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김우재 (2014-)

오만과 편견

나의 글들이 지나치게 감정적이며 오만하고 무례하고 겸손하지 않다는 이유로, 토론이 언제나 이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산으로 강으로 하늘로 날아가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태도의 문제가 글의 내용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자주 본다. 이런 이들과의 토론은 언제나 건설적이지 않은 결말로 이어지기 일쑤다.

사실과 가치, 감정과 이성, 주관과 객관은 명쾌하게 분리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사실로부터 가치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무어의 자연주의적 오류조차, 윤리학적 명령에 불과할 뿐 논리적 오류가 아닌 것이다. 만일 자연주의적 오류가 논리적 오류에 속하게 된다면 우리는 모든 철학자들의 텍스트를 오류 투성이의 집합이라고 규정할 수 밖에 없다. 나아가 퇴고의 퇴고를 거쳐 작성하는 논문 혹은 저술이 아닐 경우에는, 그러한 글에서 감정과 이성의 완벽한 분리를 바라는 이야 말로 나이브한 것이다. 블로그에 댓글을 쓰면서 이러한 절도를 지키는 이는 존중받을 만하지만, 그러한 절도를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소모적인 논쟁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글의 내용에 집중하는 것이다. 특히 인터넷에서 건설적인 토론을 원할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아무리 차가운 이성의 칼날로 토론에 임하는 듯 보이는 학자들조차, 글 속에서 상대방을 조롱하고 야유하는 모습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진화심리학에 관한 토론의 와중에 다니엘 데닛에게 ‘도킨스의 개’라는 조롱을 퍼부었다. 당시 그 둘은 모두 감정적으로 격앙된 상태였음이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 토론을 매우 값진 것으로 기억한다. 진화심리학 논쟁사에서 둘의 토론의 내용이 추출되어 남기 때문이며, 굴드의 발언은 그저 에피소드로만 기억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굴드의 그 발언을 논쟁의 주요쟁점으로 부각시키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학자야 말로 삼류가 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이야말로 황색저널리즘으로 대중에게 반짝 인기를 원하는 파렴치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자의 인격과 그의 학문적 성과가 그다지 큰 상관이 없다는 역사적 교훈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비트겐슈타인은 포퍼에게 부지깽이를 휘둘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부지깽이 사건을 포퍼-비트겐슈타인 논쟁의 핵심으로 여기지 않는다. 찰스 샌더스 퍼스처럼 인격에 큰 문제가 있는 학자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길가에서 여제자를 벽돌로 가격한 적이 있으며, 이러한 퍼스를 해고하기 위해 학과장은 과를 폐지하고 새로운 과를 만들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윌리엄 제임스는 퍼스의 이러한 괴팍함을 잘 알면서도 그를 학문적으로 매우 존경했으며, “퍼스에겐 친구가 없다오”라고 말하면서도 그를 재정적으로 도왔다. 파이어아벤트의 개성넘치는 성격도 포퍼 일당에게 고립되는 계기가 되었으나, 포퍼는 자신을 학문적으로 배반한 이 제자가 독일의 대학에 취직할 수 있도록 도왔다. 도올의 괴팍한 성격이 학계에서 그가 고립되도록 했는가? 해방후의 미군정의 잔인함에 치를 떨며 “개새끼들이!”라고 외친 그의 발언은 학자로서 부적절했던 것인가? 강유원의 속된 말투와 까칠한 성격이 그의 학문적 성과들을 가려야만 하는가? 한국의 학문 풍토는 역사에 가치있는 것으로 남겨지지도 못할 이러한 부차적인 태도의 문제들로 얼룩져 망가져 있다. 역사에서 학자의 인성은 에피소드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역사에 남는 것, 그리고 가치를 지니는 것은 내용 뿐이다.

어떤 이가 말한다. 나는 인성에 심각한 결함이 있으므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대답한다. 그대가 말하는 성공의 기준은 무엇이냐고. 퍼스가 그의 성격 때문에 평생을 고전했다고 치더라도, 그의 인생이 그것 때문에 실패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인성의 결함으로 실패할 것이라는 인신공격을 서슴치 않는 인물은, 퍼스의 학문적 과업에 대해 실패라고 이야기할 것인가? 도올은 실패한 것인가? 강유원은 실패할 것인가? 그렇다면 겸손함과 예의로 자신의 학문을 치장하는데 바쁜 현재 한국의 대학교수들은 역사 속에서 성공한 이들로 기억될 것인가? 성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아니 학자에게 성공의 기준이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이 연봉 1억원 혹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역사에 기록될 어떤 학문적 업적을 남기는 것인가? 저자가 나에게 실패할 것이라 단언할 때, 그는 인성과 학자의 성공의 어떤 인과관계를 전제하는 것일텐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

그들은 내가 감정적이라고 삿대질을 하지만, 실은 그러한 태도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내용을 읽지 못하는 그들이야말로 감정적인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본다”는 말을 이럴때 쓰는 것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그들을 이해한다. 대학교수라는 이조차 나의 비판이 가리키는 내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나를 ‘비열하다’고 몰아붙히는 한국사회에서, 어쩌면 그들은 피해자인 것인지도 모르니 말이다. 태도에 집착하는 이들의 태도야말로 고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