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나는 적응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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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새로운 집단에 속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처음 듣는 이야기는 그 집단에 대한 좋은 이야기들이 아닌 듯 하다(물론 종교집단은 예외다). 그 집단에 먼저 속해 있었던 이들은 일반적으로 집단이 가진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마련이고, 아마도 그것은 신참에겐 일종의 공포로 다가오게 된다. 이런 일들을 해결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냥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에라! 세상에 쉬운 게 어디있어?”. 문제는 내가 그렇게 간단하게 사태를 해결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다.

신참들이 고참들로부터 안 좋은 이야기를 듣게 되는 배경은 그 고참이 누구냐에 따라 나누어 분석이 가능하다. 해당 집단에 적응하지 못한 고참은 당연히 그 집단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을 늘어놓을 가능성이 높다. 반명 해당 집단에 적응한 고참은 신참을 깔보기 일쑤이므로 보통 아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거나, 자신의 성공기를 포장하며 엄청난 장벽이 존재함을 신참에게 일깨워주기 마련이다. 어느 경우에나 신참이 고참으로부터 동화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기엔 무리가 따르는 셈이다.

문제는 적응에 있다. 한 집단의 구성원이 해당 집단에 속하게 될 때 그는 적응할 것을 강요받는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집단의 관습과 제도는 신참에게는 따라야 할 하나의 법규가 된다. 법은 일반인들이 바꾸기엔 힘든 성역으로 다가온다. 신참은 적응해야 할 뿐 별다른 방안을 찾지 못한다.

자연은 선택하고 살아남은 개체는 적응했다고 말한다. 자연선택은 진화의 힘을 오로지 자연에 부과함으로서 유기체에 수동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문제는 그 선택하는 자연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데에 있다. 선택의 주체인 자연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봄으로서 우리는 새로운 사실을 만나게 된다.

선택하는 자연은 선택당하는 개체로부터 동떨어진 객관적 관찰자가 아니다. 홀로 우주 외곽에 존재하며 인간을 조종하는 하얀 수염의 할아버지가 가진 이미지가 자연선택에 그려져 있다면 그것은 서구의 사상적 기반으로부터 유래된 잘못된 이미지다. 선택하는 자연은 선택당하는 개체들과 한 세상에 공존하는 존재다. 자연은 구름 저편에 존재하는 할아버지가 아니다. 이 말은 자연이 비록 선택하지만 개체가 선택당하고 있지만은 않다는 엄연한 사실을 일깨워 준다.

리쳐드 르원틴이 일련의 저작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 했던 사실 중의 하나는, 유기체가 선택당하는 자연을 변화시키는 능력이었다. 대기와 무기물과 같은 무생물권이 자연의 전부는 아니다. 자연은 유기체를 포함한 모든 것의 총체다. 유기체는 자신이 속한 환경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비록 그러한 능력이 화산폭발이나 기후변화와 같은 자연의 변화보다 거대한 힘은 아니지만, 비버는 댐을 만들고 지렁이는 토양의 질을 변화시킨다. 따라서 자연은 유기체에 의해 변화된 속성을 포함한 어떤 거대한 총체다. 따라서 자연이 선택한다 할 때 그 자연은 유기체에 의해 변화된 자연의 속성을 포함하는 실체다. 그것이 자연과 유기체간의 피드포워드 고리를 형성한다.

유기체는 자연을 바꾸고 그렇게 변화된 자연이 유기체를 선택한다. 그렇게 형성된 고리는 하나의 회로를 구성하고 따라서 진화의 역사엔 가속이 붙게 된다. 유기체는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서 스스로를 선택할 수 있다. 아마도 그러한 능력을 극단까지 몰아붙힌 종이 인간이 아닐까 한다. 인간은 문명을 건설함으로서 거대한 자연선택에 제동을 걸었다. 제동을 걸었을 뿐 아니라 아예 자연선택에서 벗어난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언젠가 다가오게 될 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인류는 대규모의 전염병으로부터 안전하고, 유전형에 의해 나타난 표현형으로 짝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렇게 인류는 자연을 변화시킴으로서, 즉 스스로의 주변에 거대한 울타리를 만드는 것으로 선택에서 벗어났다.

그런 종이 인간이다. 문제는 인류라는 거대한 집단의 차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명, 자연의 파괴라는 이미지로 이러한 측면을 잘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일상생활에서는 이를 적용할 줄 모른다는 데에 있다. 인류의 특징이 환경을 변화시켜 선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면, 인류의 일원은 누구나 그러한 특징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인류는 자연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인류에 적응시키고 있다. 인간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집단을 자신에게 적응시키는 것은 가능하다.

물론 최초에 집단에 적응하는 과정은 집단을 자신에게 적응시키기 위한 과정에 필수적이다. 대한민국 사람이 되려 한다면서 한국어를 할 줄 모른다면 그는 대한민국을 변화시킬 수 없다. 문제는 그 이후다. 언젠가는 적응하는 것을 멈추고 주위를 스스로에게 적응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환경은 언제나 개체에게 온순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실상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이미 통속적인 드라마의 모든 주인공들은 스스로가 속한 집단을 변화시키는 것이 주인공이 해야할 일임을 우리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아오시마는 경찰서를 변화시켰고, 기무라 토쿠야는 히어로라는 드라마에서 검찰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왜 현실은 그러하면 안된다는 것인가. 현실은 그보다 복잡하고 잔인해서 우리는 절대 집단을 변화시킬 수 없으리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매우 합당한 소리로 들리는 모양이다. 문제는 하나의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생명의 역사는 환경과의 투쟁의 역사이며, 그 생명체들은 수동적인 선택을 그저 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 게다가 인간이라는 종은 그러한 투쟁의 역사를 극단까지 몰고간 위대한 종이라는 그 사실이다.

안되면 되게 하고, 없으면 만든다. 문제는 그 조율을 어떤 수준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있지, 단순히 집단이 우리를 선택한다는 수동적인 사고에 있지 않다.  개인이 세계를 바꾸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작은 집단이라면 우리는 언제고 희망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이곳 실험실에서 그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해볼 가치가 있다. 더 이상 시체가 되어버린, 적응에 실패한, 수동적인 사고의 한국인들에게서 그 무엇도 듣지 않을 것이다.

  1. 토쿠야가 아니고 타쿠야~

    샌프란시스코의 하늘은 어떤가요?

    아무래도 김우재 씨가 저보다 일본 드라마를 많이 본 것 같네요 -_-;;

  2. 새로운 글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나 모르겠네요…^^

    이글이 말하는 대상이 변방의 일인지 제국의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의미심장 합니다.
    부디 굳게 나아가시기를….

  3. 잘 지냅니다. 감기기운이 조금 있었지만 이제 다 나았습니다. ^^ 감사합니다.

  4. 비장하군요, 홧팅입니다.

    히어로와 춤추는 대수사선 모두 재미나게 본 영화에요.
    개인적으로 아오시마 역의 오다 유지 좋아해요 ㅎㅎ

  5.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항상 듣는 이야기. ‘원래 그래’ 태초부터 그랬다는 듯 태연하게 순응해버리는 생물들과 살 부딪히며 살자니 죽갔습니다. 그래서 자꾸 골방에 숨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좋은 글 잘 읽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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