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백투더소스에 관한 단상


기괴한 소문(괴담 같은)이 퍼져나가지 않도록 출처를 표시하자는 취지의 백투더소스에 그닥 딴지를 걸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가 이 캠페인을 진작 알았으면서도 동참하지 않는 이유는, 비록 그 취지가 “대단한 진보적인 정치적 의도도 없고, 여타 전복적 가치도 혹은 그 반대로 도덕주의적 무언가를 담고 있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께름직한 느낌을 가지기 때문이다.

백투더소스에 동참하는 이들의 특성상, 한마디로 뭉뚱그리기는 어렵지만 나는 거기에서 스켑틱스 진영의 냄새를 맡게 된다(뒤늦게 이런 느낌이 맞아들어가는 것은 이제 거기서 쿨게이의 냄새를 맡아버렸기 때문이다. 아직은 내 후각이 죽지 않은 듯 하다). 스켑틱스 혹은 회의주의에 어떤 본질적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스켑틱스가 기초하고 있는 과학적 사실이라는 것이 발견되고 전파되고 해석되고 이론으로 굳어지는 과정에 대한 회의주의 진영의 이해가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데에 있다. 과학적 사실들 중에 실험으로 증명되어 불변의 것으로 굳어져 버린 종류의 것들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과학의 또 다른 목표는 그러한 사실들을 지속적으로 파고들어, 새롭게 발견된 사실들까지를 설명하는(즉 설명력의 범위가 넓어지는) 이론을 건설하는 것을 비롯해서, 점점 더 구체적으로 나아가 설명력의 한계를 축소하는 이론을 건설하는 것까지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과학이 발견한 사실은 이론에 무관하지 않고, 이론은 새롭게 발견되는 사실에 의해 언제나 제한받고 재조정되며, 이렇게 구성된 이론이 또다시 과학적 사실들에 영향을 미친다. 초간단하게 말해, 과학적 사실들은 초월적 진리의 보편집합이 아니라, 현재에 있어 잠정적인 사실들의 집합이라는 말이다.

회의주의의 극단적 표현은 이러한 과학적 사실들의 성격을 망각하고, 지나치게 사실들에 대한 추구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들을 진리로 왜곡하고 이를 통해 사실들에 무지한 이들을 계몽시키려 하는 것이다. 나는 회의주의가 지닌 그 현대판 계몽주의를 혐오한다. 광우병괴담을 유포하는 자들은 과학에 무지하다.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적 사실에 대한 무지가 즉시적으로 그들에 대한 계몽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따져야 할 것은 몇몇 대중의 그러한 무지가 사회적으로 미칠 수 있는 영향과 파장을 분석하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자면, 교회 내에서 그리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동호회를 조직해서 창조과학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굳이 스켑틱스가 나서 훼방할 성질의 것이 못된다. 회의주의자가 나서야 할 때는, 이러한 시도들이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강의실로 전파될때라던가, 혹은 교과서에 창조과학이 실리는 시도가 진행될 때 뿐이다. 개인적 신앙에 대해 과학자가 미신이라고 왈가왈부하는 것이 우스운 일이듯이, 모든 과학적 무지몽매에 대해 회의주의자들이 왈가왈부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어떤 이들은 초월명상을 통해 생활의 행복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초월명상에 어떤 과학적 기반이 없다고 해서 회의주의자들이 행복해하는 그 개인을 비난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초월명상을 하는 조직을 완전히 없애려 하는 시도 따위는, 그 조직이 사기를 친다던가 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나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사이비 종교도 그렇다. 모든 사이비 종교가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이비종교의 종말론적 행태를 뿌리뽑고자 할 때는, 그 사이비종교가 사회와 그 종교에 속한 개인들에게 끼친 해악을 가늠해 본 후에야 가능한 일이다. 혈액형으로 성격을 따지는 문제도 역시 그러한 취향은 인정하되, 그것이 회사의 신입사원을 뽑는 문제처럼 심각하게 적용될 때에나 회의주의자가 등장할 일이다. 그럴 때 회의주의자는 멋지다. 하지만 그 외의 곳에서 개개인의 심성을 문제삼는 계몽주의적 선지자로 자처하는 회의주의자들은 인정머리가 없다.

백투더소스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매우 상식적이고 소소한 시도라면 나는 그 캠페인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 문제는 백투더소스가 겨냥하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아직 내가 정확히 알기 힘들고(그것이 그저 개인적인 영역에 머물고 있는 개개인의 행복에 관한 것인지, 혹은 조직화된 어떤 집단에 관한 것인지), 또 지나치게 나아가면 소스 없이 벌어지는 그 어떤 논의들을 원천 차단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록 그 소스가 조금 잘못되었다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소스가 그야말로 지엽적인 문제가 되는) 글이 있을 수 있고, 소스의 질이 크게 문제가 되는 글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차이를 가리지 않고 무작정 ‘백투더소스나 좀 하시죠’라고 들이대는 것은 극단적인 회의주의자들의 선교주의 혹은 계몽주의가 불러온 폐해와 별반 다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드는 것이다.

추신: 그렇다고 내가 백투더소스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정말이지 열심히 그걸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다.

12 Comments

  1. 저런 기본적인게 캠페인 대상이 되다니 황당하다는..

  2. 쿨게이의 냄새를 맡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드신 사례랑 엮어보자면 저는 골수 기독교도 입니다^^ 이글루에서 샘물교회를 저보다 많이 변호한 사람도 몇 없다고 생각하는데, ‘쿨게이의 냄새’라는 평가를 들으니 좀 당혹스럽군요^^;;;

  3. !@#… 김우재님/ 관심 감사하고, 우려 잘 읽었습니다. 🙂 다만 안심하셔도 좋을 것이… “근거를 못대면 주장하지 말자”보다는 “근거를 왜곡하는 것에 기여하지 말자” 쪽에 가깝습니다. 예로 들어주신 종교만 하더라도 소스의 왜곡 문제가 아니라 그 소스의 내용이 주장하는 바에 대한 논쟁이고 그 논쟁을 어떤 환경 조건 속에서까지 적용시키냐 하는 것인데, 그것은 백투더소스 캠페인과는 별반 관계가 없습니다. 여하튼 그런 식으로라면 극단적 회의주의자들이든 그저 소문의 진상이 궁금한 사람들이든 누구나 자기 편할 대로 활용해주시면 되는 그런 캠페인입니다.

    저련님/ 이런 기본적인게 캠페인 대상이 되서 가장 황당한 것은, 이런 캠페인을 출범시킨 저 자신입니다. –;

  4. 그러니까 요는, 진화론 따위는 믿지 않으신다는? 혹은 진화론과 기독교는 화해가능하다는? 전자라면 진정한 쿨게이요, 후자라면 쿨게이 취소합니다.

  5. 이 글은 두 번이나 읽게되네요. 최근 쓰신 ‘쿨게이’ 관련글들의 연장에서 염려를 표하신 것 같은데요. 백투더소스 켐페인은 공격적이고, 권위적인 방식의 유치한(나 잘났음!) 계몽주의라기 보다는 그저 말씀하신 것처럼 ‘상식주의’에 대한 호소에 가깝지 않나 싶어요. 위 캡콜님께서 위에 표하신 취지도 그렇고요. : )

  6. 백투더소스에 공감하는 사람으로서 이건 건전한 토론을 위한 상식적인 제안이라 생각합니다.
    자료의 인용출처를 밝히는 것은 회의주의나 실증주의 등의 특정한 학파를 따지지 않더라도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인정하는 좋은 방법론입니다. 다른 사람의 주장이나 자료를을 인용하면서 출처를 생략하게 되는 경우, 어느것이 원본인지 조차 알수 없기 때문에 토론이 불가능한 혼란에 빠집니다. 기존의 성과를 활용할수도 없고요. 어떤 기반을 가진 사람이라도 의미있는 토론을 원한다면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Webmentions

  • 재수없는 하루 2009/05/20

    김우재님의 백투더소스에 관한 단상을 보면 회의주의자의 ‘메시아 콤플렉스’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 글의 한 부분을 옮겨보자면,
    예를 들어 사이비 종교도 그렇다. 모든 사이비 종교가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이비종교의 종말론적 행태를 뿌리뽑고자 할 때는, 그 사이비종교가 사회와 그 종교에 속한 개인들에게 끼친 해악을 가늠해 본 후에야 가능한 일이다. 혈액형으로 성격을 따지는 문제도 역시 그러한 취향은 인정하되, 그것이 회사의 신입사원을…

  • Crete의나라사랑_2009년글 2009/05/20

    백투더소스 캠페인 단상
    어떤 청와대 비서관에 대한 추억

    capcold님께서 ‘백투더소스 캠페인: 출처를 중시하는 습관’이란 캠패인을 시작하셨다 (캠페인 링크).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백투더소스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