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조선을 정량화하라

역사적 사건과 현실이 우연히 겹쳐보일 때가 있다. 그런 일은 부지기수로 일어나며 성급한 역사학도들이 쉬이 저지르는 실수이기도 하다.
하지만 국내의 역사학계는 장난으로라도 이러한 일에 지극히 보수적이다. 따라서 역사를 현실에 적용하는 일은 거의 정치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듯 하다. 신복룡 교수[footnote]신복룡 교수의 글들은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이 KBS의 <한국사전>을 비롯해 <역사추적>등의 시리즈물의 소재가 되었다. 특히 그는 이러한 해석들이 기고된 신문의 에세이들은 그것이 논문으로 모두 출판한 후에 이루어졌다. 그는 학자다. 이 후의 글에서 다룰 도올의 학자적 양심에 관한 이야기에서 신복룡 교수 베끼기는 언급하지 않겠다. 짐작은 가는데 물증을 찾기 귀찮기 때문이다.[/footnote]를 비롯한 많은 정치학자들[footnote]몇 년전에 아주 우연히 신나게 읽어댔던 한 정치학자이면서 유교와 정치사상을 연결시키던 정치학자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는 도올보다 아랫세대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도올에 대해 호의적이었고 자주 도올을 언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footnote]은 역사학자와 정치학자의 경계에서 보수적인 국내사학계가 내뱉지 못하는 말들을 시원하게 토해내곤 한다. 역사의 정치적 적용 뿐 아니라 국내사학계는 ‘일반화’에 지나치리만큼 인색하다. 엄청나게 고집스런 학자들이 모여 있기 때문인지, 한국의
역사학계가 지닌 보수성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역사학계에서 ‘일반화’된 사고를 엿보기는 정말 힘든 일이다.[footnote]사실 정수일이라는 위대한 학자가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그의 학문이 국내산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그가 한국사학자는 아니다. 그는 간첩이었고 그의 학문적 연원은 오히려 북한의 것이라고 해야 맞을지 모른다. 그의 <고대문명교류사>는 감옥에서 저술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대작 중의 대작이다. [/footnote] 그나마 국내학계의 경향에 대해 매우 무지한 역사학 초보의 입장에서 이러한 일반화 시도는 정수일 교수에게서 거의 유일하게 맛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연륜 때문인지, 아니면 성향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고대문명교류사10점
정수일 지음/사계절출판사

 

씰크로드학10점
정수일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문명 교류사 연구10점
정수일 지음/사계절출판사

정두희 교수는 1996년 <인문연구논집>에 실린 <歐美에서의 한국사 연구의 경향>[footnote]정두희, “歐美에서의 한국사연구의 경향,” 歐美韓國學硏究의 傾向과 評價 , 인문연구논집 23 (서울: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1996), 정두희 교수의 저술들 중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은 이후 도올에 대한 다른 글에서 언급하도록 한다. 정두희 교수는 이외에도 북한역사학계에 대한 저서 <하나의 역사, 두개의 역사학>을 펴냈다. 꾸준한 학자시다. [/footnote]이라는 논문에서 서구학자들의 특징 중 하나로 이러한 일반화를 들고 있다.


하나의 특징은 이들이 한국의 전통사회를 매우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연구주제가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분야에 한정되어 있어도 반드시 자신의 결론을 전후의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하여 일반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일반화는 학문적 성취도가 높은 곳에서는 일반적인 일이다. 특히 학문에서의 거시적 관점 혹은 일반화가 거의 보이지 않는 대한민국
학계에서 일반화가 일반화되어있는 서구의 학문적 성취가 지속적으로 수입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학문적 식민성은 어쩌면 서구학계와
한국학계의 이러한 성향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학은 몰라도[footnote]서구학계의 이러한 성향이 과학의 전통과 맞닿아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잘모르겠다. 하지만 언제나 이론을 세우고 일반화를 추구하는 경향은 과학이 가진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footnote]
적어도 이 땅에서 인문학은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나름의 전통이 세워지고 학문적 성취가 이루어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고
본다. 문제는 지나치게 겸손하거나 혹은 서구학계의 위용에 기죽은 국내 학계의 풍토다. 게다가 정두희 교수의 글은 서양사나
서양철학이 아닌 ‘구미에서의 한국사 연구’에 관한 것이다. 도대체 왜 우리는 한국사 연구에서조차도 서구학자들의 일반화를 쳐다보고
있어야만 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감히 말하건데 적어도 한국사 연구에 있어서 이 땅의 학자들은 부끄러울 것 없는
성취를 지니고 있다. 과감히 일반화를 시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도 이론을 만들고 이론을 수출해도 좋을 분야가 바로
한국사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의 한국사연구10점
정두희/국학자료원

에드워드 와그너의 조선 이해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10점
에드워드 와그너 지음, 이훈상.손숙경 옮김/일조각

에드워드 와그너(Edward Wagner)는 구미의 한국사 연구에서 독보적인 학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조선초기 사림에 관한 연구>[footnote]제대로 삼천포인 것은 이 글의 시초가 조선시대 당쟁이나 사화를 한국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야의 싸움질과 비교해보려는 오래된 생각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footnote]는 국내학자들의 해석을 전면으로 반박하며 등장했다.  와그너 교수의 주저인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이 번역되어 있으므로 그의 사고에 관해서는 앞으로 많은 논의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국역서적을 사보기도 힘들고, 전공도 아닌 분야에 대해 지나치게 깊은 독서를 하기도 어려운 실정에서 내가 기댈 수 있는 방법은 좋은 논문을 몇 편 골라 읽는 것 뿐이다. 와그너 교수의 국역논문 한편[footnote]李組 士林問題에 관한 再檢討 (The Re-examination of the Nature of the so-called Salim(士林) Group of Early Yi Dynasty Korea)
Wagner, Edward W. (全北史學, Vol.4 No.-, [1980]). 영어를 읽는 데에는 익숙해도 작문엔 도통 서툰 우리네 현실과 한국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의 현실도 별반 다를 바는 없는 듯 하다. 와그너 교수의 논문은 한국어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원광대학교 사학과 송준호 교수에 의해 국역된 것이다.[/footnote]과 정두희 교수의 논문을 건질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논문은 존댓말로 되어 있다. 외국학자의 한국사 연구에 비판적인 국내학계를 겨냥해 그렇게 국역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존댓말로 된 논문을 읽는 일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논문은 국내사학계의 사림에 대한 대표저인 인식을 보여주는 논문 두 편을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결론은 국내학계의 사림에 대한 인식은 사림이 삼사를 권력의 중심으로 한 조선의 신흥 정치세력이었다는 점과,
이들의 출신성분 및 사상적 경향을 중심으로 한 논의가 대표적이라는 것이다[footnote]사림에 관한 간략하지는 않지만 명료한 정리는 초록불님의 글 <당쟁에 대한 간략한 정리>를 볼 것. http://orumi.egloos.com/2194753[/footnote]. 결국 존대로 시작했으면서도 이 글은 매우 과격한 문제의식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러나 본인은, 솔직히 말씀드려, 이 견해에 대하여 매우 의의적입니다. 우선 그 사림이니 사림파니 사림세력이니 신진사류니 또는 그
밖의 비슷한 용어들이 개념의 명확한 규정이 없이 너무도 애매하게 그리고 너무도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림에
관한 오늘날의 일반적인 견해가 과연 확고한 연구 토대 위에서 성립된 것인지 그 점이 의심스럽습니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사림에
관한 여러 가지 기본적인 문제가 먼저 충분히 해명되어야만 비로소 이조사에서의 그 위치와 의미를 정확하게 리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의 문제의식은 간명하다. 국내학계의 사림에 대한 인식은 확고한 토대도 없이 훈구대 사림이라는 구도속에서 무턱대고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다. 그는 사림이라는 개념을 마구 사용하기 이전에 해명되어야 할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한다.

첫째는 당초 이조시대에 사림이라는 말이 어떻게, 또는 어떠한 역사적 상황하에서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또 구체적으로 어떤 개인 또는
집단이 사림이라는 용어로써 지칭되었던가 하는 문제입니다. 둘째는 왜 사림이라는 말이 쓰이게 되었는가, 다시 말하면, 어떤 개인
또는 집단이 사림이라고 지칭되었을 때 그들이 어떠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셋째는, 아마도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만, 사림의 구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즉 사림을 형성하고 있는 개개인의 출신지역이나 사회적 배경등이
어떠한 것이었던가 하는 문제입니다.

첫 번째 문제제기는 사림이라는 무리가 사화라는 사건 속에서 사림을 탄압했던 이들과 출신성분이나 사회적 배경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들을 탄압했던 훈구파와 다를 바 없다는 분석으로 끝난다.

여기에서 우리는, 소위 기묘인들이 출신지역이라는 관점에서 보나, 또는 사회적 배경이라는 차원에서 보더라도 그들이 당시의 중앙관계의
다른 집단(물론 기묘인들을 탄압한 바로 그 세력도 포함해서)들과 구별될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결논에 도달하게
됩니다.

중략

이상에서
본인이 주장하려고 하는 요지는, “사림”이란 용어는 이조 초기에 대단히중요했던 한 사상연동의 성격을 기술하는 데에 있어서는
유용한 용어가 될지는 모르나, 이 말로써 이조 지배층의 구성적인 측면을 설명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거의 무희미한 일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조 정계는 사림이 지배하였다”라는 주장은 무의미합니다.

현재의 사학계에서 이러한 문제가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림이라는 세력이 훈구파와 대립되는 시골촌뜨기가 아리나는 점에 대한 문제의식은 국내에서도 이제 보편화되어가고 있는 듯 하다[footnote]모기불님의 글만 봐도 그런 낌새를 느낄 수 있다.[/footnote]. 글은 뭔가 중간에 끊긴 듯 한 여운을 남기며 종결된다.

이상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은 이조 초기의 지배층이 오늘날 한국사학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얼마나 훨씬 더
동질적이었던가를 우리에게 말하여 주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조 지배층을 두 개의 이질적인 집단간의 상층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존재로서 다룰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일체적이요 지속적인 존재로서 다루는 것이 올바른 연구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보다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초기, 나아가 이후 조선역사 전체를 지배하는 사림의 형성은 훈구파라는
이질적인 집단과의 갈등관계를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와그너 교수의 연구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이러한
결론은 새로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사림을 시골의 서생으로 생각하던 이미지를 박살내게 된 계기를 얻기는 했지만
이러한 결론이 영감을 주는 것은 별로 없었다.

계량화, 측정량 그리고 과학과 역사학

오히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 그가 취한 ‘계량적 연구 방식’이다. 와그너 교수의 또 다른 논문의 제목은 <역사 자료로서의 한국 족보>[footnote]Wagner, Edward W. (人文科學硏究, Vol.- No.5, [1999])[/footnote]다. 스스로도 실패한 논문[footnote]나는 이 글에서 수많은 문제를 대답하지 못한채 남겨 놓았으며, 다른 많은 것들을 제기하는데도 실패한 점을 충분히 깨닫고 있다.[/footnote]이라고 토로한 이 논문은 사실상 전혀 실패한 논문이 아니다. 그의 족보 연구는 계량화된 토대 없이 단편적 사실들 속에 세워져 있던
한국사 연구에 대한 도전이며, 한국사 연구의 토대를 위한 혁신적인 방법론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또다시
미완으로 그쳤기는 하지만 위의 논문 <조선초기 사림에 관한 연구>에서 일관되게 빛을 발한다[footnote]물론 후자의 논문이 전자의 논문보다 20여년이나 뒤에 출판되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일관성 면에서 또 양화라는 확고한 토대를 통한 이론의 정립이라는 점에서 두 논문은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footnote]. 그는 이 짧은 논문의 결론을 위해 ‘문화 류’씨의 족보를 근거로 사용했다.

1979년에 귀중한 문헌자료 하나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것은 문화류씨 종친회에서 재간한 『문화류씨 세보』 가정판입니다.

도대체 이 족보가 왜 중요할까? 그것은 이 족보가 조선후기에 편찬된 족보들과는 달리 외조에 외조까지 기록할 정도로 광대한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족보가 편찬된 시기가 조선초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족보가 가지는 위력은 대단한 것이 된다.
대단하다는 표현은 부족하다. 왜냐하면 이 족보에 기록된 문과급제자가 성종~중종 70년 동안 배출된 문과급제자의 70%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footnote]이 지독한 양반계급사회의 씨족적 성격은 놀랍기 그지 없다.[/footnote]. 자세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논문은 급히 마무리되지만, 그 결론을 충분히 뒷받침할 정도다.

앞서 본인은 조광조에 의해서 설치된 현량과의 급제자 28명의 가족배경을 검토하였습니다만 그 검토에서 발견된
특징은 이 문화류씨 세보를 동해서 다시 한번 확인되는 것 같습니다. 위 28명 중 26명의 이름이 이 세보에 나옵니다. 또
기묘사화의 최초의 피해자 8명중 7명의 이름이 역시 이 세보에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지 앉는 나머지 한 사람은 김 인데 그러나
문과에 급제한 그의 백숙부중의 2명의 이름이 역시 이 족보에 나와 있습니다.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사묘사화가 시작된 후 얼마 안
되어서 징계대상으로 조광조 일파 35명의 명단이 작성된 적이 있는데 이 35명중 30명의 이름이 역시 이 문화류씨보에서
발견됩니다.

역사적 해석을 사건들의 편린들만으로 조합하는 연구를 넘어 계량화된 근거로 사건을 해석해 보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작고한 전북대의 송준호 교수와 함께 ‘와그너-송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조선시대 문과시험 급제자 1만4607명의 혼맥 및 인맥지도를 구축했다. 조선시대 지배계급의 성격과 이를 통해 500년이라는 장구한 기간동안 지속된 국가를 이해해보려 했던 와그너 교수의 연구는 족보의 연구를 통한 계량화 시도라는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한 사고로 인해 더욱 위대한 빛을 발한다. 그의 이러한 연구는 실제로 조선의 서북지방이 기존의 인식과는 다리 차별받지 않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내가 역사학 연구가 반드시 이러한 계량적 연구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인문학은 측정량에 기반을 두고 이론이라는 일반화를 시도하는 과학과 기본적인 성격에서 다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정량화의 끌개>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또 다른 글들(예를 들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 ‘과학의 세속화 그리고 건강한 사회‘)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야기한 바를 바탕으로 냉정히 평가하자면 정량화가 가능한 곳에서 정량화를 시도하지 않는 학문은 비겁한 것이다. 정량화가 불가능한 곳에서 정량화가 포기되는 것은 아니다. 정량화가 불가능한 곳에서 우리는 정량화를 꿈꾸는 것이다. 그리고 도구의 끝없는 진보는 그 꿈을 언젠가 실현시킨다. 그렇다고 이러한 주장이 모든 인문학이 자연과학으로 환원된다는 무지한 발언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footnote]이러한 주제에 관해서는 이미 블로그에서 자주 밝힌 바 있다. 예를 들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footnote] 인문학과 철학은 지금까지도 그래왔듯이 독자적인 영역을 가진 학문으로 남게 될 것이다. 문제는 자연과학이냐 인문학이냐를 떠나 주장의 근거를 어떻게 만들 것이냐 하는 점이다. 주장의 근거는 확실할 수록 좋다. 역사에 확실한 것이 없다면 합당한 것이 좋다. 합당한 것의 기준이 애매모호하다면 우리가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은 모든 방법론의 총동원이다.

국내사학계에 계량적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는 반박이 가능할 것이다. 역사학도가 아닌 나는 역사학계의 연구방법론 전부를 알만큼 박학치 못하다. 따라서 그러한 연구방법론이 사용된 연구를 소개해주는 역사학도의 조언에 고개를 숙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 국내에 그러한 연구가 소수가 아닌 다수에 의해 연구되고 있었다면 에드워드 와그너의 계량적 연구방법론에 대한 찬사를 버릴 작정이다[footnote]그는 무려 35년 동안 장장 10만여매에 이르는 개인신상카드를 작성했다. 와그너 교수의 논문 연구에 관한 논문 <와그너의 한국족보 연구>, 이희재 – 동양예학, 2004를 참고 할 것. 이 논문의 복사본을 인터넷에서 어렵게 찾을 수 있었다. 유용한 링크를 참고.[/footnote]. 아니 계량적 실증연구를 바탕으로 한 역사학 연구의 학풍 혹은 학파라도 있다면 나는 에드워드 와그너 따위는 언제든 잊을 준비가 되어 있다.

나의 국내 역사학계에 대한 무지를 제쳐두고라도, 와그너 교수의 연구 방법론에 대한 접근은 흥미롭지 않은가? 자연과학의 가장 큰 특징인 ‘정량화’가 그 자연과학이 탄생한 곳의 전통 속에서 자란 역사학자에 의해 펼쳐 진다는 것은, 비록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것일지라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아가 와그너 교수의 한국사에 대한 문제제기는 차치하고라도, 한 서양인 한국사학자의 연구방법론으로부터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과학의 전통과 문화적 전통이 어떠한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관한 일별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통섭’의 연구가 아닐까? 에드워드 윌슨의 개념을 빌려다 막무가내로 ‘인문학과 과학은 대화해야 한다’라고 외치는 그런 추상적이고 모호한 선동문구가 아니라, 적어도 우리만이 해볼 수 있는 그런 통섭, 그런 시도가 아닐까 싶다.

나는 인문학의 독자적 영역을 인정하면서도 연구대상을 정량화 할 수 있는 도구가 발견 혹은 개발되었을 때 주저하는 학문은 학문이라 부르고 싶지 않다. 그것은 ‘측정량’의 제한이 없는 자연과학이 이론의 독재에 의해 불행했던 과거를 알기 때문이고, ‘역사’ 혹은 ‘상식’의 제한이 없는 인문학이 신선이 되어 날아다니는 현재의 세태를 슬퍼하기 때문이다.


유용한 링크들


 

 

14 Comments

  1. 컴끄고 잘라 했띠만 엮인글이 눈에 확 들어오네요~ 히히
    좋은 정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좀 졸리기는 하지만..

    조선의 학문은 가학이었다죠, 혈연과 지연을 통해서 공부를 한거겠지요
    제가 조선의 역사인물을 공부하는 방법으로 주로 사용하는 게
    그 사람의 족보와 외가를 제일 먼저 캐보는 것입니다(컴검색을 통해).

    그럼 그 사람의 생각이나 정치적 성향이 대충 나오죠.. 물론 외가에 대해서는 선생님의 말씀대로 자료가 찾기 힘들어 본관만으로 대충 짐작할 뿐입니다. 예전에 퇴계학맥도라는 것을 보고서 저는 그만 입을 크게 벌리고 말았습니다. 역사공부에서 과학적 사고는 그 기본적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동의합니다. 좋은 밤 되소서~

  2. 늘상 깊이 있는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3. 좋은 내용 잘 보았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학자 중 신복룡 교수는 방법론에 굉장한 의심을 품고 있어서 전혀 신뢰하지 않고 있습니다.

    http://orumi.egloos.com/2686361

    이 포스팅을 참고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4. 추천하신 책 중에서 두 권을 구매했습니다. 문외한이지만 팬이 된 터라 … 🙂
    전과 마찬가지로 오타를 몇 개 발견했습니다. 주로 인용문에 많더군요.
    수정하시겠다면 장문이라 검색(Ctrl+F)해서 찾아야 할 듯 합니다.

    1) 대표저인
    2) 세보를 동해서
    3) 결논에 도달
    4) 인식과는 다리

  5. 신복룡 교수는 아무래도 정치학이 전공이다보니 엄밀한 역사학에는 조예가 없다는 것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신복룡 교수의 인터넷에 떠도는 글이 아니라 논문들을 읽어대던 때가 있었는데 강준만의 비판을 본적도 있습니다. 아마 강준만은 정치적인 비판을 했던 것 같습니다만.

    고구리는 잘못된 것 같네요. 그 잘못은 시인하지 않는다면 학자적 양심이 결여된 것일테고.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준다는 측면에서 저같은 문외한에게는 참 도움이 되는 학자입니다. 일반화의 부제라는 윗글의 의식속에서도 조명받을 만한 가치는 있을 듯 해요. 말씀 감사합니다.

  6. 최대한 좋은 책들만 골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 책을 고르셨는지요? 괜히 궁금하다는…오타는 곧 수정하겠습니다.

  7. 잘 읽었습니다. 역사학은 어쨌던 데이터를 가지고 하는 학문이니까 인문학 중에서도 계량화할 수 있는 여지가 제일 많을 것 같습니다. 문과급제자 1만여명의 혼맥 및 인맥 지도라니 대단하군요. 이 정도 연구는 보통 사회과학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여담입니다만 각주9번에 ‘모기불님’은 혹시 ‘초록불님’이 아닐런지요.

  8. new가 떠서 와보니 글이 2개나 올라와 있었군요
    아마 김추기경님 글은 놓친듯(RSS로 구독하는지라)
    방법론에 관한 이야기에서 느끼는 바가 크네요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9. 방법론을 차용하게 되면 한국사학계의 비약적 발전이 있을텐데 자존심 때문에 와그너의 연구가 무시되는 듯해서 걱정입니다. 아이추판다님의 글들도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

  10. 고대문명교류사와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입니다.
    전자는 소재 자체가 생소해서 관심이 갔고, 후자는 ‘일반화’라는 실용적인 접근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김우재님이 설명하신 내용만으로도 제 수준에는 충분했지만 부연을 통해 뭔가 더 영감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죠.

  11. 퍼더 리딩에 있는 정수일선생 강연문은 남선 내에서는 국정원에 의해 막힌 듯 하다는.. ㄲ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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