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타본 사람이라면, 할렘을 지나는 그 노선에서 사람의 피부색이 흰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하는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차이나 타운에서 몇 블럭을 걷다보면 리틀 이태리가 나오고, 또 조금 걷다 보면 한인타운이 나온다. 어느 사회학자가 수학 모형을 적용해서 뉴욕의 인종별 밀집 지역 분표를 예측해봤다고 하던데, 겉으로는 인종차별이 철폐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여전히 미국이라는 사회는 인종의 박물관이고 또 실험장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하긴 이태원이나 부산의 특정 지역에 외국인들이 몰리는 현상도,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특정 지역에 밀집해 사는 우리나라의 현실도, 곧 우리가 미국과 같은 문제에 시달리게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는 듯 하다. 적어도 총기소지가 자유롭지 않아서 그 어두움 속에서 살기를 느끼지는 못하겠지만, 우리도 미국 사회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그런 인종의 장벽을 마주칠 운명에 처해진 것 같다.

그 세번의 미국 여행은 내가 공공연히 나는 절대 미국으로 포닥을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장담을 하게 했던 경험이었고, 일종의 선언의 배후였다. 하지만 정당화를 할 여지도 없이 나는 다시 제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개인적인 이유가,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지만, 변명의 여지는 없다. 고전강독회의 후배들에게 군국주의가 사라진 지금, 미국에 의한 문화적/경제적 종속은 일제 시대의 그것과 다를 바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50년 후의 역사는 분명 우리의 지금을 그리 기록하리라는 것을 외치던 나는 할말이 하나도 없다. 분명 나는 제국의 중심으로 떠나려 하고 있고, 또 그 곳에서 무엇인가를 배우고 또 이뤄야만 한다.

이런 갈등 속에 어쩌면 누군가는 과감히 미국으로의 유학을 포기하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내겐 다시 취업을 알아 볼 여유도, 용기도 없다. 어제 친형과의 논쟁에서, 지금의 우리가, 아니 미국이 일제의 그것과 같은 존재인가에 대한 반박으로 뜨거웠던 나는,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과연 미국은, 제국은 50년 후의 역사에서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 것인가를.

그 전쟁의 참화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진 침략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경찰관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이중적 잣대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다시금 묻게 된다. 나의 신념이 옳기를 바라고 또 바라마지 않지만, 지금의 이 현실이 일제의 그것과 같이 심각한 정도의 것인지에 대한 객관적 자료를 입력시킬 수 없다면, 나의 신념도 무가치한 것이다. 그리고 나의 형이 이야기한 것처럼, 무조건적인 반대와 네거티브한 반대보다는 그 비판정신과 의식을 가슴에 담고, 세상을 뚫고 나가려는 의지, 그것을 담고 싶다. 단 한푼의 자본도 없이 성공을 향해 달리는, 김구를 존경하며 절충주의와 실용주의를 안고 사는 형의 말에 나는 무조건 반대할 힘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이 땅을 사는 민중들의 현주소요, 평범한 사람들의 철학이라면 그것조차 보듬고 감싸야할 필연성이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비록 헐리우드의 영화일지라도, 데스 스타의 한가운데로 뛰어들던 그 반군의 파일럿들처럼, 스스로 마인드 트레이닝을 해본다. 제다이가 되었으면 좋겠지만 내게 그만한 미디클로리안은 없는 듯 하고, 일제시대 동경대학으로 유학갔다 온 그 친일의 선조들처럼, 미국으로 유학갔다온 후 친미주의자가 되어버린 우리네 전세대의 교수님들처럼은 되지 말아야 겠다는 다짐 후에야 비행기에 탑승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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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렵고, 부끄럽고, 또 슬프다. 과학만을 생각할 것이고 또 그래야 한다. 실험과 독서와 글쓰기가 내 모든 생활이 될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그렇게 3년, 무엇인가 완숙할 나이가 되어있을 그 무렵에는 다시금 도약할 계기를 마련하고 싶다.

21 Comments

  1. 얼마 전부터 눈팅하고 있었는데, 댓글은 이제야 다는군요. 과학철학쪽을 좀 파볼까 싶었는데, 크게 도움되는 글들이 있어 감사했습니다. 무사하시고, 필요한 것들만 얻길 바라겠습니다.

  2. 저도 그동안 계속 눈팅만 하다가 처음으로 댓글 달아 봅니다. 정든 강아지도 보내시고… 주변정리를 시작하신 건가요, 아쉽습니다. 미국은 언제쯤 가시는지요… 배울 것도 많고 여쭤볼 것도 많은데, 곧 떠나신다니 제 마음이 다 싱숭생숭 하네요. 미국 가시더라도 이 블로그는 계속 되는 거죠…

  3. 뭔가 비장하기까지 하네요.
    먼 유학길 잘 다녀오시고 비행기 타기전에 다짐하시는 것 잘되길 빌겠습니다.

  4. “미국으로 유학갔다온 후 친미주의자가 되어버린 우리네 전세대의 교수님들처럼은 되지 말아야 겠다는 다짐 후에야 비행기에 탑승할 일이다.”

    좋은 일만 있으시길!

  5. 굉장히 해박하신 분이시네요.
    왜 님같으신 분이 한글로 이런곳에다 포스팅을 하시는지 이해가 가질않습니다.
    미국에서 이런글을 영어로 영어권사람들과 얘기하세요
    전공도 블로그도 큰물에서 노시길

  6. 마틴 스코세스 감독의 After Hours를 보면 김우재님이 묘사한 그 상황이 에피소드로 나옵니다. 백인 주인공이 지하철을 타고 가는 데 난데없이 옆에 앉아 있던 다른 백인이 마술을 보여준다며 카드마술을 보여줍니다. 그리고는 멍하게 있는 주인공에게 다른 마술을 보여주겠다고 하며 “이번 역에서 승객들의 인종이 바뀔 겁니다”하며 내려버리죠. 그리고 거짓말 같이 인종구성이 바뀝니다. 🙂

  7. 자신을 하나의 테두리 안에 너무 가두시는게 아닌지…스스로 변화를 선택하는게 최우선이겠지만 선택되어진 현실을 선입관없이 발전시켜 나가는것도 최선의 차선책이라 생각합니다. 더 넓어지시고 밝아지시길 바라며…화이팅!!!

  8. 남들보다 더한 이놈의 증오가 어찌 생기게 된 것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으흑

  9. 영어로도 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도 이땅에서 태어나 이땅의 언어로 뭔가 해보고는 싶습니다.

  10. 그동안 덧글 없이 눈팅만 했습니다. 제국으로의 역습을 기대합니다. 또한 미국 유학생활 속에서 올리시게 될 좋은 글을 기대합니다.

  11. 자주 들러서 댓글 남겨주세요. ^^ 좋은글의 어포던스가 된답니다. 똔방님의 블로그도 잘 구독하고 있습니다/ ^^

  12. 커밍아웃이 이어지는군요, 책 정말 잘 보겠습니다. 배우기도 많이 배우고 신세를 많이 졌네요. 언제 기회되면 제가 담배라도 사 부치죠…

  13. 새벽이 오기전에 어둠이 짙다고 했습니다. 제국을 넘어서러면 제국의 약점을 속속들이 알아야 하는것 아닐까요? 아닌게 아니라 한국이 요즘 IMF, WTO, FTA 교과과정을 거치며 미국식 자본주의를 열심히 배우고 있는데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걱정입니다. 소기의 목적 이루고 잘 다녀오시기를….

  14. 미국이 좀 더 눈에 띄게 나쁜(…) 짓을 해서 그렇지 공부를 한다고 외국에 나간다면 어딜 가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기왕 가시는 것 쳐낼 것은 쳐내고 필요한 것만 쏙쏙 체득하시기를.

    근디 전 다른 것 다 제쳐 놓고라도 과하게 쓸모에 집착하는 듯한 미국 과학계보단 헛소리도 좀 하는 것 같은 유럽 과학계가 더 맘에 들더군요. 하하.

  15. 우리는 산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16. 그래서 제가 유럽으로 가려하지 않았겠습니까. ㅜㅠ 개인 사정때문에 그만. 흑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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