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데닛의 위험한 생각

이제부터 ‘진화’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수수께끼를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의 말이 될 것이다 -에른스트 헤켈(1901)

서평을 하는 사람은 그 책이 의도한 독자들을 고려해야 한다. 아이들을 위한 공룡에 관한 그림책과 두꺼운 고생물학 전공서적은 다르고 달라야만 한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데닛이 쓴 <다윈의 위험한 생각>이라는 책이 겨냥하고 있는 독자층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책은 대중과학서일까? 아니면 새로운 사상을 시도한 진지한 전문서적일까. 불행하게도 이렇게 물어야만 하는 이유는 독자층에 따라 평결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과학서라면 (상당한 분량의 철학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다. 도킨스나 굴드의 책처럼 유려한 문체를 보여주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데닛은 깊이 생각해 볼만한 도발적인 주제들을 독자들에게 던져주고 있고 그 결과 독자들은 진화 생물학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데닛의 책은 대중과학서에서 시도되는 술책들(예를 들어 오래된 개념들에 대해 귀여운 이름을 붙여 준다던가)을 즐기고 있기 때문에 실상 내 서평은 이쯤에서 마무리해도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데닛은 분명 스스로 에듀테인먼트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의 사명은 훨씬 야심찬 것이다. 그는 제 1장에서 “나는 지금까지 무시되어온 것들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맡고 싶다. 나는 다른 학문 분야의 지식인들이 진화론을 진지하게 고려해야만 한다는 말을 하고 싶고, 진화론이 어떻게 무시되어 왔으며 또 왜 그들이 엉뚱한 경고에 귀를 기울여 왔는지를 보여주고 싶다”라고 말한다. 거두절미하고 데닛은 선수들에게 뭔가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과학자들과 인문학자들로 대변되는 지식인들의 사고를 변화시켜보고자 하는 이 시도는 분명 실패했다.

데닛의 명제는 매우 단순하다. 지식인들은 데닛이 ‘자연선택’이라고 부르는 진화론의 설명력을 과소평가해왔다. 그는 자연선택이 생물학자들이 믿는 것처럼 생물학에서 뿐 아니라 사회과학 및 철학에서도 아주 중요한 원리라고 확신하는 듯 하다. 데닛은 이 책을 통해 자연선택을 일종의 ‘보편산(Universal Acid)’, 즉 그것을 담고 있는 병마져도 모조리 녹여 버리는 그런 아주 강한 산성 액체로 비유하고 있다. 데닛에 따르면 자연선택이라는 보편산은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생물학 아래의 영역뿐만 아니라, 의식과 문화적 변화 및 도덕성의 기원까지를 설명하는 생물학 윗쪽의 영역까지 확장될 수 있다. 데닛은 ‘모든것에 대한 다윈주의적 과학’이라는 시를 도배하고 있다. 그는 다윈의 생각이 “모든 개념을 먹어치우고 결국 혁명적인 세계관을 일깨우는”것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생각은 생명, 의미, 목적의 영역을 공간, 시간, 인과, 기계론 및 물리법칙의 영역과 통합하는” 생각이다.

데닛의 책에서 악당으로 그려지는 이들은 다위니즘이 생물학 내에서만 작동해야 한다고 지식인들을 설득해 온 구시대적인 인물들이다. 그들은 ‘과학만능주의’에 놀란 사람들이다

현대생물학의 일부분 혹은 모든 것을 다윈에게 헌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서 멈춰라. 다윈주의적 사고가 우주론이나 심리학, 문화인류학, 윤리학, 정치 및 종교의 영역으로 넘어오는 것은 막아라.

데닛은 이러한 방해자들을 지명하는데 수줍어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그룹의 지도자들 가운데에는 리쳐드 르원틴이나 스티븐 제이 굴드같은 생물학자들, 졸 설이나 노엄 촘스키와 같은 철학자들도 속해 있다. 데닛은 그들의 지위를 잠식시키기 위해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그의 주된 비판은 이러한 지식인들이 ‘바우플랜(Bauplan)[footnote]청사진이라는 뜻의 독일어로 영어로는 Body Plan, 즉 동물의 설계도가 존재한다는 입장을 뜻한다.[/footnote]이나 일반문법(Universal Grammer)’처럼 신비한 힘개념을 도입해 세계의 설계적 측면을 설명하려하 하고 있다는 -그는 이를 ‘회전익(skyhook)'[footnote]회전익이란 비행기에서 물건을 떨어뜨릴 때 감속을 시키기 위해 다는 것으로 여기서 데닛은 촘스키와 같은 지식인들이 세계를 설명하는 데 자연선택으로 설명하는 것을 감속하기 위해 신비한 힘들을 끌여들였다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듯 하다.[/footnote]이라고 부른다-데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이상하게도 신이라는 개념은 다윈이전의 자연학자들 사이에서 유별난 회전익으로 봉사했다: 왜 기계적인 과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적응이라는 개념을 이애하려고 할 때, 신의 재주 따위에 의해 방해받아야만 하는가? 하지만 세상에, 데닛은 회전익은 신화적 개념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설계-유기체던 문화던-는 자연선택이라는 배경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묘사해버리면 데닛의 주장이 술집에서 모든 것을 아는체 하는 사람의 설교처럼 약간 환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데닛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오랫동안 심각하게 고민해온 철학자다. 그의 논증은 매우 정교하고 가끔은 매우 학문적으로 깊이 있는 세부묘사를 제공한다. 그리고 책의 겉날개에 쓰여진 몇몇 유명한 진화생물학자들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진정 승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데닛은 만만하게 볼 학자가 아니다.

나는 그런 칭찬에 동참할 수 없다고 말해야겠다. 데닛의 책은 많은 문제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가장 분명히 보이는 것은 논증의 견고함 따위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제공되고 있는가에 관해서이다-이 책은 문체의 불일치 때문에 나를 불편하게 한다. 비록 많은 장들이 대화체로 쓰여져 있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엄청난 전문용어들 앞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비슷하게 데닛은 그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귀여운 생각들을 사용하곤 하는데, 예를 들어 ‘우주 피라미드’와 같은 것은 자주 등장하고 반복되고는 있지만 도대체 왜 이런걸 만들었는지 당혹스러울 정도로 불분명할 뿐이다. 나는 이처럼 문체가 뒤죽박죽인 이유를 나중에야 알았다. 데닛은 그가 이미 논문(Journal of Aesthetics and Art Criticism)으로 출판했던 글들을 가지고 작업을 한 것처럼 보이고, 게다가 이 논문은 그의 다른 책 <의식, 설명되다 Conscious Explained>에도 다시 등장하는 듯 하다. 이 책의 놀라울 정도로 많은 부분이 그가 이미 논문으로 발표했던 글들의 짜집기였다. 그 결과로 인해 문체가 뒤죽박죽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몇가지 과학적, 역사적 사실을 잘못 기재해 놓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집단유전학의 이론은 유전자부동에 의한 진화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보다 빠르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또 다윈은 그의 성선택(자연선택이 아니라) 이론을 ‘무서운 익살’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리고 나는 도대체 왜 데닛이 집단유전학이 쓸모없다고 주장하는 지에 대해 의견을 좀 들어야 겠다. 물론 이런 오류들은 경범죄에 불과하고 데닛의 주요한 주장에 흠집을 내지 않을지도 모른다. 불행하게도 데닛의 책에는 주요한 주장이 너무나 많아서 우리가 그것을 모두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빼고는 말이다. 따라서 나는 <진화>지의 독자들을 위해 두가지 주장에만 촛점을 맞추려고 한다. 첫째는 자연선택이 생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다위니즘이 생물학을 넘어 문화와 도덕성의 기원에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적응주의자 프로그램

데닛은 생물학 내부에서 제기된 자연선택에 대한 공격들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  그는 “생물학은 공학이다”라는 관점, 예를 들어 유기체는 최적화된 설계라는 것, 에 두장을 할애하고 있고 이러한 적응주의자 프로그램에 의문을 제기하는 생물학자들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당연히 이런 비난의 희생자들은 르원틴과 굴드다. 다위니즘을 생물학으로부터 다른 영역으로 퍼나르려는 학자가 도대체 왜 생물학계 내부의 적응주의 스토리텔링을 방어하는데 집착하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문화 다위니즘이 모든 형태학적 흔적들의 80~95%를 최적화되어 있다고 설명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데닛은 이에 대해 매우 확신하고 있는 듯 하고 이러한 질문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는 듯 하다.

데닛은 적응주의가 의문시될때마다 위협을 느끼는 듯 한데 이는 그가 이러한 시도들이 회전익을 교묘하게 주장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적응주의를 싫어한다면 이처럼 정교하게 조립된 설계들을 어떻게 설명해낼 것인가? 불행하게도 데닛의 회전익에 대한 공포감은 적응주의의 설명력과 위험성을 균형감 있게 고찰하는 데 있어 방해요소가 되는 것 같다. 그는 적응주의를 중심이 아닌 경계에 위치시키고자 했던 생물학자들의 시도를 범선택주의라고 규정짓고 있다. 그건 불공평하다. 그가 언급하지도 않는 것들을 보면 이는 자명하다. 그의 책의 1/3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개념에 대한 생물학 내부의 도전에 대해 다루고 있으면서도 그는 모투 기무라나 중립가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않는다.

이런 누락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가지 가능성은 데닛이 중립가설을 모른다는 것이다. 기무라의 중립가설은 실상 데닛이 좋아하는 대중과학서보다 읽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데닛이 그의 책에서 “선택은 매우 작은 변이조차 알아챌 수 있다”라고 적는데서 알 수 있는데, 사실 이런 언급은 대중과학서임을 고려한다면 그닥 해롭지는 않은 과장법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데닛은 유전자의 무작위적 고정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인정하기도 하는데, 분명 그는 중립가설에 대해 들어 본적이 있다는 뜻이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데닛이 진짜 진화-낙타의 혹이나 코끼리의 코와 같은-에만 관심이 있고 분자진화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것 같지도 않은게 데닛이 헤이그의 유전자 각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IGF2와 같은 분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또 다른 대안은 데닛이 고양이를 가방에서 꺼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데닛은 나이브한 독자들이 이미 생물학자들에 의해 선택이라는 보편산이 중립적이며 이러한 비다윈적인 진화가 매우 보편적이라는 사실이 발견되었다는 점을 모르고 있기를 바라는 듯 하다.

하지만 진짜로 데닛이 생각하는 것은 이런 것 같다. 그는 ‘설계’에만 관심이 있고, 따라서 중립가설에 의해 발생하는 논쟁따위는 이 책에서 말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것 같다. 내가 맞다면 데닛은 생물학자들이 적응주의에 대해 우려하는 점에 대해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진화학자들은 지적설계와 관련된 경우에 자연선택이라는 말을 하는 게 있어 만장일치할 것이다. 나비의 의태가 선택에 의한 것임을 부정하는 누구라도 로날드 피셔의 <자연선택의 일반원리>로 중무장한 학자의 공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예가 명백해 보이는 이유는 설계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분명하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유사성의 정확한 원인을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비근연종들이 우연하게 닮아버린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문제는 황당무계하게 보이는 설계를 설명항는 대안적 원인들의 약점이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많은 적응주의자들의 이야기에 있어서- 주창자들이 설계의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데 있다. 대부분의 돌연변이가 열성인데 이것이 적응적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가? 피셔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틀렸다. 꽃고비라는 식물의 꽃색깔에서 보이는 변이들이 적응적이라는 건 확실한가? 도브잔스키와 에플링, 그리고 서얼 라이트는 모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반대로,  대부분의 분자적 차이가 설계된 것이 아니므로 적응주의적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확실한가? 기무라와 길리스피는 이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어떤 것이 설계된 것이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이고, 어떤 것을 설명하는데 적응주의 프로그램이 필요하고 그렇지 않은지도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로 충분치 않다면 우리의 문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매우 중요한 우리의 과학문화로 인해 더더욱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진화학자들은 설계가 불분명한 형질들에 대해 적응주의적 설명을 만들어내고 있다. 왜 어떤 진드기의 새로운 종은 갈색인가를 설명하는데 이런 영광은 어디에 있을까?(낙엽뒤에 숨으려고?). 우리가 직면한 중요한 도전은 왜 설계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어떤 형질들이 실제로는 적응적이며 최적 설계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이 효소는 어머니에게는 있지만 태아에게는 없다. 왜냐하면…).

만약 (1) 설계를 식별하는 것이 어렵고 (2) 범선택론자들이 설계가 불분명한 곳에 적응주의적 이야기들을 날조하는것만을 즐기고 있다면, 도대체 왜 진화학자들이 적응주의에 대해 과민반응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것일까? 아래와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는 그룹은 특출나게 생각이 모자라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주장하는 설계가 환상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에 불과한 이러한 무한한 특성에 대한  적응주의적 설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리가 그것의 정확한 원인에 대해 알기 전에 설계를 인지하는 경우와 우리가 이야기를 날조함으로서 설계를 선언하는 경우는 좀 다른 것 아닌가? 그리고 우리가 적응주의적 이야기보다 빠르게 임의의 형질을 구성한다던다. 실험으로 검증하기는 것보다 빠르게 적응주의적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우려할 만한 상황이 아닌가? 이러한 의문에는 바우플랜같은 이야기나 설계의 원인에 대한 어떤 대안적 가설도 존재하지 않느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주기 바란다. 여기엔 단지 적응주의를 얼마나 사용해야 그게 좋은 것인지에 관한 상식적인 견해가 있을 뿐이다. 데닛은 이러한 합법적인 걱정을 직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에게는 그냥 굴드와 르원틴의 수사적 과장을 비꼬는 것이 쉬울 것이다.

나는 데닛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이러한 우려들을 고려하지 못하는 한가지 이유가 적응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데닛은 선택을 ‘설계 공간’을 통해 유기체를 인도하는 무언가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자연선택은  유기체를 좋은 선택의 진입로로 운반한다. 데닛에게 선택이 좋은 설계의 봉우리로 유기체를 인도한다는 생각은 매우 분명할 뿐 아니라 중요한 결과를 만든다: 우리는 유기체를 역가공(reverse engineering)할 수 있다. 그 말은 우리가 진화적으로 가공된 어떤 산물을 조사해서 “왜 공학자는 이런 설계를 이런 특성으로 만드었을까”라고 물을 수 있다.

가끔 유용할지는 모르지만, 이와 같은 설계에 대한 상상은 적응에 대한 두가지 미묘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첫번째는 자연선택이 자연선택이 설계를 만드는데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실제로 선택은 ‘적합도’를 볼 수 있을 뿐이지 설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선택은 그런 설계를 만드는 것처럼 그걸 버리는 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행복함을 느낄 것이다. 동굴에 사는 생물종의 눈이라는 진부한 예를 생각해보라. 만일 이러한 구조가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었다면 선택은 그것을 만들었을 때처럼 그것을 부숴버렸을 것이다. 눈이 없거나 거의 사라진 종에서 옵틱 너브는 공학자의 청사진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설계의 종류가 아닐것이지만, 우리는 동굴에 사는 Gammrus minus에서 찾을 수 있다(자 이제 그 기능에 대한 역가공을 해보자). 이러한 종류의 진화가 흔한 것이던 아니던, 그것은 선택을 설계라는 통화량에서의 거래로 보는 사고에 있어서의 근본적 오류를 배신한다.

두번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