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래의 비극과 근시안적 감정주의



이미 다른 글에서 밝힌 바 있듯이, 이공계 기피현상에 대한 우리 정부의 해결책은 이 땅에 널리 퍼져 있는 근시안적 감정주의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비단 이공계 기피 현상만이 아니다. 가깝게는 매년 되풀이되는 홍수에 대한 대책으로부터, 정권이 반복될 때마다 계속되는 교육정책의 다이나믹함은 모조리 근시안적 감정주의의 발로라고 볼 수 밖에 없는 비극들이다.

해미래라는 잠수정이 있다. 작년 여름에 동해 바다에서 심해자원을 찾겠다는 야심찬 포부로 시작된 6000m급 잠수정 사업으로 탄생한 무인 잠수정이다. 한겨례에 실린 해미래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자.

해미래는 지난해 5월 개발된 6000m급 심해 무인잠수정으로, 그해 10월 울릉분지에서 해저 2026m까지 들어가 동판 태극기를
설치했다. 또 11월에는 서태평양 필리핀해 아래 577 깊이에서 약 3시간 동안 탐색활동을 벌여 성능이 확인됐다.
6000m급이면 전세계 바다의 98%를 탐색할 수 있다.

한겨례는 해미래의 가능성을 이렇게 타진했다.

동해에서 가장 깊은 곳은 울릉도와 독도 사이로 최고 수심이 2500m다. 이 잠수정들이 완성되면 우리나라도 동해 전 지역을 우리 잠수정으로 샅샅이 뒤지는 본격적인 해저 탐사 시대를 맞을 것으로 기대된다.

독도에 대한 관심으로 나라가 뜨거운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은 단기적인 대처가 아닌, 중장기적이고 신중한 고려들이어야 한다. 대마도의 영토권 주장으로 맞불을 놓자던 나의 주장이 감정적인 격앙이었음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 감정적인 주장의 이면에는 지긋지긋한 이 사슬을 끊으려는 장기적인 대책의 필요성이 놓여 있다. 적어도 우리의 땅이라면 일본보다는 그 땅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독도의 심해에 대해 아는 것은 일본이 아는 것보다 적다. 자신의 땅을 돌보지 않는 나라에게 누가 동정심을 가지겠는가.

사실 해미래를 가지고 벌인 사업들 중 울릉도 심해에 동판 태극기를 설치한 일도, 근시안적 대처라는 나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동판 태극기 하나로 무엇이 바뀌지는 않는다. 물론 상징적인 의미가 남겠지만, 그것은 심도 있는 연구나 내실 있는 자료 조사가 선행 된 이후에나 할 일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런 것이 아니다.

문제는 나름 웅장하게 시작한 해미래 사업이 정작 예산부족으로 해미래를 운반할 선박을 구하지 못해 생생한 잠수정 한대를 썩히고 있다는 코미디에 있다. 도대체 어떻게 예산을 책정해 두었기에 정작 독도 문제로 해미래가 필요한 시점에 쓸 돈이 없다는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동판 설치에 돈을 너무 많이 들인 탓인지도 모르고, 겉만 화려하고 번지르르한 우리네 정책이 가진 한계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잠수정의 잠자도 모르는 이들이 한두번의 쇼를 위해 근시안적으로 시작한 정책으로 해미래의 비극은 이미 시작된 것일테다.

정말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독도라는 외교적 이슈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적어도 심해자원이라는 경제학적 가치가 걸려 있는 사업이 이렇게 코미디처럼 운영된다면, 장기적인 신중함으로 결정되어야만 할 교육정책이나, 기초학문에 대한 지원사업들은 또 어떻게 진행될 것이란 말인가. 박세리가 골프여왕이 되자 아이들에게 골프를 가르치고, 박찬호가 메이져리그에 나가니 야구를 가르치고, 박지성이 맨체스터에 입성하니 축구를 가르치고 이제 박태환이 물개가 되니 수영을 가르치는 나라다(김연아도 있다. 참).

우왕좌왕하는 이 땅의 정서가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이름처럼 이 땅에 흐르는 문화적 정서라는 것을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적어도 그 반대급부로서의 견고한 정책이 뒷받침될 때에야 그러한 다이내믹함이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이론이 바뀌면 데이터의 ‘해석’이 변하는 것이지, 데이터 자체가 바뀌거나 추가되는 것은 아니다. 데이터를 추가하기 위해서는 이론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실험기기를 사들이고 새로운 장비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정부가 하는 짓들은 언제나 아주 쉬운 방식으로 이론을 바꿔치기 함으로서 대중의 시선을 속이는 짓이다. 그렇게 5년만 버티면 책임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 논의를 더 밀고 나가면 나는 보수의 논리를 어느 정도 수긍해야 할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장관을 바꿔버리는 풍토에 대해 난 문제가 많은 문화라고 생각한다. 이명박이 어떤 철학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시스템과 문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해미래의 비극을 야기한 원인은 간단하다. 추측하건데, 해미래를 만들 때에는 대중의 감정을 자극할 쇼를 위해 많은 돈을 책정했을 터이고, 해미래를 운영하고 유지하기 위한 예산은 쥐꼬리만큼 책정했던 것이다. 그것이 현재의 비극을 잉태했을 것임이 뻔하다. 도대체 이 땅에는 장기적인 고려가 없다. 아무리 역동성이 이 땅의 장점이라 할진데, 적어도 그 역동성이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탄탄한 중장기 정책들이 공존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론은 측정량의 제한 없이 날아다니고 결국 과학을 종교화시킨다. 마찬가지다. 중장기적 정책이 없는 역동성은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것이 ‘제한’이라는 의미가 가지는 함축이다.

덧붙힌다. 분명 이명박은 어청수와 강만수를 보호하기 위해 잦은 인사교체는 시스템을 해친다는 논리를 급조했을 것임이 뻔하다. 그 머리에서는 장기적인 대책 따위가 나올 리 없다.

7 thoughts on “해미래의 비극과 근시안적 감정주의

  1. 음… 해미래로 영화 한번 찍으려고 했더만…

  2. 핑백: keizie's me2DAY
  3. 잠깐만요. 우리가 일본보다 독도에 대해서 아는것이 적다는 진술의 팩트가 있나요? 일본 정치,로비력에 밀리는 현 정부에 세태를 보고 속단하신건 아니신지 궁금합니다. 그러나 글의 전체적인 논조는 매우 공감하네요.

  4. 방향만 잘 잡아주면 긍정적으로 분출될 수도 있는 에너지가 안에서 우왕좌왕하는 것이 안타깝네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근시안적이라기보다는 리더의 부재…쪽이 더 정확한 것 같아요.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이번에 런던가서 보니 선진국이라는게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천하의 바보라도 사람답게 살 권리를 보장해줄 수 있는 시스템과 리더가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나라가 꽤 잘 돌아가요.

  5. 김박사님
    사이언스타임스 미르이야기에 올려진 김박사님 사진이 전번 것보다 좋지 않던데요 ^^
    바꿔보심이 어떠하신지..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다음의 HTML 태그와 속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 <strike> <str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