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위대한 몽상가들을 위해! 사회당 화이팅!

기본소득(Basic Income)이라는 제도가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사회당이 처음으로 제안했고, 민노당과 진보신당도(그러나 약간은 소심하게) 진지하게 고민 중인 그런 제도다. 이 제도는 아주 간단하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국민 모두에게 기본적인 소득을 안겨주자는 것이다.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기본소득은 ‘무조건적 기본소득’의 줄임말로, “심사와 노동요구 없이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지급되는 소득”이다. 무조건적이라는 의미는 “미성년자를 포함한 전체 사회성원에게 지급되며 심사절차나 어떠한 의무사항도 수반되지 않음을 뜻”한다. 얼핏보면 미치광이같은 제도다. 그리고 너무나 간단해서 터무니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브라질 정부는 미치광이 정부다.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2003년 집권과 동시에 파밀리아(Bolsa familia, 빈곤층 생계수당지급 프로그램)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 제도는 가정에 매달 평균 85레알(약 5만원)를 지급하고 그 금액은 가구 수입의 40%에 해당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현재 국민 1억9천만 명 가운데 약 4분의 1이 혜택을 받고 있고, 올해 200만 가구가 추가로 이 혜택을 받게될 것이라는 점이다. 또 한번 놀라야 하는 것은 브라질 정부가 2010년부터 전체 국민과 5년 이상 거주 외국인에기 기본소득을 지급하려고 계획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본소득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사회당에 따르면 16세기에 최초로 등장한 최초소득 아이디어가 18세기의 일회적 급부 아이디어와 만나 19세기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아이디어로 융합했다고 한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국가는 모든 시민들에게 안전한 생활수단, 음식, 적당한 옷과 건강을 해치지 않는 생활 방식을 제공할 책임이 있다”라고 말했고, 존 스튜어트 밀은 <정치경제학의 원리>에서 “분배에 있어서, 특정한 최소치는 노동을 할 수 있던 없던 간에 공동체 모든 구성원의 생존을위해 먼저 할당된다”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출신의(스코틀랜드가 아니라) 유일무이하게 유명한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은 <자유로 향하는 길>에서 “생계에 충분한 소득을 모두에게 주어야 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대한민국 사회당은 “모든 국민에게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이라고 외친다.

그러나 실제로 제도가 구체화되고 이론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83년 ‘샤를 푸리에 그룹(Collectif Charles Fourier)’이 형성되면서부터다.

1983년 가을 세 명의 젊은 연구자들은 그들 중 한 사람이 몇 달 전에 발간된 “세계의 배분”이라는 잡지에서 제안했던 매우 단순하고 특별하지만 매력적인 생각을 탐구하기 위한 그룹을 발족시키기로 결정했다. Paul-Marie Boulanger, Philippe Defeyt 그리고 Philippe Van Parijs는 각자 당시 혹은 최근까지 벨기에 루뱅 카톨릭 대학의 인구학, 경제학, 그리고 철학과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그룹은 샤를 푸리에 그룹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것의 주요 결과물은 1985년 4월에 나온 브뤼셀 월간 신평론 특별호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 그룹은 그들의 생각과 그것의 추정되는 결과들을 호소력 있게 요약해 보두앵 왕 재단이 실시한 일의 미래에 관한 소론 심사에서 수상을 했다.

[출처] BIEN의 간략한 역사|작성자 가림

서구의 소모임과 소그룹이 가진 전통은 참으로 무섭다. 얼마전엔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명망있는 조직으로 성장한 ‘로마클럽’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제 또 이 조그만 소모임에서 시작한 창의적 연구를 만나게되니,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그나저나 푸리에가 누군가. 로버트 하일브로너가 <세속의 철학자들>에서 리챠드 오언, 생시몽과 함께 한 챕터를 할애하며 다루었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 중 한명이며, 그 중 가장 미치광이로 불렸던 인물이다. 하일브로너의 말에 따르면

생시몽은 삶의 모험가였다. 반면 푸리에는 상상 속의 모험가였다. 그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는 1772년 브장송에서 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신통치 않은 행상으로 세월을 보냈다. 어떤 점에서 그는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결혼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열정을 바친 대상은 두 가지, 꽃과 고양이였다. (세속의 철학자들, p160)

그는 공상가였고 미치광이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푸리에는 지구의 정해진 수명이 8만년 밖에 안된다고 확신했고, 4만년의 상승기와 4만년의 하강기 사이에 8000년의 ‘행복의 절정기’가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인류는 상승기의 8단계 중 제5기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조화기에 이르면 바다는 레몬수가 되고, 새로운 여섯개의 달이 저 오래된 외로운 위성을 대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 미치광이였다.

비록 모조리 실패하긴 했지만, 오언과 푸리에가 꿈꾸었던 사회공동체는 실용주의 국가 미국에서만 178개에 달했다. 비록 오언, 푸리에, 생시몽의 공상적 사회주의는 미치광이들의 꿈으로 끝나버렸지만 그들의 아이디어는 제정신이 똑바로 박힌 한 경제학자를 만나며 다시 부활한다. 그 사람이 존 스튜어트 밀이다. 사회주의자로 전향한 밀은 우리에게 <자유론>으로만 알려진 그 밀의 진정한 두권짜리 명저 <정치경제학 원리>를 출판했다. 미치광이 공상주의자들은 밀을 통해 다시금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기본소득에 관해서는 논쟁도 많고 비판자도 많다. 심지어 우파들에 의해서도 추진되었던 이 제도는 좌파들에게도 공격을 받곤 하는 우스꽝스런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너무 진지해지지 말자. 명랑하게 기본소득에 대해 한번 말해보자. 혹시 아는가. 미치광이들을 끌어 앉았던 밀처럼 위대한 또 하나의 천재가 기본소득의 꿈을 실현시켜줄 수 있을런지.

게다가 유럽에서도 진지하게 논의되는 제도를 너무 폄하하는 것도 무리다. 좌파정당의 지지율이 말 그대로 지지부진한 대한민국에서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는 시기상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멀리 내다보자. 한 50년 후에, 누가 아는가. 금민의 아이디어가 역사에 아로새겨질지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사회당의 진지한 논의를 조롱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진지하고 행복하다. 이 참에 아예 사회당원이 되어볼까도 생각중이기 때문이다(만 물론 아나키스트에겐 사회당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지난 밤에 잠자리에 들려다가 기본소득에 관한 떡밥을 물어버리고는 꼴딱 밤을 새웠다(그만큼 나는 진지하고 행복하다. 오해하지 말아달라. 블로그 소개말은 농담이 아니다). 그리고는 실험실에서 몇 시간동안 초파리 알 똥구멍에다가 열심히 주사바늘을 꼽으면서도 내내 이 생각만 했다. ‘샤를 푸리에 그룹’이라니 정말 멋지지 않은가. 참고로 기본소득에 관한 모든 자료와 링크들은 임ㅋ님의 위 떡밥을 물면 줄줄이 딸려 나온다. 사회당 홈페이지엔 쉬운 설명이 실려 있고,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에선 보고서와 논문들을 다운받을 수 있다. 최근엔 <르모드 디플로마티크>에도 이에 관한 아티클이 실렸고, 무려 한겨례에서도 진지하게 이 제도를 다루고 있다.

그러니 그냥 무시하지도 말고, 화내지도 말고, 너무 진지하게 싸우지도 말자. 그냥 명랑하게 받아들이자. 생시몽이, 푸리에가, 오언이 대한민국에서 춤을 좀 추겠다는데 말릴 이유도 없지 않은가. 허균 이후로 몽상가가 사라진 이 땅의 문제는, 지나치게 논쟁이 진지하다는 데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도 좀 몽상가가 필요하지 않은가 싶다.

아나톨 프랑스가 말했듯이, 몽상가가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동굴 속에 갇혀 있을지 모른다. 하일브로너의 말처럼, 이 무모한 몽상가들이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의 용기 때문인 것이다. 사회당 화이팅이다.

생각해보면 노무현도 몽상가였다. 우리는 서민으로서의 그의 모습이 아니라, 이상주의자/몽상가로서의 노무현에게 감동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20 Comments

  1. 참고로 나는 기본소득으로 구글에서 검색되는 블로거들 모두와 친구가 될 작정이다.

  2. 마지막 사진은 좀 무섭네요 ;;;

  3. 자본가들이 기본소득에대해 관심을 가지려면 역시 전체적인 파이크기가 줄어드는 독점기업에서나 가능할듯 싶습니다. (예 출산율이 저하되고 있는 국가) 어? 우리나라네? ㅋㅋㅋㅋ

  4. 아이쿠 트랙백… 감사합니다 ^^
    그렇죠… 세상을 바꾸는 힘은 몽상에서 비롯되는 거죠. 제가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도 그런 점이었고요. 잘 보고 갑니다.

  5. 브라질의 룰라가 ‘몽상’을 현실화 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 같은 사람도 권력을 가질 수 있는 ‘민주주의’가 있었기 때문이겠죠. 한국의 좌파 정당들이 지지부진한 것은 그들의 실력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아직 민주주의가 충분하지 않거나, 어쩌면 둘 다 이겠지요. ‘시장과 자유 경쟁’이 민주주의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가 현재와 같은 환경에서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맥시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6. 아, 레몬수 바다라니 +.+
    레몬수 바다에서 풍덩풍덩
    피부건강에 엄청 좋을 듯.
    미용업계엔 배드뉴스려나.

  7. 그쵸..제가 요즘 나이 서른에 왼쪽으로 점점 이동하면서…
    느끼는건데 (제가 만나는) 왼쪽 사람은..지나치게 진지하다는 느낌이요..그래서 때로 경직되
    보이기도 했는데…그러면서도 유연하고 명랑하고 경쾌해졌음 좋겠어요

    연구원이시면서 어떻게 이리도 몰두하실 수가 있는지..아무리 몰입한다고 해도
    이 정도일 수 있는지 늘 놀랍고 경외롭네요 덕분에 저는 여기 과학적, 논리적 사고력을 키울
    기회를 얻고 있지요 알게되어 lucky~!라 생각하고 있지요

    저 사진은 어디서 본것도 같고, 생경한 것도 같고, 왠지 익숙하기도 하고..
    암튼 대박이에요 푸하하하하 더듬이 머스트해브…

  8. 아.. 오언 푸리에 생시몽이 누군가 했더니 무려 맑스의 ‘공산당선언’에도 등장하시어 까이던 그 분들이시군요. 오언의 일대기를 읽으면서 혹시 스탈린과 그 후계자들은 ‘국가권력을 장악한 오언’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골똘히 하던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님의 말씀대로 몽상의 현실화가 진보 아니겠습니까? 물론 진보적으로 현실화할 수 있는 몽상은 극기 드물겠습니다만. 불과 100년전의 대한제국에서 ‘국가원수를 백성들이 투표로 선출한다’는 개념은 당시의 급진적인 개혁파들조차도 쉽게 상상하지 못하던 몽상이었을테니까요.

  9. 저도 좀 무섭더라구요. 푸리에의 이미지는 저래요. 조금 무섭지만 친근한..

  10. 나이 서른에 왼쪽으로 움직이는 건 정말로 중요한 현상입니다. 건강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11. 저는 사회당원이면서 기본소득활동가이고 얼마전 기본소득네트워크 준비모임의 카페지기로 선출되었고 이글루스에서 기본소득 스터디 모임을 제안하여 운영하고 있는데다가 임ㅋ 님도 저때문에 기본소득에 관심을 가지셨다고 하니 기본소득으로 검색해서 나오는 모든 블로거와 친구가 되시려면 저랑 친하게 구는 것 정도는 기본

  12. 친하게 지내요. 저야 뭐 이미 오래전부터 블로그 탐독중이고..서울 가면 만나 한잔 하고. 그럼 기본된거? ^^

  13. ㅋㅋㅋㅋㅋㅋㅋ
    기본 인정.
    올라오시면 얘기하세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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