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교수의 재발견

초딩수준의 과학대중화가 이 땅의 과학문화를 망쳐버렸다는 생각엔 변화가 없다. 그리고 훨씬 품격 있는, 아니 더 나아가 학문식민지로서가 아니라 주체적 학문으로서의 과학문화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가 그러한 과학 저질화에 동참한다는 사실에 화가 나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언제나 최재천 교수에게 적대적이었고 독설도 서슴지 않았다.

여전히 나를 아는 많은 지인들은 최재천 교수에게 푹 빠져 있던 나를 기억한다. 나의 변화를 잘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나는 여전히 최재천 교수를 사랑하는 한 생물학도일지 모른다. 여전히 나를 도킨스의 광팬으로 이해하는 이들은 거기서 한발쯤 더 나아간 것일테고.

언제나 두뇌를 최대한 개방해두고 두뇌의 가소성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무식했으면 무식했다고 말할 수 있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잘못되었다고 말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그런 과정을 통해 발전했고 언제나 누군가에게 깨지고 치이고 밟히면서 성장해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천재도 아니고 노력파도 아니므로 그런 과정은 일종의 필연인 셈이다.

최근에 최재천 교수의 홈페이지를 들를 기회가 생겼는데 Plos One에 발표된 게에 관한 연구를 비롯해서 성실한 연구결과들이 차곡히 (많이는 아니지만 진화생태학이라는 학문이 결실을 맺기 위해 걸리는 시간이 길다는 점을 감안하면) 쌓여 있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뭐 여기까지는 국가에서 녹을 먹고 연구하는 과학자라면 당연히 해야하는- 비록 진화생태학이라는 학문의 성격을 이 땅의 과학행정가들이 이해할리 만무하며 최재천 교수가 참으로 힘들것이라는 점도 이해하면서- 책무일지 모르지만, 대중과학자로만이 아니라 연구자로서의 최재천 교수를 바라보는 나의 입엔 미소가 흐른다. 아마도 내가 그리워했던 것은 이런 것이었던 듯 하다. 그리고 최재천 교수는 참으로 열심이다. 대중적 관심을 얻기 시작하면 연구를 등한시하기 쉬운데 그래도 최 교수님은 천상 연구자로 사시는 듯 하다. 대중적 인기도가 연구로 잘 승화된 듯 해 다행이다. 우석훈 박사의 홈페이지에서 들었던 바로는 국가에서 영장류 연구에 연구비를 안줘서 어디 기업에서 연구비를 받았다던데, 그건 무조건 국가를 비난하기도 힘든일이기는 하다. 최교수님 입장에선 꽤나 아쉽겠지만 차라리 기업의 후원을 받은 것이 국가에 지나치게 종속된 과학의 굴레를 끊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잘된일이지 싶다.

이 글을 쓰는 것은 홈페이지에서 느낀 감정 때문만은 아니다. 최근 들어 후생유전학에 관한 글 때문에 Eva Jablonka의 ‘4차원적 진화(Evolution in Four Dimension)’를 들여다 볼 일이 생겼는데 이 책에 관한 리뷰에 최재천 교수의 이름이 보인다. 비판하는 내용은 내가 글에서 다룰 RNA 및 후생유전학에 관한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조금 감동 먹었다. 저자들도 최재천 교수와 Susan Lappan교수가 함께 작업한 이 짧은 논평에 성실히 답하고 있었다. 수잔 블랙모어 같은 거물급이 참여한 논평들 속에서 최재천 교수의 이름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여전히 학자이시고 참 열심이시다. 제대로된 학문적 결과도 없는 나 같은 놈이 뭐라 그러기도 미안하지만 여하튼 보기 좋다. 그리고 다행이다.

여전히 지적 편중이나 가벼운 글들에 대해선 불만이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싶다. 한국에도 제대로된 진화생물학자가 하나 있다는게. 행복한 일이다. 최 교수님 주변의 이들이 그가 조금 더 연구에 매진하고 세계 속에 우뚝 설 수 있도록 조언하고 충언해줄 일이다. 아부만 일삼는 간신배들이 가득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추신: 다윈200주년도 좋지만, 내가 아는 국내의 과학사가 중에 이정희 박사 만한 사람처럼 성실한 분도 드문데 라마르크의 <동물철학>도 좀 사주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모랑쥬의 <분자생물학>도 번역했던 분이고 프랑스의 과학사 전통에 도통하신 분이다. 아마도 내가 찾는 과학사가 중에 한 명이지 싶은데 지명도가 좀 높아졌으면 싶다. 성실한 학자들이 대접을 받아야 이 땅에도 좀 희망이 있지 않을까 싶다.






























동물 철학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장 바티스트 드 라마르크 (지만지고전천줄, 2009년)

상세보기


9 thoughts on “최재천 교수의 재발견

  1. 간만에 미르이야기 업데이트 하고 나니 머리가 빠개진다. 초파리 고르러 가야하는데 거기서 눈도 빠개질텐데 여러군데 빠개지겠다. 라마르크가 전반적인 유전에 관해선 틀렸을지 몰라도 두뇌에 관해선 단연 용불용이 진실이다. 글도 자꾸 써야 쉬이 써질텐데 육체노동으로 글 쓸 시간과 정력이 없으니 큰일이다. 책 읽고 글만쓰면 되는 인문학자들이 신세한탄하는 것이 듣기 싫은 이유다.

  2. 우리나라는 배워온 것과 관계가 없는 분야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워낙 많다보니..

  3. 전적으로 동감. 샌프란시스코에서 잘 지내는지? 장대익 박사학위 논문 읽다가 생각나서 찾아와 봤음. 😀

  4. 네. 직한이형님 공부는 잘 되시는지요? 저는 그냥 그럭저럭 지냅니다. ㅋ 실험 열심히 하다가 땡땡이도 치다가 그래요. 장대익씨 박사학위 논문 좀 보내주세요. korean93@posecg쩜ac쩜kr 로 보내주시면 감솨르~~그 학위논문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는데 궁금해서. 자주 들러서 따끔항 충고도 해주고 그러세요 ^^

  5. 생각해보니 한국에 있을 때 pdf로 다운 받아 놓은 게 어디 있을 듯. 진지하게 읽어볼 만한 것인지는 평가유보.

  6. 안녕하세요? 처음뵙겠습니다.
    한때 최재천 교수님 랩에서 여름방학을 보냈던 학부 학생시절이 생각납니다.
    지금은 방향을 틀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 시절이 그립고, 최재천 교수님도 존경하고 있지요.

    종종 들러 과학적 지식을 좀 얻어가도 괜찮겠지요?^^

  7. 말투를 보아하니 대구분이신거 같네요 ㅋㅋ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다음의 HTML 태그와 속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 <strike> <str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