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그림(The Big Picture)

이 글은 진화유전학자 앨런 오(H Allen Orr)의 대표적인 서평들에 대한 번역들 중 일부다.     글 싣는 순서

  1. <만들어진 신 The God Delusion> by 리쳐드 도킨스(Richard Dawkins)에 대한 서평: 개종을 위한 사명(Mission to Convert, 2007)
  2. <통섭: 지식의 대통합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by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에 대한 서평: 큰 그림(The Big Picture, 1998)
  3. <다윈의 위험한 생각 Darwin’s Dangerous Idea> by 다니엘 데닛(Daniel C. Dennett)에 대한 서평: 데닛의 위험한 생각(Dennett’s Dangerous Idea, 1995)
  4. <빈 서판 The Blank Slate: the Modern Denial of Human Nature> by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에 대한 서평: 다윈적으로 이야기하기(Darwinian storytelling, 2003)
  5. <이타적 유전자 The Origins of Virtue> by 매트 리들리(Matt Ridely)에 대한 서평: 조금 약한 사회생물학(The softer side of sociobiology, 1997)

큰 그림(The Big Picture)

[footnote]이 글은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에 대한 앨런 오의 서평을 번역한 것이다. [/footnote]에드워드 윌슨의 새로운 책은 야심차고, 모호하고, 철학적으로는 나이브하다.
Orr, H. A. 1998. The Big Picture (review of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by Edward O. Wilson; Knopf; New York). Boston Review (October/November 1998: pp. 42-45).


“예술 작업은 신비로운 것이다. 극단적인 마술이다; 그 외의 것들은 모조리 산수 혹은 생물학일 뿐이다.” -트루만 카포테(Truman Capote)[footnote]Capote, The Dogs Bark: Public People and Private Places (New York: Random House, 1973).[/footnote]

에드워드 윌슨은 크게 사고하는데 있어 조금도 주저해본 적이 없다. 비록 조그만 개미연구로 시작했지만, 그는 경력을 쌓아가면서 점점 더 크고 대담한 것들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먼저 그는 <곤충 사회 The Insect Societies>라는 책을 통해 곤충의 사회성을 형성하는 진화적 힘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나서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책,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을 통해 동물사회의 기저에 존재하는 생물학적 원리들을 정초했다. 또 <인간 본성에 관하여>에서 그는 유전자가 우리의 행동과 문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쟁적인 주제에 도전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퓰리쳐 상을 비롯해 국립의과학회에서 주는 상을 수상한 두 권의 책을 통해 그의 일생에서 가장 야심찬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그의 위업들로부터 기대할 수 있듯이, <통섭>은 우리의 주의를 끈다. <뉴욕 타임즈 서평>은 주목했을 뿐이지만, <뉴스위크>지가 마지막으로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부제를 단 이런 책에 대해 4페이지나 되는 지면을 할애한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통섭>은 당연히 <뉴욕타임즈>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이 책의 요점은 매우 단순하다. 모든 지식은-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을 넘어 자연과학까지 모두-통합될 수 있다. 윌슨은 이를 “통섭”이라고 부르는데, 문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한 층위의 사실들과 이론들을 다른 층위의 것들과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지식을 통째로 뛰어넘을 수 있다는 뜻이다. 자연과학은 이미 그런 연결을 시도해 왔는데, 생물학은 화학으로 화학은 물리학으로 흘러들어갔다는 것이다. 윌슨은 이제 사회과학과 인문학이 그런 대열에 동참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경제학자들은 행동생물학의 결과들을, 생물학자들은 예술의 기원에 대해 고민해야만 한다. 이러한 융합은 인문학을 고무시킬 것이고, 그동안 진보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했던 사회과학의 운명을 뒤바꿀 것이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윌슨의 통섭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지독한 과학만능주의와 환원주의의 죄악에 대해 항변하면서도, 윌슨은 통섭이 몇몇 사회과학 분야의 붕괴를 가져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인문학조차 “과학에 가까워 질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과학과 융합할 것이”다. “미지의 것들을 관조”해온 철학의 경우는 특히 안 좋은데, 통섭의 기제는 “가능한 많은 철학 분야를 과학으로 전환”시킬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의 대가는 엄청나다. 우리의 분절된 지적 지형도는 단 하나의 아름다운 지식체계로 융합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통섭이 자유로운 교육과 우리의 행성을 구할 수 있는 커다란 지혜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통섭적인 과학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사명이 보여주는 거대한 규모에서 이미 짐작했겠지만, 윌슨의 책은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다루고 있다. 통섭은 계몽주의와 논리실증주의라는 매우 낙관적으로 지식의 대통합을 시도했던 시도들에 대한 회고로 시작한다. 하지만 책의 대부분은 통섭의 사슬을 고리별로 살펴보는 데 할애되고 있다: 과학들, 마음, 문화, 인간 본성, 사회과학, 예술, 윤리학, 그리고 환경이 각각의 챕터들을 구성한다. 각 단계마다 윌슨은 더 높은 층위를 낮은 층위로 연결시키는것을 강조한다: 두뇌는 유전자로부터 나오고, 의식은 두뇌로부터 나오며, 문화는 의식을 가진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몇몇 경우에는 몇 단계의 층위를 뛰어넘는 연결도 시도되는데, 아마존 지역에서 나타나는 뱀모양의 고대벽화들(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약에 취했을 때 보이는 환상에서도)은 구대륙 원숭이들의 뱀에 대한 공포와 연결된다는 것들을 다룰 때 그렇다. 결국 윌슨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현재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지식의 경계들은 그 지식들이 본성적으로 쪼개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학자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경계일 뿐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직면한 지적 도전은 명백하다: 이처럼 인위적으로 쪼개져 있는 학문의 경계를 연결하는 것이다. 미래는 종합자들에 의해 점유될 것이다.
<통섭>이 말하는 것들 중 맞는 측면도 상당히 많다. 가장 놀라운 것은 글쓰기 그 자체다. 윌슨은 그의 책의 모든 문장에 동의하지 못할 사람들조차도 이해시키게 만드는 고상한 스타일로 책을 집필했다. 많은 이들은 그의 쿨한 어조에 놀랄 것이다. 그의 주장은 매우 혁명적인 반면, 그의 수사법은 매우 조심스럽다. ) 단 한가지 예외는 그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비상식적인 측면을 저주할 때 뿐이다. 그는 데리다나 그 동지들의 모호한 낙서들을 열심히 연구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경험은 결국 그가 느꼈던 첫인상을 전혀 바꾸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윌슨은 ‘안면실인증’처럼 두뇌의 어떤 부분의 장애로 인해 상대방의 얼둘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다른 부분은 인식하는 예들, 즉 과학이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현상들을 깊이 파고드는 훌륭한 작업을 시도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한 사람으로서, 무엇이 위대한 과학자를 만드는가에 관한 그의 회고를 읽으며 즐거웠다. 비록 이런 모든 것들을 단 하나의 논의속으로 끌어들이지는 않지만-지식인이 직감적으로 대담하게 시도할 수 있는- 그가 말하는 것들은 말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모든 것을 고려해보았을 때, <통섭>은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렇다고 이책에 흠이 없다는 건 아니다. 게다가 나는 통섭이 하나는 매우 일반적이고, 또 하나는 매우 구체적인 종류의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문제는 이 책이 매우 애매하고 철학적으로 나이브하다는 것인데, 이게 매우 중요하다. 게다가 이런 문제들 때문에 윌슨의 전체적인 시도들에 흠집이 나기 때문이다.
윌슨의 당혹스러울 정도의 모호함은 그의 계획에서 추구하는 논의의 심장부에서도 문제가 된다. 그건 통섭 그 자체에 대한 그의 비젼에서부터 시작된다. 가끔 통섭은 아주 강한 의미를 갖는다: 모든 지식은 물리학의 몇몇 법칙들로 환원된다. 이것이 엄밀하게 말하면 “지식의 대통합”이다. 하지만 때때로 통섭은 매우 약하게 표현되는데, 예를 들어 그가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는 부분에서 경제학자들과 생태학자들이 환경재앙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는 점을 다룰 때 그렇다. 이런 종류의 생각은 “당신의 학문분야와 나의 학문분야가 대화를 좀 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라는 아주 약하고 실용적인 의미의 통섭이다. 강한 의미의 통섭 없이, 약한 의미의 통섭만(누구인들 그러고 싶지 않겠느냐만)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당신은 환경의 건강성을 경제적 지표들로 측정하면서도 사회과학이 자연과학으로 붕괴되지는 않는 방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모호함이 윌슨이 애용하는 방법이다. 통섭은 그 강한 주장에 의문을 품는 이들이라도 그 약한 측면이 가지는 방어적인 측면으로 인해 매력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그런 흐릿한 표적이다(당연히 여러분은 경제학자가 환경을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윌슨은 놀랍게도 통섭에 이르는 방법론에 대해서도 매우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그는 전형적으로 그의 연구를 어떤 변명도 없이 환원주의적인 방법으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50페이지쯤 하다가, 그는 갑자기 부분의 합이 전체가 아니라는 창발성을 언급하면서 세포와 지구에서 보이는 그런 현상들을 언급한다. 지식의 대통합을 주장하는 책을 쓸 정도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런 주제들을 다루어야 한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결국 창발성은-정말 실재한다면- 모든 것을 바꾼다. 하지만 윌슨은 환원론적인 통섭뿐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종합에 의한 통섭”이라는 전일론적 방법도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통섭’이라는 개념과 ‘지적인 연결성은 좋은 것이다’라는 명제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건 뭐 반대할만한 철학도 없고, 그 둘의 특별난 점도 없다.
이러한 모호함은 통섭의 결과를 기술하는 부분, 특히 과학과 예술의 관계를 다루는 곳에서 더 문제가 된다. 어떤 곳에서 윌슨은 통섭적인 과학이 결국엔 인간 창의성의 생물학적 기원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한다-이건 전적으로 과학자들의 영역이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그는 결국 과학이 우리가 어떤 그림이 다른 그림보다 훨씬 낫다라는 것을 알려줄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한다-이건 전통적으로 예술가들의 영역이었다. (윌슨은 신경생물학이 왜 우리가 어떤 작품을 다른 작품보다 선호하는지에 대한 내재적 규칙을 밝혀줄 것이라고 믿는다. 20세기의 예술이 보통 사람들이 혐오하는 스타일을 추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규정된다는 사실은 그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듯 하다). 마침내, 그는 과학이 “예술도 결국 마음의 발달과정의 기저에 놓인 내재적 규칙들에 의해” 이끌어진다는 것 뿐 아니라, 그런 규칙들이 적응적이라는 점까지도 결정해줄 것이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과학이 가진 이러한 종류의 역할은 다른 것들보다 더 그럴 듯해 보이지는 않는다. 만약 내가 생물학이 창의성에 관해 더 잘 알게 해준다고 믿지만(그럴 듯 하다), 그것이 예술을 평가하는 데에는 별다른 공헌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다면(좀 더 그럴 듯하다), 나는 통섭의 팬인가?
윌슨의 책에서 두 번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책이 철학적으로 빈약하다는 데 있다. 우리 과학자들은 당연히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악명높을 정도로 직선적인 사고를 한다. 과학자들은 단순하게 표적을 정하는 것이 모든 문제를 제대로 만든다는 것에 대해 매우 확신에 차 있고, 그거세 대해 으스대곤 하는 경향이 있다. 비록 온건하게 표현하고는 있지만, 윌슨은 이런 과학자들의 카우보이 행세에 쉽게 빠져들어가 버린다. 많은 철학적 문제들-몸과 마음, 자유의지, 논리실증주의의 실패-이 그의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윌슨은 이런 문제들을 쉽게 일소해버린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해결책은 놀라울 정도로 무의미하다. 결국 윌슨이 그런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그는 그 문제들의 절반의 절반도 보지 못하고 있고, 그 일면마져도 깍아내리기 일쑤다. 그가 그의 해결책을 제시할때-가끔은 한줄로- 그는 그 누구도 그렇게 간단한 대답이 있을 것이라고 이전에 생각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지식의 대통합을 시도하면서도 윌슨은 가장 최근에 그런 시도에 열광했던 논리실증주의의 실패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는다. 실증주의자들은 과학의 언어들을 정식화함으로써 그리고 이렇게 정식화된 몇몇 지침서들(확증주의)에 의해 과학자들이 매우 객관적인 진실에 다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논리실증주의는 망가졌고 실패했다. 그리고 윌슨은 그 실패의 원인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 실패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부족함은 그들이 두뇌의 작동방식을 몰랐던 것으로부터 기인한다. 그것이 내 생각에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좋은 소식은 윌슨이 우리에게 신경생물학과 인공지능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고 있다고 확신시켜주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두뇌가 작동하는 방식을 알게 되면, 즉 우리의 신경계가 실재에 대한 우리의 왜곡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게 되면, “객관적인 진실의 성배”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논증을 어디서부터 손대야 하는지 참 어렵다. 우선,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지식이 뇌과학을 정초시키는 것으로부터 구성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확실히 문제거리다: 우리의 두뇌에 관한 지식은 윌슨이 제거하고자 했던 매우 주관적인 왜곡들로 인해 더렵혀지고 따라서 불확실한 상태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 또 한가지, 과학과 “궁극적으로 객관적인 지식이라는 목표” 사이에는 두뇌의 청사진을 무시하는 것 이상의 자리가 있다. 대부분의 과학적 진실은 귀납에 의한 일반화에 의해 구성되며, 따라서 영원히 의심의 여지가 남을 수 밖에 없다. 버트란드 러셀이 어디선가 말했듯이, 닭이 귀납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주인이 매일 아침 그에게 밥을 주러 온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하지만 어느날 아침엔 주인이 와서 닭의 목을 따 버릴 수도 있다. 핵심은 과학적 진실이라는 것들이 논리적으로 비절대적인 운명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아무리 시상하부에 대해 더 잘알게 된다해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이건 따로 떼어낼 수 있는 사건들이 아니다. 윌슨의 책은 대부분 이런 종류의 표면적으로는 매력적이지만, 결국은 단지 표면적인 철학적 이야기들로 도배되어 있다.
본전 뽑기
구체적인 문제들로 들어가보자. 세 가지 문제가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윌슨의 비젼에 있어 문제가 된다: 그는 인간의 문화를 생물학과 연결시키는 작업의 결과를 지나치게 단순화했다; 그는 통섭을 실행해야 하는 곳에서조차 그 어려움을 간과했다; 그리고 그는 통섭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기까지 하다는 정당한 이유들(우리의 정신이 가진 한계들과 관련된)을 무시했다. 이런 문제들을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자.
윌슨은 대부분의 시간을 문화를 생물학으로 통섭적으로 연결시키려는 시도에 할애했다. 윌슨은 당연히 유전자가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나이브한 유전자 결정론자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대신 그는 발생유전학자들의 논의에 의존하고 있다: 유전자는 “후생유전학적 규칙–유기체가 어떻게 생기고 행동할 것인지에 관한 발생의 대물림된 규칙성”을 만든다. 이러한 내재된 규칙들이 당신의 외모와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내지된 규칙은 여러분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는 환경(문화를 포함한)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암에 걸릴 수 있는 유전적인 형질이 당신이 암에 걸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먹는 것, 태양광선에 노출되는 정도, 등등의 환경에 의해 변할 수 있다) 따라서 후생유전학적 규칙은 내재된 편차가 되고, 유전적 결정력은 약해질 수 있다.
하지만 윌슨에 따르면, 이러한 유전적 경향성은 조금씩 새는 경향이 있어서 “문화적 진화를 반대방향이 아닌 한 방향으로 편향시키고, 결국 유전자를 문화와 연결시킨다.” 그말은 결국 유전자란 우리에게 본성이 있다는 말이고, 이러한 본성이 우리가 만드는 문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문화를 이해하기 원하는 사회과학자들은 생물학을 공부해야 할지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주장이 –매우 약하고, 유전적이지도 않고, 결정론적인 형태의– 문제가 된다는 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원리적으로는 생물학은 우리가 다른 방식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만 행동하게 만드는 경향을 어느 정도 결정짓는다. 요점은 이걸 거꾸로 했을 때 잘 드러난다. 어떤 유기체-아주 똑똑한-를 상상해보자. 이러한 유기체의 생물학적 구조는 그 행동이나 문화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긴 어려울 것 같다. 6피트 정도 되는 크기의 유기체가 6인치 크기의 성당을 지을 성 싶지는 않다. 눈이 없는 유기체가 담청빛 하늘에 대한 안 좋은 시를 쓸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후생유전학적 규칙이 지닌 힘이 확산되어 나갈 것 같다는 것도 똑같이 분명하다. 사회과학자들의 관심을 끄는 어떤 현상들은 후생유전학적 규칙들을 포함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것들(예를 들어 문법)은 그렇지 않다. 다른 현상들은 약하기는 하지만 후생유전학적 연결고리를 포함할지도 모르고(인간의 협동 같은), 다른 것들은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원형 건물들 짓는 것과 포스트와 빔을 이용해 건물을 짓는 것). 전자의 경우 유전자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본전을 찾을 수 있다. 후자의 경우엔 그렇지 않다. 그 중간 정도의 일들이 가장 흔할 것이다. 그런 경우엔 후생유전학적 경향이 우리를 어딘가로 이끈다고 말하기엔 그 연결고리가 너무 약하다.
어딘가로 간다는 것이 결국 모든 것을 의미한다. 과학자들은 강력한 설명들을 찾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러한 설명들을 갖는다는 것은 별반 문제가 되지 않는 2차나 3차반응으로부터 진짜 중요한 1차반응을 구분짓는 작업에 의해 좌우된다. 문제는 A와 B 사이에 어떤 정형적인 연결관계가 있다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라던가, B에 대한 설명이 한 수준 아래의 설명으로 내려 갈 수 있다는 식의 통섭적 이상이 아니다. 문제는 그게 정말 작동하느냐는 것이다. 우리의 이론이 설명이 필요한 흥미롭고 중요한 사실들을 진짜로 설명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현상에 대한 유전적 연결고리가 약해질 수록, 그 설명력은 떨어지게 된다. 그게 우리가 유전적 연결고리가 약하다고 할 때 의미하는 것이다. 문화의 경우, 이와 같은 설명력의 감소가 진부할 것들을 빨리 알아챌 때의 통찰로 나타난다. 이런 걸 보려면, 생물학의 법칙을 따르는 예술이나 문학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측해보면 된다. (이런걸 하기 위해 여러분은 특별한 연습을 할 필요도 없다; 사회생물학적 예측이란 DNA-binding motif나 ‘돌연변이-선택’ 균형과 같은 기술적 묘안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나는 윌슨의 책을 읽기 전에 다음과 같은 결과를 예측해봤다: 예술가들은 벌거벗은 여성들을 묘사할 것이다(우리의 예술가들이 남성이라는 가정하에); 대부분의 사랑에 관한 시들은 시인의 여동생에 관한 묘사를 담지는 않을 것이다(근친상간을 피하는 것은 유전적이므로); 화가들은 자외선이나 적외선에서 색이 나타나는 물감을 쓰지 않을 것이다(우리에게 안 보이니까). 마지막 예는 윌슨이 통섭에서 들고 있는 예와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진다. 우리의 언어에 나타나는 색깔의 순서가 우리의 망막에서 색을 인지하는 시세포들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대강 유추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놀라울 것도 없이, 검은색과 흰색, 붉은 색과 초록색이 대부분의 언어에 나타나는 색감들이다, 반명 연두색은 나중에 나타난다. 알만한 가치가 있는 반면, 이러한 것들은 작은 통섭적 성취다. 우리의 눈이 연속적인 빛의 파장을 분절적인 색깔로 변환시킨다는 것은 생물학의 흥미로운 주제이고 사실이지만 이러한 사실이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기술하는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그다지 명백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개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색깔에 대한 언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에 모두 동의할 수 있다.) 만일 이런 것이 통섭이라면, 우리는 미술비평가들이 생물학 여름교실에 참여하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핵심은 이러한 생물학으로부터의 통찰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 통찰 따위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문화와 생물학의 강한 연결고리는 (윌슨이 가장 좋아하는 이미지이기도 한데)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만약 그러한 연결고리가 이처럼 약하고 별볼일 없는 것이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어떤 것들은 과학이 관여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생물학자들은 결국 낮은 층위의 과정들을 언제나 무시하며, 누구도 이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을 이해하려면, 아주 유명한 진화적 논증, 왜 대부분의 종들은 암컷과 수컷의 비율이 비슷한가에 대한 로날드 피셔의 이론을 보면 된다. 여러분이 이미 통섭의 광팬이라면, 아마도 생물학 아래의 영역들을 파고들어 화학과 물리학에 대한 통찰로 가득한 답을 기대할 것이다(예를 들어, X 염색체는 Y염색체와 같은 질량을 지니고 있으므로 따라서 X와 Y 염색체를 지닌 정자는 수정될 확률이 동일하다는 조건 하에 액체 속에서 동일한 속도로 움직인다와 같은). 하지만 진짜 설명은 전혀 이렇지가 않다. 대신 피셔는 한 성별의 비율이 적어지면, 그 성별을 가진 개체들은 평균적으로 다른 성별을 가진 개체들보다 더 많은 자손을 낳을 수 있는 이득을 취한다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해서 좀 더 드물게 존재하는 성별을 더 만드는 어떤 종류의 내재적 경향성이라 할지라도 결국 좀 더 이익을 취할 수 있게 된다. 50:50은 안정적인 평형일 뿐이다. 이러한 논증은 화학이나 물리학의 설명을 전혀 빌려오지 않는다. 게다가 이러한 설명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그러한 세부묘사와는 독립적으로 사실들을 설명해낸다는 데 있다. 이 말이 정자나, DNA나 쿼크와 같은 세부적인 물질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당연히 그런 것들은 존재한다. 다만 설명이 작동하는 곳에 그런 물질들이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물리화학적인 설명을 고집하는 것은 ‘적응도’나 ‘내재적 경향’-그 아래 수준에선 알기 힘든-과 같은 추상적 특성에 의해 기술되는 실재 이야기를 놓치는 우를 범하게 할 수 있다.

이 모든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존재론적 통섭(ontological)이라고 부를 수 있는 종류의 것과(높은 층위가 낮은 층위에 의해 구성된다) 인식론적 통섭(epistemic)이라 부를 있는 종류의 것(높은 층위가 낮은 층위에 의해 설명된다)들을 구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피셔의 이론은 유전자가 DNA로 이루어져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사실에 의존하지도 않는다(이건 그가 왓슨과 크릭의 발견이 일어난 23년 전에 살았던 당시에 이론을 만들었기 때문이지만).

윌슨은 지속적으로 이런 두 종류의 통섭을 혼용하고 있다. 이러한 점이 그로 하여금, 예를 들자면, “소비자들은 진화론적 역사를 지닌 신경세포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경제학은 생물학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따위의 말을 하게 만든다. 경제학자들이 생물학을 좀 더 알 수 있으면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물학적 수준에서 정초되었을 때 경제학이 강력한 설명력을 지닐 수 있다는 말이, 소비자들이 질척한 물건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같은 종류의 착각이 윌슨으로 하여금 가끔씩 어떤 것들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와 그 설명을 하나로 묶게 만든다. 여기에 그 예가 있다. 그는 생물학이 예술적 창의성을 설명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과정(두뇌를 도표화하는) 중에, 창의적인 마음이 이해될 수 있다면, 과학자들과 인문학자들은 협업을 해야 할 것이다. 그 협업은, 이제 그 초기 단계에 와 있는데, 결국 혁신이란 신경 회로와 신경전달물질의 분비에 의해 기초된 구체적인 생물학적 과정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낼 것이다.

글쎄 물론 그럴 것이다. 창의성이 신경회로와 신경전달물질 외에 무엇으로 구성될 수 있겠는가? 창의성에 대한 물리학적 구성 성분에 관한 주장이라면, 윌슨의 주장은 충분이 옳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것에 대한 설명으로서 그것은 기대할 것이 별로 없다. 어떤 이는 성비가 원자들에 의해 설명될 것이라고 기대할런지도 모르겠다.

통섭의 결과로 구성될 것들에 관해 이처럼 얼렁뚱땅한 주장을 하는 경향 때문에, 높은 수준의 현상을 합법화하는 데 있어 혼란이 야기될 수 밖에 없다. 윌슨이 예를 들어, 윤리학적 현상들도 결국 신경생물학적이라고 예측했을 때,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어떤 흥미로운 결론들이 뒤따라나올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여기서 윤리학을 생물학으로 환원시키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 이들은 한가지 예측에 더 답해야 한다: 수학적 사고도 신경이 관여함에 틀림 없다. 따라서 당연히 당신은 윤리학적 진실은 생물학에 불과할 뿐 아니라, “2+2=4″와 같다라는 결론도 이끌어내야만 한다.

통섭: 생각보다 어려운 것

윌슨은 그 해결을 위해 새로운 통섭에 요구되는 몇 가지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가장 분명한 것은 마음의 문제다. 윌슨이 설명하고 있듯이, 정신 현상은 두 가지 본질적으로 다른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것들은 소위 ‘의식에 관한 쉬운 문제(easy problem)’와 ‘어려운 문제(hard problem)'[footnote]나도 자세히는 모르므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궁금한 분들은 인지철학이나 인지과학에서 의식을 다룰 때 등장하는 이런 철학자들의 구분을 직접 찾아보시기 바란다. 계속 읽어내려가다보면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footnote]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쉬운 문제란 전형적인 뇌연구와 관련된 문제다: 두뇌가 어떻게 외부 자극에 반응하고 기억을 저장하는가? 따위가 그것이다. 어려운 문제는 더 어렵다: 두뇌는 어떻게 주관적인 감정(subjective feeling)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 목 바로 위에 놓인 회백질이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가?

윌슨은 의식이 그의 통섭 계획에 의해 대표적으로 풀리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마음은 예술, 문학, 미학, 종교-인간의 감정과 관련된 향유물들- 등을 신경세포와 이온 채널과 같은 생물학과 연결시킬 수 있는 중요한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범위를 과학의 영역 속에 위치시키려는 어떤 시도라 할지라도 불가피하게 마음을 통해야만 한다. 윌슨은 이를 인정하면서, 의식을 “해결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부른다. 그리고 마음은 “통섭 프로그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과학이 “마음의 물리학적 기반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실패를 했다고 인정하고, 이것이 계몽주의적 낙관주의의 끝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이러한 실패는 통섭적 과학이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에 관한 것들은 철학자나 시인들에게 맡겨둘 수만은 없다.

하지만 윌슨은 의식의 어려운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과소평가했고, 계속해서 통섭이 이 이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점을 과대평가했다. 게다가, 아마도 이 책의 가장 주요한 문장일 듯 한데, 윌슨은 그가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비록 의식의 문제에 관한 막다른 길이나 자세한 설명에 대해 배운자로서 책을 써내는 것이 철학자들의 본업이라 할지라도, 의식의 어려운 문제는 개념적으로는 해결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여기 그 해결책이 있다. 첫째, 우리는 의식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색인지에 관한 신경생물학을 모두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만일 그가 색맹이라면 “파란색”이 무엇인지에 대한 주관적 경험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윌슨의 생각에서 이러한 부자격성은 요점을 비껴나 있다. 대신 그는 이상하게도 중요한 경계가 다른 곳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과학과 예술의 적절한 역할을 이해하는 데 있다. 윌슨에 의하면 과학은 “누가 파란색이나 다른 감각을 느낄 수 있고, 누구는 그런 것들을 느끼지 못하는지와, 왜 그런 차이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제공한다. 반면 예술은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감정을 전달한”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의식의 어려운 문제는 과학과 예술의 영역을 가르는 이런 것으로부터 찾아질 수가 없다. 과학의 역할은 사람은 파란색을 볼 수 있고, 바위는 그렇지 않다는 것과 같은 사실을 지적함으로서 문제를 단순화하고, 그럼으로써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아마도 사람은 두뇌가 있고, 바위는 없기 때문에). 하지만 확실히 이런 것들이 과학의 역할을 축소시키지는 않는다. 주관성에 대한 몇 가지 합법적인 과학적 질문을 지적할 수 있다고 해서, 이러한 것들이 유일하게 합법적인 질문임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로 여기 또 다른게 있다: 도대체 어떻게 주관적 감정이 두뇌로부터 떠오르는가? 의식의 어려운 문제는, 확실히 하자, 과학적으로도 완벽하게 적법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쉬운 질문들을 지적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윌슨은 효과적으로 의식의 제거주의의 한 분파를 소개한다. 그는 다니엘 데닛이 했던 방식의 현상을 평범하게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어떤 학자들의 집단만이 이런 문제를 점유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방식으로 지적 경계를 나눈다. 만약 여러분이 이 논증을 인정한다면,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데, 이는 그게 풀렸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도 그것에 대해 정당하게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건 지식의 지형도를 분할하는 게 아니라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의 입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엔 좀 이상한 해결책이다.

하지만 문제는 더 나빠진다. 왜냐하면 이후 과학적 사실과 예술이 “결코 서로 간에 번역해 낼수 없는” “전통적 지혜”가 있다는 논의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감정과 과학자의 사실이 하나로 묶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이, 윌슨은 우리에게 신경생물학적으로 산출된 실험자의 정신의 내용을 읽을 수 있게 하는 미래의 과학(마음 판독기)을 상상해보라고 말한다. 피험자는 슬픈 소설을 읽는다, 그리고 우리는 기계에서 나온 마음의 대본을 읽는다 그리고 우리도 슬퍼진다. 나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그렇다는 걸 안다. 왜냐하면 이런 이야기는 일상언어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현상의 하이테크 버젼일 뿐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나에게 말할 때, 당신은 당신의 마음의 상태에 대해 뭔가 드러낼 것이고, 나는 -이미 내 머리속에 그런 기술을 가진- 그걸 해독하는 방법을 안다. 당신이 내게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면, 나도 슬픔을 느낀다. 당신이 내게 농담을 하면 나는 웃는다. 우리는 감정을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전달과정이 윌슨의 것과 다른 유일한 차이는 윌슨의 것은 인간이 만든 기구(비생물학적인)가 필요하다는 것 뿐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의 요점은 정말이지 불분명하다.

더 중요한 것은, 감정을 전달하는 데 있어 과학이 가지고 있다는 이처럼 큰 역할은 의식의 어려운 문제로 우리를 데려가지도 못한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주관적인 감정을 전달할 수 있으며 그럴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주관적인 감정이 애초부터 가능하냐이기 때문이다. 수퍼-EEG를 예측한 것은 감동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요점과 무관하다.

윌슨은 이러한 미래의 기계인 ‘마음 판독기’가 중국어 서예(중국학자들의 말을 인용해서)의 과정과 얼마나 닮았는지에 이 장을 할애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박학다식함의 표현은 참으로 감동적이지만, 불필요한 것이다. 많은 독자들은 윌슨의 박학다식함에 탄성을 지르겠지만, 곧 그가 의식의 “쉬운” 문제조차 제대로 풀지 못했다는 것은 곧 망각할 것이다.

불가능한 임무?

그것을 해결할 방법조차 상상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함과 연관되어 있는 의식의 어려운 문제에 대한 반항은 우리가 윌슨의 전체적인 계획에 딴죽을 걸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제공한다: 아마도 의식은 우리의 능력 밖에 있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그것을 알아낼 방도조차 없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능력 밖에 있는 문제들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이러한 생각을 현대적으로 표현한 것은 노엄 촘스키였지만, 그것은 철학자 콜린 맥긴(Colin McGinn)의 논의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비록 맥긴은 철학자였지만, 그의 논증은 매우 과학적이며 진화적이기까지 하다. 그건 이렇다. 고양이의 두뇌는 자연의 본성에 관한 깊은 진실을 탐구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연명하기 위해 진화했다. 따라서 내 고양이 보리스의 두뇌는 아주 정교하지는 않다. 보리스는 새나 쥐, 다른 고양이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지만, 체스라던가 팩스기계라던가 다용도 탁자에 이르면 무용지물이 된다. 비슷하게 우리의 두뇌도 자연의 깊은 진실을 탐구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 아니라, 그냥 하루하루를 연명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인지적 진화의 절정에 이른 것이라거나 우리의 침팬지 같은 두뇌가 두뇌가 이를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것이라고 믿을 이유가 없다. 대신 우리도 다른 종들처럼 어떤 것들에는 지적으로 매우 유능하지만 다른 것들에는 그렇지 못하다고 가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현상이나 이론에는 “인지적으로 열려 있고” 어떤 현상(실재임에도)이나 이론(진실임에도)에는 “인지적으로 닫혀 있”다.

이런 종류의 “불가지적(mysterian)”인 태도는 윌슨의 결론과는 정반대의 길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우리의 미학적 선호부터 단단한 물리학까지의 진정한 통섭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인지적 능력의 정량적 한계(우리는 942,921 개의 숫자를 기억할 수 없다)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환원주의적 프로그램 안에서 주요한 단계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A라는 현상과 B라는 현상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이들을 연결짓는 본성에 관해서는 끊임없는 애매모호함에 마추지게 될 것이다. 윌슨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그런 우리의 두뇌는 홍적세의 사바나에서 진화했고, 의식의 주요 문제들을 풀기 위해 진화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의식은 분명 가장 문제시되는 부분일 것이다(다른 하나는 자유의지라는 인간 법칙을 생리화학적 결정론이라는 자연법칙으로 연결시키는 문제다).

비록 맥긴과 촘스키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전부는 아닐지라도, 전통적으로 구분되어 있는 지식의 경계는 우리의 인지적 적합성의 영역 사이에 놓인 자연적인 강제적 구분을 표상하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어떤 현상에 대해 뚜렷하게 생각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함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의 경계를 그리는 경향성의 기저에 있는지도 모른다: 인문학이 한쪽이고(내게 당신이 어떻게 느끼는지 말해주는) 과학이 그 반대쪽이다(내게 당신의 두뇌가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말해주는). 만약 사실이라면, 환원이 흔히 체계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은 학문 간이 아니라 학문 내에서 더 쉬울 것이다.

진화생물학자로써, 나는 불가지적인 관점과 같은 어떤 것이 진실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발견했다. 대안은-경계 없는 인지능력- 순전히 비생물학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나는 이런 결론에 다다른 유일한 생물학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소식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비록 과학이 주관적 감정이라는 것에 대해 영원히 무능력하다고 해도, 과학은 추적 가능한 다른 문제들을 붙잡을 수 있다: 촘스키가 처음으로 제안했던 것처럼 우리의 인지 능력의 영역이 가진 한계를 느껴보는 것과 같은.

윌슨이 이런 불가지적 우려에 대해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혀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윌슨으로부터 왜 우리의 한계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시도보다 그의 야심찬 통섭의 시나리오가 더욱 가능하다라는 흥미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또는 왜 그가 그러한 한계가 그의 계획에 별다른 장애가 되지 않는지를 말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나는 윌슨이 “과학은 (고맙게도) 언제나 귀머거리들이었던 우리의 과거의 모습이 결국은 패배주의에 찌든 모습이었을 뿐이었음을 우리에게 확신시켜주었고, 따라서 과학자들이 언제나 해왔던 이러한 건강한 싸움을 포기한다는 것은 멍청하고 무책임한 일”이라고 주장할 것이라고 예상한다-확실히는 모르겠다. 그리고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논점은 과학자들이 의식, 예술, 자유 의지 등을 정복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에게 그런 정복의 성공을 보장해 줄만한 어떤 배경이라도 있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우리가 윌슨의 비현실적인 지식의 대통합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는지 마는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러하다면, 윌슨이 그의 통섭 시나리오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더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계획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그가 책의 첫머리에서 인정하듯이, 통섭은 과학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이며 그가 아름답고도 깊은 만족을 찾았던 형이상학적 관점이다. 역설적인 것은 윌슨 자신의 ‘진화론적 과학’이 이러한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한 모든 이유를 제공했다는 것이고, 그 모든 이유라는 것에는 우리의 두뇌-임시적이고 맹점으로 가려져 있는-로부터 완전한 통섭이 일어날 정도로  그러한 확실한 지식이 가능한 것인지를 의심하는 일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2 thoughts on “큰 그림(The Big Picture)

  1. 수고하셨고 잘 읽었습니다. 윌슨에 대해선 해러웨이를 읽다가 접했는데, 결국 한국에서 유행하는 통섭으로 연결이 되더군요. 문화와 생물학의 관계, 혹은 감정과 과학의 관계는 많은 흥미로운 생각거리를 제공하네요. 저는 그 관계가 본질적으로 연속적이냐 불연속적이냐를 따지는 것 이전에 그 사이에 놓인 무한한 애매모호함이 둘 사이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질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뭐 그런 생각이 듭니다. 쥔장껜 죄송하지만 앞으로 이어질 번역 기다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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