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시골의사의 경박단소

경박단소 키치의 시대, 원본이 사라진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진지함이란 새로운 형태의 소외일지도 모른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 문구는 시골의사 박경철의 블로그를 장식하고 있는 말이다. 나는 그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한다. 다큐멘터리나 르뽀류의 프로그램이라면 대놓고 보던 내가 시골의사라는 사람의 블로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시골의사 박경철의 블루오션’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KBS 스페셜 때문이었다. 미국에 와서 꽤나 심심하던 시절이라 꾹 참고 끝까지 봤다. 의사면허를 가진 시골의 한 의사가 전문 증권 애널리스트 이상의 지식으로 무장하고 부자 되는 법을 강의했다는 것,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증권 전문가 이상의 대우를 받는다는 점, 그럼에도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점, 그리고 많은 독서를 한다는 점, 나아가 읽었다는 책들이 그닥 가볍지 않은 고전들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이 인상에 남았다. 그리고 블로그의 글들을 읽고 기억에 담아두곤 잊었다.

간만에 한RSS에 들어가서 쌓인 글들을 좀 읽다가 ‘댓글 토론을 제안하며’라는 그의 글을 읽었다. ‘나름 유명한 블로거가 우석훈도 무시하곤 하는 댓글을 친히 읽고 토론을 제안하는구나’라는 생각으로 무심코 들어갔다 우스운 문장을 목도한다.

제가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대학생시절에도 저는 다위니즘에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출간되었던 제레미 리프킨의 책, 엔트로피가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열역학 이론에서도 다위니즘의 시초는 사실 의문시 되었기
때문입니다. 숫자적으로는 0이지만, 통계열역학상으로는 단지 너무너무 작은 확률이지 절대적 0은 아니라는 것에 근거해서, 요새는
대수 이론 등으로 낮은 확률이라도 얼마던지 일어날 수 있다는 논리들이 제기되고 있지만 말입니다.

과학은 종교와 철학에게 완승을 거두었는지 모르지만, 쿤은 과학 또한 결국 믿음의 부산물일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었다고 봅니다. 차가운 논리와 이성이 아닌, 근거없는 믿음. 저 역시 과학으로 먹고사는 자로서, 과학의 한계를 너무나
많이 봅니다. 과학자체라기보다는 과학을 하는 인간의 한계를 보게 되는 것인지 모릅니다. 의문은 그러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그
이상을 우리가 볼 수 있는 능력이나 있을까 하는 겁니다. 이미 구닥다리가 되어버렸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칸트는 그 부분에서
명확히 과학의 영역을 한정했는지 모릅니다.

20세기 물리학의 시작의 한 축이었던 양자역학이론은(제가 밥벌어 먹고사는 이론입니다.) 21세기에도
현실을 꽤나 잘 묘사하는 이론체계이지만, 그에 비하면, 다위니즘은 단지 저의 종교적인 믿음 때문만이 아니라도, 과학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근거가 많이 빈약해 보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반대쪽이 근거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양쪽 다
스스로를 ‘과학’이라 하지만, 결국 쿤이 간파한 이상으로 ‘믿음’의 바탕 위에 서서 얘기하는 것은 아닌지 싶습니다.


나는 소설을 읽지 않는다. 그냥 취향이다. 그래도 댓글 토론의 발화점이 되었다는 글이 뭔지는 알아야겠기에 읽어 본다. 이런 문장이 눈에 들어 온다.

다윈 탄생 200주년을 전후해 과연 ‘다윈주의를 신봉하는 과학자(혹은 과학적 사고를 하는자)가 크리스쳔이 될 수 있는가?’라는 도발적인 담론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이전에도 이러한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특히 이번 ‘다윈 200주년’과 맞물린 과학적 신성부정(神性否定) 캠페인은
‘만들어진 신’의 저자 ‘도킨스’를 필두로 한 일군의 학자들에게 있어서 ‘다윈’이라는 이름이 단순히 자연인 ‘다윈’을 지칭하는
명명(命名) 기호가 아니라, 기독교적 세계관의 허구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적명(適名: euonym)으로 여겨지고
있음이 다시한번 확인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실 과학의 눈으로 본다면 이런 시도들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예를들어 의사의 입장에서 뇌를 다친 환자들이 보이는 지적변화를 지켜보면, 지성과 감성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인지적 능력들은 뇌세포와 신경세포간의 전기적 신호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도킨스 같은 대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뇌 속에 발생하는 전기적 신호를 순차적으로 이식 할 수만 있다면 인간이 램 메모리 칩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도 가능하리라는 허황된 상상조차,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보다는 훨씬 과학적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 질
수도 있는 사안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과학이란 그런 것이다. 과학은 처음에는 종교와 나중에는 철학과의 대결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이제 인간에게 ‘미지(未知)’란 과학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곳이지, 더 이상 종교나 철학의 영역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가 이 책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서 있는 지점이다.


도킨스에 대한 나의 비판을 굳이 꺼내 들지 않더라도, 도킨스빠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온 내 지적 궤적을 따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아는 사람은 안다. 나 도킨스 싫어한다. 내가 도킨스를 싫어하는 이유는 도킨스가 진화론을 신봉하기 때문이 아니다. 진화론은 ‘신봉’ 따위의 대상이 아니다. ‘상대성 이론’이 신봉 따위의 대상이 아니듯 진화론도 신봉의 대상이 아니다. 티비에 출연해 경박한 주식투자 선동꾼이 아니라 나름 지식인으 티를 내는 자라면 토마스 쿤에 대한 몰이해를  ‘쿤은 과학 또한 결국 믿음의 부산물일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었다고 봅니다’라고 말하면서 쪽팔린 줄 알아야 한다. 쿤의 이론이 과학자 사회의 심리학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스스로 ‘나는 쿤을 모른다’
라고 인정하는 편이 낫다. 나아가 차라리 ‘나는 과학을 모른다’라고 솔직하게 시인하고 닥치는 것이 현명한 일일지 모른다. 그냥 ‘의학은 과학이 아니니 나는 과학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편이 아름답다. 엔트로피가 닫힌계에서나 적용된다는 것도 모르는 무식함은 그냥 묻어 두는 편이 나았다. 그러면서 양자역학 이론으로 밥벌어 먹는다는 소리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블로그계의 고수들은 숨어 산다. 진짜 숨어 있다. 모르면 배우면 되는데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희한한 지식인들에겐 매가 약이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도대체 왜 진화론이 사실이며 의심할 수 없는 것인가’ 따위의 십수년전부터 떠들고 다니던 글, 혹은 이미 인터넷 시대에 사는 이들이라면 대충 보고 지겨울만한 논쟁들이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또 엔트로피와 진화론이

강신익

경북대 의대

기공치료사

대답하던 말던 트랙백 쪽팔려라도 보라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