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칸트와 과학

바둑과 과학은 쓰레기 글이다. 어차피 인문학적 소양이라곤 없고 지쳐버린 내가 제대로된 글을 쓸리 없다. 장황하지만 대충 정리하면 이런 내용이다.국내 인문학자들 중 과학에 대해 왈가왈부하면서 닥치고 실험실에 한번 들어가본 인물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없다고 해도 그냥 투정일 뿐이다. 다만 인문학 가운데 과학학을 한다는 인물들에겐 좀 그런 열정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님 말구.

칸트와 과학

고대의 철학자들이 말한 것이 철학이라는 무대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이상자일 것임에 틀림없다. 이는 수학이라는 이성의 최고무기를 사용한 피타고라스의 철학도 마찬가지다. 이데아는 추상적 개념이다. 그건 실제하지 않는다. 현대에 이르러 상식이 된 이러한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 플라톤의 시대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무려 2000년 동안 철학이 헤메온 지점이다. 그러한 철학의 오만은 과학의 등장으로 박살났다. 그 과정에서 수학이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수학은 이미 그 2000년 동안 꾸준히 발달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를 ‘이성주의’라 부르던 ‘관념주의’라 부르던 상관은 없다. 이러한 시도들, 즉 ‘추상적 개념을 실체화’하려는 오류는 자연과학의 발달과 함께 박살났다. 그 시초는 물리학이었다.

이러한 오류는 물리학을 신봉하던 데카르트에게까지 여전히 건재했다. 데카르트의 논증은 그 시대를 통해 보면 음미할 만한 것이지만, ‘내가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것이 논증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꼴통은 없다. 데카르트의 시대까지 철학은 모조리 ‘분석진술’을 다뤘다. 연역이던 뭐던 논리학적으로 참인 사실은 물리적 세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진술하지 못한다. 그것은 물리적 세계에 관한한 공허하다.

경험주의가 태동하면서 눈으로 관찰해 얻은 정보들에 관한 진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방법론의 종합자는 베이컨이다. ‘종합진술’은 ‘분석진술’처럼 언제나 참인 확실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종합진술은 언제나 의심의 여지가 있으므로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것이 귀납의 오류라 불리는 것이다.

종합진술의 확실성을 분석적 전제들로부터 이끌어 낼 수 없다는 상식이 피어나던 무렵 칸트가 등장했다. 그는 종합진술의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의심할 수 없는 진리이면서 종합적인 전제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는 우선 의심할 수 없는 진리이면서도 종합적인 진술이 있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를 ‘선험적 종합’ 판단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시도는 칸트가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다. 그는 경험과 이성 모두에게서 확실한 진리가 가능함을 증명하려 했다. 이것은 위대한 시도다. 칸트가 위대한 이유는 칸트가 비록 이성주의적 철학을 구성해보려한 마지막 시도자였지만, 그가 플라톤과 데카르트가 실패한 지점, 즉 이데아가 실재한다거나, 데카르트처럼 속임수로 필연적 전제를 끌어들이지 않고 이성주의를 구성해보려 했다는 데 있다.

칸트는 수학적 원리들과 수학적 물리학의 원리들에서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인 진술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칸트도 다른 철학자들처럼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지식이 존재한다고 지나치게 확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그런 지식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지 않고, 다만 그런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물었다. 그리고 답은 그런 지식이 있다는 것은 수학과 수학적 물리학이 증명해 준다는 것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이러한 시도의 연속이다. 예를 들어 칸트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통해 이를 증명한다. 즉 기하학의 명제들은 논리적 연역에 의해 이끌어 낼 수 있지만 이 공리들은 그런식으로 이끌어 낼 수 없다. 따라서 공리들의 옳음은 논리 이외의 방법에 의해 확보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공리들은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인 진리여야 한다. 다음 단계로 이런 공리들이 물리적 대상에 대해 옳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공리에 의해 도출된 정리들도 물리적 대상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 왜냐하면 공리가 옳으면 논리적 연역에 의해 정리도 옳다는 것이 보증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기하학의 정리들이 물리적 실재에 적용된다는 확신에 의해 공리들도 옳음도 증명된다. 우리는 이것이 가능함을 안다.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진리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실재의 측량에 기하학의 결론을 주저없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논증이 수학적 물리학에도 적용된다. 간파한 사람은 했겠지만, 이러한 칸트의 논증은 ‘선험적이며 종합적인 판단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제외하고는 베이컨이나 최한기의 추측과 다를 바 없다.

칸트는 이러한 논증을 뉴턴 물리학의 인과원리로부터도 발견한다. 우리는 모든 사건의 배후엔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확신에 의해 과학적 탐구가 계속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사건에 원인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과학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과학은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인 지식을 전제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칸트의 입장을 그처럼 강력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지닌 과학적 배경에 있다. 칸트도 다른 철학자들처럼 무리하게 확실성을 추구했지만 그는 이데아에 대한 통찰에 호소하는 신비주의자도 아니었고, 논리적 속임수에 의존하지도 않았다. 그는 확실성이 획득될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당시의 과학을 동원했다. 간단히 말해 칸트는 확실성을 원하는 철학자의 염원이 과학의 결과들에 의해, 즉 당대의 과학이 이루어낸 업적에 의해 실혐되었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과학자의 권위에 호소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강화시켰다. 칸트가 기대고 있던 과학의 권위는 대부분 당시의 최신 과학이었던 뉴턴 물리학으로부터 나왔다. 따라서 뉴턴물리학이 깨지면 칸트의 철학도 깨지는 것이지만 적어도 칸트는 <순수~>를 통해 이성을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인 지식의 원천으로 만들고 그런 식으로 당대의 수학과 물리학을 철학적 지반 위에서 필연적 진리로 확립시키려고 했다.

양자역학을 알고 있는 지금, 우리는 칸트의 시도에는 경탄할 지언정 그의 철학이 물리세계에서도 참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다만 과학자들 자신보다도 과학의 확실성을 신봉했던 한 철학자의 광신을 목도할 뿐이다.

<실천~>은 윤리학에 대한 칸트의 답이다. 칸트가 <순수~>를 통해 수학의 공리들과 물리학의 공리들을 연역해냈듯이 그는 <실천~>을 통해 윤리학의 공리들을 연역해내려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의 정언명령이 등장한다. 실제로 칸트는 윤리학의 물음들이 ‘당위’에 관한 것임을 안다. 천문학적 기술에 도덕적 논증이 들어 갈 수는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학적 지식들이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인 진술임을 증명해야 했던 칸트는 ‘현상’과 ‘물자체’를 구분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현상 뿐이다. 이점에서 칸트는 플라톸과 사실 다를 바 없다. 다만 칸트가 물자체를 필요로 한 이유는 수학과 물리학의 원리들이 실재에 적용되는 것처럼 도덕의 원리들이 적용되는 영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웃기는 것은 이 물자체의 영역엔 인과율이 적용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뉴턴 물리학을 신봉하던 칸트가 자신의 종교적 도덕을 구출하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물리학 전체를 내던지는 꼴을 여기서 보게 된다. 솔직히 불쌍하다. 이 점은 칸트도 스스로의 책을 통해 시인하고 있는 바다.

웃기는 것은 뉴턴 물리학을 통해 선험적이며 종합적인 진리를 확실히 하려 했던 칸트 철학이 이후 <실천~>을 통해 드러난 그 반과학적 부분 때문에 과학을 적대시하는 철학자들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자들은 추상적 개념을 실재라고 착각하는 2000년을 지속해온 오류를 칸트라는 권위에 기대 여전히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적어도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겸손한 철학은 칸트에서 끝났다. 어떤 이는 칸트 이후 철학이 헤겔로 넘어갔다고 하지만, 헤겔의 출발은 과학이 아니라 역사다. 적어도 나의 기준에서, 즉 근대 과학이 태동한 이후로 해당 시기의 과학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철학을 구성하려던 철학자의 위대한 시도는 칸트에서 끝났다. 헤겔은 칸트의 후계자가 아니라고 본다. 헤겔로부터 과학과 철학은 분리되어 이해되기 시작했고, 과학과 철학은 각자의 길로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칸트는 그렇지 않았다.

이게 내가 아는 칸트의 뉴턴물리학적 이해다. 그리고 이 논증엔  사기성 속임수가 숨어 있다. 알아채는 분이 나오길 바랄 뿐이다.

 

  1. 귀납의 오류와 비슷한 건가요?

    그냥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는데 확실히는 모르겠네요…

  2. 안녕하세요? 항상 블로그의 글을 잘 읽고 있습니다. 🙂
    그런데 이번 글은 님께서 쓰신 다른 글들에 비해서
    좀 많이 이해가 어렵네요^^;
    특히 어떤 면에서 논리적인 속임수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급질문이지만 알려주시면 안될까요^^;;
    항상 눈팅만 하다 궁금한 마음에 질문 던져 봅니다:)

  3. 다른 누군가의 논증입니다. 그 누군가가 누군지 찾는 게 퀴즈구요. ^^

  4. 그렇군요;제가 아는게 얕아서 어렵네요~
    칸트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논증이라면
    혹시 데카르트의 논증 부분 말씀하시는 건지요?
    우재님께서 퀴즈로 내셨다고 하셔서
    비밀글로 답니다-_-;틀렸으면 “땡”이라고
    볼드체에 폰트 32로 크게 써주세요:)

  5. 그렇군요^^;
    공부 열심히 해서 답을 알게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6. 근대철학을 이제 막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제대로 이해는 하고 있는지 확인도 해볼 겸 해서 글 남겨요.
    피히테나 헤겔, 딜타이 등의 비판에 의하면 칸트의 오류는 ‘물자체’와 ‘현상’ 간의 일치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 또 ‘선험적 주체’보다 앞선 인식주체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맞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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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jjismy's me2DAY 2009/06/29

    급진적 생물학자 Radical Biologist :: 칸트와 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