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프랑스 철학의 현주소

내가 쓴 글이 아니다. 아이츄판다님께서 근1년동안의 라캉주의자..라기보다는 거의 반미치광이들과 전투를 치르신 모양인데 그 글들 중 한 글의 댓글이다. 프랑스에서 철학을 전공하는 철학자분의 글인데 댓글로 남겨두기엔 아까운 맛이 있어 옮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내 글이 아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나은 법이다.


아효.. 오랜만에 다시 들어왔더니 다시 또 난리?가 났었네요.
예전에 아이추판다님의 판단에 적극 공감하면서 다만,
논 쟁에 참여하는 철학도들의 의견이 그렇게도 엇나는 것은 서로의 철학관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말과, 라깡은 결코 프랑스철학의 주류가 아니라는 변명 아닌 변명, 설명 아닌 설명을 길게 늘어놓았다가, 며칠후 덧글을 삭제하고 도망갔던 사람입니다.

“자기글 지우고 도망가기”라고 아이추판다님께서 쓰신 글을 보고 뒤통수가 뜨거워져서 덧글 남깁니다. 주인장님의 너그러운 용서를..

제 가 덧글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역할은 아이추판다님보다는 이 글을 읽게되는 다른 사람들에게, 철학도들이(특히 프랑스 철학도들이) 모두 라캉주의자들 같은 그런 “기본도 안 되는 잡놈들”은 아니라는 것과 라깡은 프랑스 철학의 주류도 아니고 사실 철학으로 대우받고 있는지 조차 의문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 의도에서 씌여진 글을 삭제했던 이유는 이미 끝난 논쟁이라 쓸 데 없는 짓이라는 판단과 글자체가 별로 잘 쓰여지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벌어진 상황을 보니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기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되는군요.

그때와 마찬가지로 저는 아이추판다님의 라깡에 대한 평가와 라깡주의자들에 대한 평가 모두에 대해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라깡은 사기 맞습니다. 그가 인용하는 과학은 은유가 아닙니다. 그 과학적 근거가 틀렸다면 그 철학은 무너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게 무너진 철학인데도 여전히 추종하는 것은 가장 나쁜 의미로서의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지젝주의자들은 옳다쿠나 하겠지요. 불쌍한 정신들입니다)
그러나 그 덧글 이후 새롭게 알게된 점도 있기는 합니다. 라깡의 과학부분을 송두리째 날려버리고 헤겔로부터 라깡에 접근하는 길이 있더군요. 물론 이 경우에 대해서 아이추판다님은 동의하지 못하실 테고,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 동의는 못할 지라도 그러한 해석의 시도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습니다. 다른 철학관이 있다는 것은 대개 인정하는 쪽이니까요. 이쪽 공부 경험 상, 그게 남는게 더 있습니다.

좀 더 다양하게 세분할 수 있겠지만, 철학을 바라보는 입장은 크게 두 형태로 구분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철학을 과학과 비슷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철학을 문학과 비슷하게 보느냐. 철학을 과학과 비슷하게 보는 쪽에서 중시하는 것은 진리로서의 답이라면, 문학과 비슷하게 보는 쪽은 진리를 찾는 문제제기 자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경우 새로운 문제를 제시함으로써, 혹은 문제를 새롭게 함으로써 인간 사유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이 철학의 가치겠습니다.라깡의 문제는 철학을 과학과 비슷한 것으로 보는체 하면서 그 내용은 사실 문학과 더 비슷하다는 것이겠죠. 라깡교도들의 문제는 물론 이보다는.. 무식 자체에 있습니다.

한 저명한 철학교수는 당대의 프랑스철학을 이렇게 평했습니다. “세 개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있다. 맑시즘, 구조주의, 그리고 라깡주의”. 그리고 그가 여기서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맹목적 신앙과 거의 같은 의미입니다.
이 제 시대가 흘러서 구조주의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라깡주의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라깡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라는 말은(정신분석가라면 모를까)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비전문가의 말이니 무시하시고요.. 그러나 여전히 변치 않고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라깡주의자들의 태도군요. 이미 68년의 상황을 기록한 에세이에서 라깡과 그의 제자들은 ‘검은 옷을 입은 사제들’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간단히 아이추판다님께서는 지금 사이비 종교집단의 추종자들과 대립하고 계십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미친 사람들이죠. 방법은 한 가지겠습니다. 무시하는 것. 아이추판다님께서 어떤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신다고 하셔도 이들에게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일년 내내 경험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위로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합니다

1. 라깡의 실험은 은유가 아니다
2. 라깡의 실험이 사기라면, 그 실험에 기반해서 세운 그의 모든 철학은 버려져야한다
3. 그러나 이건 철학관의 차이에 따라 여지가 있을 수 있다
4. 그러나 아무리 여지를 남긴다해도, 라깡을 과학에 기반한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5. 라깡이 한국에 소개된 것이 영문학을 통해서라는 것은 사실 당연하다
6. 라깡은 과학에 가까운 철학이기보다는 문학에 가까운 철학(?)이다(개인적으로는 철학에 가까운 문학이라 생각한다)
7. 라깡은 프랑스에서 유명하기는 하지만 아직 학계에서 인정받은 철학자는 아니다 (이때 ‘인정’의 기준은 대학 강의와 아그레가시옹 시험 출제 여부다. 라깡은 내가 아는 한 오직 파리 8대학에서만 강의된다)
8. 라깡주의자들-주로 국문과생이라 추정되는 당신들- 라깡을 추종한다면 우선 라깡부터 읽어라 (개인적인 바램은 이 바쁜 세월에 그런거 읽지말라는 것이지만..)
9. 읽고도 라깡을 추종하게 되었다면, 그 신앙 변치 않기를 바란다 (종교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한 숭고할 수 있다, 다만 진정한 종교는 언제나 조용하다)
10. 광신도의 난장에 고생하신 아이추판다님께 위로의 말과, 무단 덧글 삭제에 대해 다시 사과의 말을..

읽으실지 모르겠지만 프랑스 유학을 갔다 오신 분으로 알고 있기에 몇가지 묻고 싶습니다.프랑스 사상(철학,사회과학 등)을 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권 학계의 비주류를 통해서 정보를 얻을 텐데, 그러한 정보와 현재 프랑스에서 논의되는 주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나요? 님께서 라깡이나 지젝같은 라깡주의자들은 주류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우리 나라에 소개되는 바디우같은 철학자들을 보면 라깡이 여전히 주요 논의대상인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에 소개되는 프랑스 철학과 프랑스 현지의 철학활동 사이에 의미있는 차이가 있다면 꼭 라깡이 아니라도 거기에 대해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초면에 너무 어려운 부탁들 드린 게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다만 남의 블로그에서 이런 글을 쓰는 게 조금 그렇군요.

한마디로 전혀 다릅니다.
프 랑스 현대 철학의 주된 흐름은 1. 현상학, 2. 과학철학(영미 과학철학하고는 다릅니다)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철학쪽은 제가 잘 몰라서 뺐습니다) 다만 최근 몇 년 사이, 새로운 흐름은 훗설과 하이데거의 영향에서 벗어나 프랑스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되찾자는 움직임으로 베르그송에 대한 논의가 두드러지게 활발해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즉 베르그송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러한 논의도 아직은 1과 2의 흐름에 포함된다고 보아야지 독립된 흐름을 구성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형편이라고 저는 판단합니다.
이 두 흐름 중 프랑스의 현상학은 레비나스와 메를로-뽕띠, 리쾨르 등을 통해 한국에 많이 알려진 편입니다만, 2의 흐름은 거의 소개된 바 없습니다. (바슐라르조차 과학철학자가 아니라 몽상의 미학자로 알려져 있는 마당이니..) 그러나 위의 두 흐름 중 1은 독일로부터 수입된 것이고, 보다 프랑스철학 전통에 부합하는 흐름을 고르라면 당연히 2번 입니다. 데까르뜨를 시작으로 꽁디악 등의 17세기 유물론자들을 지나 18세기 멘 드 비랑의 실증주의적 유심론까지.. 분명 멘 드 비랑에서 단절은 이루어지지만 그 철학적 방법에서 실증성을 중시하는 전통은 베르그송에까지 변함없이 이어집니다. 실제로 이 계열의 철학자들은 철학자인 동시에 자연과학자이거나 의사, 수학자, 심리학자(물론 현재의 정의와는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이거나 그에 준하는 전문가들이었습니다.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이러한 전통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령 과학철학을 특화하고 있는 7대학의 경우, 철학 박사를 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의 M2(한국으로 치면 박사 코스웍 과정)을 이수하는 것을 필수로 하고 있습니다.

이 두 주된 흐름에서 한국에서 유행한 들뢰즈나 라깡, 데리다 등의 이름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데리다의 경우는 현상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간단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은 (그런게 있지도 않았지만서도) 주된 흐름을 형성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사정이니, 프랑스 현대 철학을 전공하겠다는 학생들이 처음 맞게 되는 어려움은 지도교수를 선정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들뢰즈나 라깡을 전공한 교수가 없다는 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르그송의 경우도 그를 전공하고 대학에 자리잡고 있는 사람은 파리 내에는 없는 실정입니다만 그를 중심적으로 연구한 교수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널리 알려진 철학자들 중, 위에 제시된 흐름에 속하는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 레비나스나 메를로-뽕띠를 제외한 다른 철학자들의 경우, 전공한 교수가 없는 것은 물론 그 사람들은 중심적으로 연구하고 논의하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비판적이든 우호적이든 그들의 연구를 연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가령 들뢰즈의 경우, 들뢰즈를 전공한 대학교수는 전무하고 그를 중심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도 제가 아는 한 뚤루즈의 몽떼벨로가 유일합니다. (물론 8대학에서는 합니다. 그러나 8대학은 예외로 생각하고 말씀드리고 있고 그 이유는 8대학의 역사에 대해 찾아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한 국에 알려진 철학자들 중 오직 예외가 있다면 푸코입니다. 그는 이미 대가의 반열에 들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대학에서 강의도 쉽게 접할 수 있고, 철학뿐만이 아니라 사회학에서도 폭넓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막강합니다.

들뢰즈는 라깡 등이 대학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이유를 프랑스 학계의 전형적인 느림 탓으로 말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분명 타당한 측면도 있지만 이미 레비나스와 푸코와 같은 비교 대상이 있습니다. 왜 그들은 학계에 주된 문제로 자리잡았는데 들뢰즈와 라깡은 아닐까요?
바 디우를 말씀하셨는데, 마침 어제인가 신문에 소개된 글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랑제꼴의 강의를 묘사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던데.. 그랑제꼴에서 강의하는 것은 사실 교수로서 명예입니다. 그러나 바디우가 하는 강의는 그랑제꼴에서 이루어지는 ‘대중강연’입니다. 다양한 연령층의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모여서 듣는다고 말하지만, 여기서 정작 중요한 것은 그 강의에 그랑제꼴과 다른 학교의 철학도들은 빠져있다는 점입니다. 앉아 있는 철학도가 있다면 그들은 십중팔구 한국과 일본의 유학생들입니다.
바디우에 대한 평가는 8대학 출신의 제자들과 동료들에게만 인용되는 8대학의 종이 호랑이입니다.

물 론 프랑스에서도 바디우나 들뢰즈 데리다 라깡 등은 유명합니다. 책도 많이 팔립니다. 그러나 철학자들에 의해 별로 깊이 전문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분명 당대의 유명한, 주목 받는 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지금도 많습니다. 당대가 끝난 후 살아남느냐가 중요하겠지요. 적어도 그들은 프랑스 학계에서는 반죽음 상태입니다. 적어도 현재 상태는 그렇습니다. 그들에 대한 박사 논문은 외국인들, 특히 들뢰즈의 경우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이 주로 씁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다른 당대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었는가. 저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영문학에서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것. 그리고 미국이 주목하는 한, 세계가 주목하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것. 특히 한국과 일본 같은 미국의 반식민지에서 미국의 주목에 주목하는 것은 또한 자연스럽다는 것. 실제로 한국에 라깡을 들여온 것은 경희대 영문과 권택영선생이었다는 점.

여 기에 출판이라는 자본의 문제가 관련되어 한국과 프랑스의 간극을 더 크게 벌려 놓았겠지요. 세상에! 플라톤 전집도 없는 나라에 이미 들뢰즈의 전집이 발간되었습니다. 프랑스 철학의 유행을 따라 프랑스의 별 시시콜콜한 철학자들까지 쓰레기 번역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프랑스 철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프랑스 철학 전공인 제가 생각해도 과하고, 전공자로서 판단할 때 정작 중요한 저서들은 빠진 채 편향되어있어서 프랑스 철학 전체가 심하게 왜곡되어있습니다.
또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권력의 문제가 상황을 더 극단적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즉 서울대의 파워입니다. 서울대 김상환 선생이 연구하고 다루니 라깡이나 들뢰즈의 인기는 나날이 번창하여 끝내 라깡을 모르면 막장이라는 막장발언까지.. (물론 김상환 선생 개인의 능력, 특히 글쓰기 능력도 분명 큰 역할일 것입니다만)
사실 대중적 인기 만큼 프랑스 철학을 강의하는 대학들은 많지 않아서, 한국의 대학 정규과정에서 들뢰즈나 라깡을 접하는 것은- 최근에는 좀 달라졌지만-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국의 철학과는 하이데거 아니면 칸트인데 이렇게 많은 라깡주의자들이 있다니, 이 블로그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보며 솔직히 놀랐습니다. 그러나 곧 이유를 알게 되더군요. 이 프랑스 철학의 추종자들은 대개 철학 전공자들이 아니라 문학전공자들입니다. 말한 대로 한국의 철학과에서 프랑스 철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고, 특히 라깡은 제가 알기로 진태원 선생과 김석 선생이 귀국하기 이전까지 강의된 적 조차 없습니다. 철학과에서 운영되는 세미나 커리큘럼에서 라깡을 다룬다는 말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학교 국문과든 그 과의 세미나 커미큘럼에는 지젝이 있고 라깡이 있더군요. 도대체 번역서도 없는 마당에 뭘 읽는 것인가 싶기는 하지만..
이 런 대중적 인기는 악순환을 형성합니다. 유행에 따라 프랑스로 유학와서 들뢰즈로 혹은 바디우로 학위 따서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당연히 한국에서는 들뢰즈를 강의하겠지요. 사람들에게 프랑스철학은 들뢰즈로 각인됩니다. 들뢰즈 따위 볼 필요도 없다는 말이나, 들뢰즈로 학위 따 오신 분들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전공의 편향에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고, 조금 더 나가면 이런 검증되지 않은 철학의 전공자가 지나치게 많다는 점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아.. 쓰다 보니 한 맺힌 게 많아 두서 없이, 하염 없이 길어졌네요.
아이추판다님께 또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1. 아직 세밀하게 분석되지 않은 직관 수준의 이야기지만 푸코는 지가 좋아하는 니체보다 훨씬 더 서술적 접근에 능수능란한 듯 하다는.. 비슷한 주제를 다룬 홉스나 비코의 저술이 아무래도 니체의 저술보다 훨씬 더 명료하고 더욱 더 서술적인 접근으로 볼 수 있는 것 같은데, 제자가 스승으로 뫼시는 사람의 명예 회복을 위해 그것들과 맞장뜰 수 있는 고전이 될 수 있는 작업들을 한 것 같군요.

  2. 아마추어판다님 글 링크가 http://nullmodel.egloos.com/page/2 로 걸려있는데 이 주소는 “두번째 페이지의 글”이라는 뜻이라서 아마추어판다님이 새 글을 올리면 엉뚱한 글로 링크가 됩니다(블로그 특성상 두번째 페이지라는 것은 항상 바뀌니까요). 그래서 http://nullmodel.egloos.com/1864171 이런 식의 바뀌지 않는 주소을 걸어주시는게 좋아요. 특히 우재님이 쓰시는 종류의 글들은 시간이 좀 오래 지나서도 읽힐 가능성이 높으니까 이런 부분에 신경을 써주시면 좋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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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우훗, 재밋는 읽을거리를 제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4. 진태원 선생님이 제가 있는 연구원의 교수로 계시는데요, 작년 초 워크숍에서 프랑스에서 라깡이나 데리다, 지젝 등은 정규 과정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거리의 철학자라고 하자, 문학 특히 현대문학 하시는 분들이 아우성 웅성웅성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군요 ㅎㅎ 그나저나 요새 블로그 지식인들의 작태에 살짝 기분이 상해 계신거 같네요..;;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블로그도 사회처럼 갈리고 대립하고 그러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5. 그렇게 대립하는 시대가 지금보다는 차라리 나을 것 같습니다. 논쟁이 없이는 학문의 성장이 없으니까요. 문제는 제대로된 논쟁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차라리 블로그는 낫습니다. 학자들이 논쟁을 안하는 게 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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