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세속화 그리고 건강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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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원인은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제공된다. 따라서 생물학의 주제에 대한 “왜?”라는 질문에는 두 가지 답변이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한 가지 질문은 계통발생(Phylogeny)과 관련되며 이를 궁극인(Ultimate Causation)이라고 부른다. 또 한가지 질문은 개체발생(Ontogeny)과 관련되며 이를
근접인(Proximate Causation)이라고 부른다. 에른스트 마이어에 의해 유명해진 이 두 구분은 실상 진화론적 방법론과 생리학적 방법론의 차이로 구분될 때 가장 알기 편하다(이 용어가 수입될 때 궁극인과 근접인으로 사용되었으므로 궁극인을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고 해서 ‘근인’이라고 사용하면 혼선이 올 수 있다).


윌리암 콜맨의 책
<Biology in the nineteenth century:
Problems of Form, Function, and Transformation>는 세 장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형상(Form), 기능(Function), 그리고 변화(Transformation)다. 콜맨의 탁월한 분석은 생물학자들의 관심사를 세 가지 주제로 명료하게 정리했다는 데에 있다. 콜맨의 분류를 편의상 재분류하자면, 기능은 근접인에, 변화는 궁극인에 대비된다. 이 말은 기능에 대한 관심은 생리학에, 변화에 대한 관심은 진화학에 대비된다는 말과 같다. 생리학과 진화학 모두 분자생물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각 분과의 전통적인 관심사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생리학적 전통에서는 근접인에 만족하고, 진화학적 전통에서는 궁극인에 만족한다. 이러한 전통이 깨어지고 있다는 것은 각 진영에서 관심사를 공유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굳이 이 합성을 분석하자면 생리학 진영이 진화학의 전통을 분자생물학적 도구로 흡수해 나간 역사다. 이러한 역사에 대해서는 나의 글, <분자 전쟁> 및 기타 다른 블로그의 글들을 참고하면 된다. 형상(Form)은 최근에야 조우를 시작한 발생학과 진화학의 만남(Evo-Devo)을 대변하는데 이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지만 훗날을 기약하자.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복잡한 측면이 많이 존재하겠지만, 간단하게 과학에 대해 개괄해 보자. 과학은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 ‘이론’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전한다. 이 두가지 요소 중 과학을 다른 학문들과 차별 짓는 특징은 측정량이다.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이란 데이터의 신뢰를 위한 두 가지 조건을 의미한다. 첫째, 재생산 가능성이란 데이터가 시공을 초월해 재현된다는 신뢰를 뜻한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측정한 데이터는 다른 실험실에서도, 몇백년이 지난 후에도 조건만 같다면 재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측정량의 방점은 ‘양’에 있다. 과학의 역사는 자연을 양화하려는 과학자들의 역사와 같다. 양화된 데이터만이 높은 신뢰도를 가진다. 이 두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데이터들을 측정량이라고 부른다. 측정량은 과학자들이 이론을 세우는 데 필요한 건축자재들과 같다.


측정량이 과학의 양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반면, 이론은 과학의 질적 측면을 보여준다. 양화된 데이터들만을 가지고는 과학이라고 부를 수 없다. 과학은 여러 데이터들로부터 보이는 사실들로부터 패턴을 읽고 그것을 이론으로 일반화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에서 이론이라는 것은 과학의 질적 측면을 대변한다. 같은 데이터들로부터 다른 이론을 구축하는 것이 가능하다. 측정량은 사회적 영향에 민감하지 않지만, 이론은 민감하다. 따라서 과학의 이론적 측면만을 가지고 과학의 사회구성주의를 논하는 자들은 과학의 실제 모습에 무지한 자들이다.


신뢰도가 높은 측정량을 얻는 방법은 도구의 종류에 따라 두가지로 나뉠 수 있다. 그것은 ‘분석적 도구’와 ‘조작적 도구’로 분류된다. 분석적 도구로 가자 널리 사용되는 것이 수학이다. 조작적 도구는 일반적으로 실험을 의미한다. 두가지 도구 모두 이론을 건설하는 데에 사용되는 측정량을 얻어내지만 분석적 도구는 주로 이론 위주의 과학분과에, 조작적 도구는 주로 실험 위주의 과학분과에서 널리 사용된다.


뉴턴이 아인슈타인과 양자역학에 의해 죽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과학의 로망은 인과적 설명에 있다. 결과는 자연에서 보이는 다양한 현상들이다. 원인은 그 현상의 배후에 숨어 있는 법칙이다. 일반적으로 자연 현상의 인과관계는 분석도구인 수학이 아니라 조작도구인 실험에 의해 잘 포착된다. 그것은 실험의 우월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이 좀 더 확실한 측정량을 통해 확실한 인과관계를 밝히는 데 효과적이라는 뜻이다. 실험이 불가능한 여러 자연 현상들(예를 들어 천문학이나 사회학)에서는 수학이 측정량을 얻는 분석도구로 사용될 수 밖에 없다.


과학의 세속화 역사는 이론이 측정량에 의해 제한받는 과정을 의미한다. 종교로부터 과학의 세속화는 이론으로부터 측정량으로의 세속화의 일부다. 이론은 과학의 질적 측면이므로 가치와 연관되어 있다. 측정량은 과학의 양적 측면이므로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이론과 측정량은 언제나 상호작용한다. 과학의 세속화는 이론이 측정량을 지배하던 시대로부터 이론이 측정량에 제한받는 시대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종교적 세속화는 질적 측면이 강한 교리와 이념이 양적 측면이 강한 과학적 증거들을 지배하던 시대로부터 교리와 이념이 과학적 증거들에 ‘제한’ 받는 시대로의 이행을 뜻하므로 앞에서 설명한 이론과 측정량의 상호작용으로 본 세속화의 일부에 불과하다.


방점은 ‘제한’에 있다. 이론이 측정량을 지배하던 시대는 과학에 있어서도 불행한 시대였다. 이론에 반하는 측정량들이 숨을 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질적 측면이 양적 측면을 지배하는 곳은 언제나 불행하다. 결국 양적 측면이 질적 측면을 압도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의 두뇌가 장기적으로는 양적인 것들에 신뢰를 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략은 진화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효과적이다. 한 개체가 자신의 평생동안 변하지 않는 사실에 기반해 살아가는 것은 그 개체의 생존력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양적인 것들은 거의 언제나 일정하다. 질적인 것들은 언제나 변화무쌍하다. 따라서 우리가 사실이라 할 때에는 그곳에 반드시 양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고, 가치라 할 때에는 질적 측면이 숨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변하지 않는 양적 사실들에 신뢰를 보내는 우리의 두뇌가 가진 전략은 진화적으로 보존된 것이다. 따라서 가끔은 양적 신뢰가 거의 전무한 종교나 이념이 사회를 지배할 수 있다 해도, 결국은 그 역사로부터 비롯된 역사적 사실들(이 사실들은 꾸준히 반복되므로 양적 측면을 가진다)로부터 무너지게 된다.


방점이 ‘제한’이라는 단어에 있는 이유는, 측정량이 이론을 지배하는 사회도 똑같이 불행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는 모든 것을 양적인 사실들로 해결하려 하기 때문에 유동적이지 못하다(확실한 증거가 있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결정도 하지 않는 사회를 상상해 보라. 그런 사회에서는 어떤 모험적인 혁신도 불가능하다. 이론이 과학에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그 모험성 때문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양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론이 측정량에 제한 받는 것만이 적절한 조화가 된다. 이론이 측정량에 제한 받음으로서 이론은 제 맘대로 폭발할 수 없고, 측정량은 꾸준히 양적 사실들을 축적함으로서 제 할일을 다 할 수 있다. 이론의 질적 측면은 조직을 유연하게 만들어 주고, 측정량의 양적 측면은 조직을 견고하게 만들어 준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 종교와 세속화의 문제, 무신론이 결국 다시 또 다른 종교가 되는 문제, 이념이 종교화되는 문제, 과학과 예술의 차이, 인문학을 제한하는 측정량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 등이 모두 이러한 틀 안에서 해결될 수 있다.

+덧붙힘: 이러한 과학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틀은 착한왕 이상하 박사의 고안이며 위에 쓴 글은 그의 이론에 대한 나의 해석적 변주다.

+예고: 다음 글에서는 ‘암탉은 왜 무정란을 낳을까?’ 라는 주제로 근접인과 궁극인에 대한 문제를 풀어보기로 하겠다.

9 thoughts on “과학의 세속화 그리고 건강한 사회

  1. 무정란의 이유는 물고기의 체외수정을 보면 대충 그 맥락을 찾을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닭 이외의 조류도 무정란을 낳나요?

  2.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제발, 제발 링크된 콜맨의 책 서문이라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구글신께서 친히 제공하고 계시거든요.

  3. 잘 읽었습니다. 김우재님도 도킨스씨 처럼 책이라도 하나 쓰심이 어떠한지요

  4. 어떤 분이 링크 걸어 주셔서 들어왔습니다.

    열심히 읽고 공부해보겠습니다 : )

  5. 우재님께서는 측정량이 시공을 초월해서 몇 백년이 지난후에도 같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이 말이 와닿지 않네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측정에도 실험자의 해석이 있지않을까요? 측정 역시 실험자가 눈금을 읽는 행위가 있기때문이죠. 그렇다면 해석하는 행위가 실험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에 시공을 초월해 몇 백년이 지나도 같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실험 결과가 일정함은 다음 두 가지가 일정하다면 결과가 일정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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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실험 조건이 일정하고
    2. 측정값을 읽는 해석 행위 역시 일정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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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해석 행위의 일정함은 기하학적 합동에 의해서 보장받습니다. 뭔말이냐면, 눈금의 모양과 간격은 같은 모양과 같은 간격이죠. 이같은 기초로 해석 행위의 논리를 규정할 수 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저울의 0점 조절은 양쪽이 같아야한다는 규정에서 나온 측정 방법입니다. 결론적으로 불변의 측정량이라도 실험자의 시공을 초월하진 못하다는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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