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초파리의 귀환

분명 내게도 초파리를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최재천 교수의 실험실에 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내게 남은 선택은 사실 몇가지 없었다. 모교의 이준호 교수님 실험실에서 예쁜꼬마선충의 발생유전학을 연구하거나, 광주과기원의 아무 실험실에나 들어가거나 혹은 포항공대의 아무 실험실에나 들어가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문제는 나의 모교가 당시 김대중 정부에서 시작된 BK21 사업의 첫번째 발표에서 탈락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학기당 400만원이 넘는 등록금을 내기에는 당시 IMF로 어려워진 집안 사정이 고민이었다. 평소 인간적으로도, 과학자로서도 존경해 마지 않던 이교수님을 찾아간 것이 그 무렵이었다. 학부생으로서는 처음으로 술자리에서 독대를 하게 됐었고, 그 자리에서 그냥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BK21도 떨어진 마당에 비싼 등록금을 내며 대학원 공부를 교수님 실험실에서 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다고. 교수님이 나를 받고 싶어하셨다는 소문도 있었고 당신께서도 가끔 술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시곤 했지만 어쩌면 학부생으로서는 매우 건방진 발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할만큼 그분을 존경했고 또 존경한다.

아마도 그 자리에서 광주과기원 이야기가 나왔었다. 나는 분명 내 실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감히 카이스트나 포항공대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광주과기원을 낮게 평가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생학교였던 그 쪽이 학점도 별로 좋지 않던 내게는 쉬워보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사실 초파리를 연구하던 몇몇 교수님들을 눈여겨 보아두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단칼에 나의 그 제안을 거절하시던 이교수님 때문에 나는 부득불 포항공대로 전향해야만 했다. 만약 그 독대 자리가 없었다면 나는 분명 광주과기원의 어떤 실험실에서 초파리를 만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뭐가 잘된 것인지는 알수 없다. 다행히 유전학에는 경험이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생물학에서 가장 정량적이라는 분자생물학과 생화학에 정통하게 되었고, 여기서도 그 백그라운드는 꽤나 먹히는 밥줄이 된다.

유전학은 무섭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흰눈 초파리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 흰눈 초파리를 정상(붉은 눈) 초파리와 교배시키면 정확히 교과서에서 보던 성연관 유전이 실현된다. 조금 복잡하지만 설명하자면 이렇다. 모간이 발견한 이 초파리는 white라고 불린다. 이 돌연변이를 유도하는 유전자도 White라고 불리는데 이 유전자가 있으면 눈이 붉은 색이 된다. 없으면 흰색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문제는 이 유전자가 성염색체인 X염색체에 있다는 것이다. 열성유전이라 상동염색체 중 하나에라도 정상 유전자가 있으면 눈은 붉은 색이다. 중요한 점은 초파리의 성결정 방식에 있다. 초파리의 성은 X 염색체의 숫자로 결정된다. 초파리도 Y염색체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별다른 유전자도 없고 특히나 성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XX는 암컷, XY는 수컷으로 인간과 같다. 하지만 가끔 attached X라는 X염색체 두개가 붙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에 생기는 XXY는 수컷이 아니라 암컷이다. 인간이라면 수컷일테지만. 이에 관해 많은 연구가 있었는데 결국 결론은 X나 Y의 숫자가 아니라 X와 상염색체(autosome) 세트의 비율에 의해 성이 결정된다는 것으로 났다. X:A가 1:1이면 암컷, 1:2면 수컷이다. 웃기는게 실험결과 3x:3도 암컷이고, 4X:4A도 결국은 암컷이라는 점이다. 이 비율이 1:3이나 2:3이 되면 초수컷, 혹은 초암컷이 나온다. 이 발견과정이 재미있을 듯 해서 나중에 좀 다뤄보려고 한다.

여하튼 유전학은 무섭다. 그리고 초파리는 더욱 무섭다. 알에서 깨어나 성충이 되는데 단 10일이 걸린다. 10일이 지난 성충은 바로 교미에 돌입할 태세가 되어 있다. 지금 내 앞에서도 내 실험을 위해 초파리들이 열심히 교미중이다. 따라서 처녀(흔히 여기서는 virgin이라고 하는데)를 골라내는 것이 원하는 라인을 만들기 위한 관건이 된다. 자 그러면 처녀를 어떻게 고르느냐.

우선 집에 가기전에 바이알에서 성충을 모두 제거해버린다. 유지하는 다른 바이알이 있다면 과감히 죽인다. 초파리는 정말 무섭게 번식한다. 아침이 되면 막 깨어 나온 초파리들을 이산화탄소로 기절시킨 뒤에 현미경 아래서 붓으로 살살 뒤집어 본다. 수컷은 수정관이 있어서 꽁무니에 뭐가 튀어나와 있다. 수컷은 과감히 죽인다. 수컷은 언제든 어디서나 얻을 수 있는 값싼 물건이다. 조심스레 우유빛으로 빛나는 암컷들을 쓸어 담는다. 거의 12시간 정도는 처녀 초파리가 교미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자주자주 처녀를 골라내주는 작업을 해야 한다.

초파리 유전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그 괴이한 문자들과 기호들에 기가 질리게 마련이다. 나도 그랬다. 알고 나면 간단한데 처음엔 기가 좀 질린다. 기호보다 더 어려운 건 마커들을 구분하는 일이다. 암수를 구분하는 것은 금방 익숙해지는데, 털길이나 몸길이 등의 마커로 돌연변이를 따라가는 과정은 좀 어렵다. 물론 익숙해 지면 이만큼 강력한 방법도 없다. 마커가 가리키는 지점에 내가 원하는 유전자가 항상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해보아도, 예전에 이준호 교수님이 했던 말이 진리다. 유전학은 강하다. 언젠가는 반드시 해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초파리는 더욱 강력하다. 도대체 이 조그만 생물로 무엇을 할 수 없다는 것인지 알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 머리속은 이 조그만 생물로 테스트해볼 실험들로 가득차 있다. 행복한 일이다.

대통령이 쥐로 비유되는 마당에 쥐를 모델 동물로 택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아마도 내 손에 오는 쥐들은 무사하지 못했을 것 같다.

19 Comments

  1. 심각하게 읽어 내려오다 …
    끝에 쓰여진 글로 웃습니다
    전공 열심히 하시고… 이나라의 든든한 그 무엇이 되소서^^

  2. 우리는 쥐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영웅을 잃어버린 것이군요….^^;

  3. 대통령 별명이 왜 쥐인가요 ?

  4. 학부시절 저도 처녀초파리골라내고.. 약물먹여서 변형초파리만들어내고……PCR sequencing 노던 써던……
    지금은 애 셋낳고 살면서도 과일주변에 몰려드는 초파리보면 그냥 반가울때가있고
    날아가는 초파리보면서 숫컷 암컷 구별하게되는 몹쓸병은 죽을때까지 갖고가게될듯..
    ….
    한때 전 쥐를 이용해서도 실험했었는데 지금같아선 보기도 싫을듯..
    암튼
    열공~하삼.

  5. 저랑 동일분야.. 전 쥐가지고 실험을 많이 하는데 요즘은 거의 살려두지 않습니다.

    쥐새끼는 실험하는 족족 죽이기로 결심… ㅎㅎ

  6. 고등학교 때 생물 시간에 유전학에 대해서 정말 재미있게 듣고 흥미가 있었는데^^
    정말 유익하고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ㅎㅎㅎ
    그리고 마지막 문장!!
    정말 센스있으시네요 ㅎㅎㅎㅎㅎㅎ

  7. 헐..그냥 지나가다가 재밌을것같아서 읽었는데…
    마지막 문장 센스대박입니다..ㅋㅋ

  8. 저도 포공에서 초파리를 animal model로 연구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포공에서는 초파리 다루는 사람이 없는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어디 랩에 계신지 궁금하네요. 초파리 관련해서 하는사람이 없으니 외로웠는데ㅎ_ㅎ,

    이러저러한 정보를 교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ㅎ

  9. 아 ㅡ 성함을 이제야 봤습니다. 장승기교수님 랩에 있었고 얼마전에 졸업했으며 PBG에 계셨었던 분이시네요ㅎ. 이름은 많이 들어왔습니다. 다음 블로거뉴스에 메인으로 뜨길래 재밌어서 들어 왔다가 우연찮게 같은곳에 계셨던 분을 뵙게 되네요ㅎ. 앞으로도 좋은 연구 많이 하시길 바랍니다. 수고하세요ㅎ.

  10. 인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주시고 대한민국인 임을 꼭 기억해주세요.. 훌륭한 사람되어주세요.

  11. 노던 써든~~ㅋㅋㅋㅋ 기억이 세록하네요`ㅋ]
    자두 학부때 집에서 유전학실험땜에~~~초파리 기르고 날라가게하고 하던 기억이 나네요`~ㅋ^^ㅋㅋ

  12.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웃었네요

  13. 글은 잘 읽었습니다만, 한가지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군요.
    유전학을 하면 사람도 곤충취급을 하게 됩니까?
    인간도 수컷이 된다?
    유전학이 인간성 상실의 학문이었군요.

  14. 수컷이 왜 이상한건지 모르겠네요? 동물도 수컷이라 부르고 곤충도 수컷이라 부르고..사람도 남성을 여성들이 가끔 수컷이라 하는데 왜 이상할까요???

  15. 대통령이 쥐로 비유되는 마당에 쥐를 모델 동물로 택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아마도 내 손에 오는 쥐들은 무사하지 못했을 것 같다.

    이 한 마디로 대량 추천을 얻은 듯 합니다…

  16. ㅎㅎ 예전 여자친구한테 생일선물로 생일이 같은 애들이라며 초파리 알과 배양토(?)가 든 시험관을 받은 기억이-_-;; 처음에는 아무 것도 없었으나 초파리가 몇 마리 생기면서…시험관 안은 chaos…

  17. 수컷은 서럽습니다 ㅠ.ㅠ

    궁금한게.. 초파리의 무서운 번식력을 커버할만큼 완벽한
    모기장을 갖추고 작업을 하시는건가요?
    한넘이라도 탈출하면 실험실이 초파리로 우글우글 되는건 아닌가? 라는 망상을 해봅니다.

  18. 저도 유전학방에 있어서 초파리를 많이 봐왔습니다.
    나는 분자생물학이어서 학부 가르킬때 해본게 다였지만 오랜만에
    초파리 얘기를 들으니 새롭네요. 진학내용을 보니 98정도 되겠네요.
    암튼 앞으로도 좋은 결과 있기를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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