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사회담론의 진화생물학적 자장?

이택광: 폴라니, 그리고 인문학의 개입

이택광: 박정희와 파시즘

이택광 교수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간단하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대안사회를 논의하는 과정에 인문학이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대안사회 담론의 대표주자라고 생각되는 ‘진화생물학’과 ‘경제학’이 등장했다. 마지막으로 칼 폴라니의 인문학적 성격을 지적하며 이택광 교수는 약간의 투정을 부린다. 인문학자이기도 했던 칼 폴라니를 경제학으로 포장해버리고야 만다는 것이다. 확실히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역시 그는 인문학이 대안사회 담론에 끼어들 수 있는 주제로 ‘윤리’를 거론한다. 우리에게 새로운 주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택광의 글에 스쳐지나가듯 언급된 ‘우생학’과 ‘진화생물학’이라는 개념적 문제를 짚고 넘어가는 것은 그다지 효율적인 비판 방식이 아니다. 두 개념이 생물학적인 것이라는 이유로, 자연과학자의 입장에서 개념의 왜곡을 주장해봐야 소칼의 지적사기 논쟁이 재현될 뿐이다. 소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인문학자들과는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 적어도 논쟁이 가능한 지점은 그 사건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운 이들과 함께하는 곳에서부터다. 나는 이택광 교수가 소칼 이전의 인문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적어도 그랬으면 좋겠다).

치사하게 생물학자라는 이유로 좀 안답시고 우생학은 그런게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이택광 교수가 사용한 우생학이라는 문맥상의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택광 교수는 박정희 시대의 우생학을 ‘민족 개조주의’ 혹은 ‘선험적 민족 우수성’등의 개념으로 사용했다. 박정희와 히틀러를 비교하는 데서 잘 알 수 있듯이, 이 지점에서 우생학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정도의 여유를 가진다. 따질 문제가 아니다.

우생학의 문제는 잠시 뒤로 미루고, 내가 명료하게 이해할 수 없는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쉬운 이야기고, 반드시 대답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화생물학 담론의 영향력 문제

이택광 교수는 진화생물학 담론 -특히 최재천 교수를 예로 들면서- 이 한국사회의 대안사회 담론의 두가지 주요 자장 중 하나라고 말한다. 나는 이택광의 분석이 사실이기를 바란다. 과학적 지식인들이 좀 더 많이 사회비판에 나서야 한국의 과학문화가 성장하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택광 교수의 분석이 사실이라면,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과학적 지식인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두 헛소리가 된다.

이택광 교수가 진화생물학의 자장이라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가 명료하지 않다. 국내에서 진화생물학의 자장이라고 해봐야 최재천 교수와 장대익 교수, 그 제자 전중환 교수와, 이들과는 조금 다르지만 산타페 연구소에서 게임이론을 전공한 최정규 교수 등이 전부일텐데 이들의 수장은 최재천 교수다. 최재천 교수의 입국 이전에 진화생물학의 사회적 논의는 전북대학교 이병훈 교수에 의해 주도되었던 적이 있다. <사회생물학>도 이병훈 교수가 번역했었고, 에드워드 윌슨에 대한 논의의 중심에 이병훈 교수가 있었다. 문제는 에드워드 윌슨의 직계 제자가 국내에 들어와 서울대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었고, 과학동아와 동아일보, 이후엔 한겨례와 조선일보를 타고 최재천 교수는 중고등학교 수준의 에세이들로 승승장구했다. 호주제를 통해 유명세를 탄 그는 최근의 <통섭> 번역을 계기로 중요한 프레임 전쟁에서 우위를 거머쥐었다.

만약 이택광 교수가 위의 진영이 논의하는 바를 가지고 대안사회 담론의 ‘자장’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라면 틀렸다. 최재천 교수는 사회비평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최근에 ‘인생을 이모작하라’는 류의 자기계발 서적을 출판한게 전부다. 아주 오래전에 조선일보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한 정도가 최재천 교수류의 사회비판 혹은 대안사회 담론의 실체다.

그래서 나는 궁금한 것이다. 이택광 교수가 말하는 진화생물학의 자장이라는 것은 분명 최재천 교수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최재천 교수의 진화생물학적 사회비평이라고 한다면 그런 것이 한국사회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본다. 아마도 이택광 교수와 같은 인문학자들을 놀래킨 것은 최근의 ‘통섭’ 화두가 아니겠는가 하는. 한예종의 프로젝트 중 하나가 통섭이라고 할 정도니 이 개념적 프레임이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음은 분명한 것 같다.

문제는 첫째, ‘통섭’이라는 화두가 대안사회 담론에 포섭되지도 않고, 둘째, 통섭을 통해 대안사회를 논하는 이들을 본 적도 없으며, 셋째, 통섭을 들고 나온 이가 최재천 교수라는 진화생물학자라고 해서 이 (존재하지도 않는) 자장이 진화생물학적 자장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없다는 점이다.

최재천 교수의 ‘통섭’이 좀 영향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해서, 다윈탄생기념 학술대회에나 집중하고 있는 이들을 대안사회담론이라는 고귀한 이름 밑에 묶는 것은 무리다. 통섭은 진화생물학적 개념도 아니고, 통섭학자들이 대안사회담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아마도 이택광 교수와 같은 인문학자들, 혹은 다윈탄생기념 학술대회를 가득 메운 인문학자들에게나 진화생물학이 좀 관심이 가는 주제일 뿐이라고 본다.

이 비판이 부당하다면, 진화생물학적 자장을 가지고 대안사회 담론을 펼치고 있는 지식인들의 예를 보여주기 바란다. 이것마저도 ‘우생학’식의 은유라면 곤란하다. 진화생물학의 자장과 함께 거론된 것이 ‘경제학’이라는 명확한 실체이기 때문이다.

박정희와 우생학의 문제

박정희와 우생학의 문제는 맞다면 맞고 아니라면 아닌 그런 느슨한 논의다. 예를 들어, 파시즘의 배후에 존재하는 우생학이라는 개념으로 박정희 시대의 우생학을 말한다면,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기 때문이다’라는 식의 논리나 ‘성공하려면 열심히 노력하라’와 같은 자기계발 서적의 문구도 넓게는 우생학으로 포섭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둘은 다르다. 전자는 ‘생물학적 결정론’이고 후자는 ‘우생학’이기 때문이다. 이 뿐 아니라 이제는 전염병이 되어버린 혈액형별 성격도 우생학이다. 그런데 혈액형 우생학이 박정희 시대의 근대적 유산인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다.

잘 안다. 이택광 교수는 우생학이 파시즘의 배후라는 뜻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따라서 파시즘과 결부된 형태의 우생학이 정말 위험하다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하지만 왜 그게 꼭 우생학이라는 용어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냥 생물학적 결정론 아닌가? 만약 박정희가 우리 민족의 선험적 우수성을 강조한거라면, 그건 생물학적 결정론을 다양한 방식으로 극복하기 위해 개발된 우생학이 아니라, 민족생물학적 결정론 아닌가 말이다.

“어떤 사람은 라인 강의 기적의 요인을, 첫째, 노동자의 근면, 둘째, 기업가의 자유로운 창의와 실행, 셋째, 정치인의 희생적인 노력과 과학적인 시책 등을 들기도 하지만, 보다도 이같은 과업을 성취하기 위한 국민적인 성격 즉 국민성을 높이 사야 할 것이다. 물론, 1948년에 실시한 화폐개혁의 성공, 미국의 경제 원조, 세계시장의 확대, 동독으로부터의 노동력의 대량 유입, 노사간의 원만한 협조 등의 사유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계기를 성공하게 한 것에는, 이 민족성의 우수성을 들지 않고서 논리가 달리 될 수밖에 없다.”


위의 말 어디에도 국민성의 극복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국민성은 원래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우생학이 아니라 생물학적 결정론이다. 용어의 문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박정희의 의식 속에 있었던 ‘선험적 민족 우수성’의 의식과, 박정희 시대의 ‘국민개조론’ 모두를 포용하는 개념으로 ‘우생학’을 쓰던 말던 그건 이택광 교수의 자유다. 골턴의 우생학 논의가 처음으로 드러난 책이  <타고난 천재>였으니, 불가능할 것도 없다. 그저 생물학자로서 작은 바람은, 우생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생물학이라는 학문에 피해가 가는 일은 없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인문학의 윤리적 우월성 문제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문학적 제어론의 문제다. 이택광 교수의 글에서 이러한 징후를 강하게 읽을 수는 없지만, 그 논의에서 크게 두 가지 오류를 발견한다.

첫째, 인문학이 대안사회 담론에 개입하는 방식이 반드시 윤리를 통해서야야만 하는가. 이 문제가 인문학적 제어론의 핵심이다. 인문학, 아니 철학이 윤리학을 포함한다고 해서 인문학의 윤리 담론이 어떤 효용성을 지닌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지 않은가. 어려운 문제인데, 그냥 묻고 싶다. 인문학의 윤리 담론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인문학만이 윤리를 다룰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인문학은 윤리를 다루므로 우월하다는 뜻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저 인문학은 윤리를 다루므로 이를 대안사회담론에 부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둘째, 진보세력이 대안을 내놓고 대중이 이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비판적인 이택광 교수에게 인문학이 내어 놓는 ‘윤리’라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인가.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윤리란 가치이고 결국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합의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인데 인문학자이자 진보세력인 이들이 내어 놓은 윤리는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길래 대중을 설득하지 않고도 대안사회담론에 끼어들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그 ‘윤리’의 작동방식도 궁금하다.

한윤형과 김에녹시아의 논쟁에 관해

이번 논쟁에 김에녹시아가 우생학과 진화생물학 및 진화심리학의 생물학적 개념을 가지고 이택광 교수를 비판했고, 이 과정에서 한윤형이 이택광 교수를 두둔하며 나섰다. 그다지 건설적인 논쟁이라 보이지는 않는다. 박정희 시대를 우생학이라는 틀로 분석하느냐 마느냐는 이택광 교수의 자유다. 그리고 그것이 히틀러를 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한에서 우생학이라는 개념의 사용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진화심리학의 문제는 이택광이 꺼낸 적도 없으므로 따로 논의하는 것이 가치는 있어도 이택광과 연결짓기는 무리가 있다. 식민지 시대와 해방시기의 사회진화론과 우생학 담론은 분명히 단절을 겪었는데, 진화심리학과 연결하기엔 무리가 있다. 게다가 제일 중요한 건, 진화심리학자라고 불릴 수 있는 학자들은 사회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걸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대한민국엔 그런 학자가 없으므로 진화심리학 이야기는 필요 없다.

나는 이택광 교수의 입을 통해 위에서 내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답을 좀 듣고 싶다. 그가 말한 진화생물학의 자장이라는 것만 좀 분명해져도 내가 수긍할 부분은 충분한 그런 글이기 때문이다. 물론 왜 그게 윤리학을 통해서여야만 하는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소녀시대는 계속되어야 한다

30 thoughts on “대안사회담론의 진화생물학적 자장?

  1. 그나저나 언제까지 자연주의적 오류를 말할건가 말이다. 그게 가능하기는 한거냐. 무어가 살았던 시대, 무어의 친구인 러셀, 그리고 당시의 시대정신인 논리경험주의 등등을 생각하면 알수 있자나. 그만하자. 자연주의적 오류. 과학의 가치중립성.

  2. 상대의 논지를 이해하고 질문을 던지는 깔끔한 글이군요. :)

    저도 자연주의적 오류라는 말은 부정하는 쪽이 우재 님이나 에녹시아 님의 논지에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에녹시아 님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더군요.

    그냥 저는 과학도들이 자연주의적 오류라는 말을 쓰는 걸 보면 문화인류학의 문화상대주의처럼 방어적 준칙이라는 느낌이 들던데… 다른 맥락이 더 있는 건가요?

  3. 에녹시아님을 무시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자연주의적 오류라는 건 과학자의 길에 들어선 이들 중 인문학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한번쯤 탐닉하게 되는 마약같은 겁니다. 저도 97년 무렵에는 무어에게 탐닉했었습니다. 처음으로 그 말을 들은 건 최재천 교수의 에세이였고, 그걸 극복하는데 5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과학의 가치중립성, 과학의 우월성 등의 개념을 극복하는건 시간이 좀 걸리는 일입니다. 똑같이 인문학의 윤리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국내의 소장학자들도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과학자들이 공작새처럼 우쭐하는 것도 문제지만, 인문학자들이 윤리적으로 우월한척 하는 것도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신대로 방어적 준칙인 경우가 많습니다. 과학적 진리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이라는 것을 맹신하기 때문입니다. 나눠봐야 할 문제가 있는데 그건 제가 블로그에서 항상 했던 말입니다. 측정량과 측정량과이론이 연결되는 방식을 혼동하면 자연주의적 오류에 잘못 빠지게 됩니다.

    덧: 에녹시아님에게 덧글로 너무 도발하지 마세요. 감정은 정제된 글로 적절하게 분출하면 아름답지만, 블로그에서 댓글 싸움이 아름답게 끝나는 걸 본적은 없거든요. 반갑습니다.

  4. 흠.. 요새 며칠 사이에 갑자기 학교 일들이 많이 생겨서ㅜㅜ 생각 해둔 글을 시간적 여유를 두고잘 쓰지를 못하겠네요. 간단하게나마 여기에 제 생각을 메모해볼게요. 어떤지 좀 조언해 주십시오.

    1. 제 생각에 대해서 좀 조언 부탁드립니다.

    일단, 제 생각을 우재님께 간략히 적어볼게요. 저번에 메일 보내드렸듯이 그 ‘오류’에 대하여 생각하는 바는 아직도 그대로입니다. 그것이 우재님 말씀처럼 언젠가는 극복이 되는 것인지, 아닌지는 사실, 이 시간이 지나봐야 아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은) 잘 와 닿지가 않네요. 옛날에는 제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본론을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간에 무엇엔가 아주 화가 많이 나 있었던 시절이었고, 그것을 마르크스가 그 불만을(주석서, 해석서들을 간단히 봤는데.. 당시에 그걸 잘 이해했는지도 모르겠네요.;;;) 적절히 긁어준다고 느꼈었거든요. 왜 그런 말 있잖아요. 몇 살에 마르크스주의자가 안되면 어쩌고 또 그뒤에 어쩌면 바보고 그 말요. 언젠가 저도 그런 날이 왔어요. 계기는 결국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분노 어린 발언들도 ‘착취’라든지 하는 것들에 대한 ‘분노’ 혹은 선악적 개념을 주입시키느냐, 아니냐, 에 따라 달라진다고 본 겁니다. 사실, 착취라는 것 자체가 부정적 어감이긴 하지만, 그걸 그냥 ‘사실’로 본다면 말이에요. 그 마르크스의 시대에 착취를 혹여나 인정하는 자본가가 있었다고손 치더라도 ‘그래서, 그것이 왜 악한 것이냐’라고 한다면, 대답할 게 없다는 말이죠. 저도 어느샌가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고 착취에 분노하는 사람들에도 동감 못하고 더 이상 매력을 못느끼겠습디다. 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니, 세상 어디에도 선악, 가치, 이런 것들은 없더군요. 일전에 메일 보낸 데에 서술한 것은 이런 류의 나 혼자만에만 의미가 있는 ‘깨달음’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것들이 쌓여 생긴 생각들의 연장선상이었습니다. 오늘 올린 거 보니까 윤형씨가 좀 눈치 채신 것 같기는 하던데. 뭐, 이 논쟁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좀 시간이 지나면,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윤형씨한테 배움을 구해야 할 것 같긴 하지만, 이 논쟁에 엮인 상태에서의 그 이야기라면, 아직도 논의의 대상이라 봅니다.

    그러니까, (부정적 어감을 제거한)’착취’라는 사실이 (학자가 아닌)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일으켜 악한 것이므로 제거되어야 한다, 는 ‘당위’를 일으키는데 대하여 더 이상 공감을 못했다는 것이지요. 이런 비슷한 생각들이 저한테는 너무나도 많이들 쌓여갔고요.

    2. 이택광 교수의 글에 대해서

    저랑 좀 관점이 다른 것 같습니다. 오늘 보니까 윤형씨가 글들을 좀 올려 놨던데, 우재님한테 메일 보냈듯이 그런 것들은 좀 더 차후에 논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좀 이른 감이 있어요.

    어쨌든, 우재님이랑 저랑 생각이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이런 것 같습니다.

    이택광의 ‘우생학’을 저도 우재님처럼 독해하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윤형씨를 이택광 교수 빠라고 하지만, 저도 사실 몇 년간 그 블로그를 구독할 정도로 팬이었으니까요. 그 정도 선의는 가질 수 있었죠.

    그런데, 그 문제가 된 글을 읽다보니까, 박정희의 우생학을 그런 식으로 ‘선의를 가지고’ 확장시켜 해석하기 시작하면, 그 ‘확장된 우생학’(저는 이택광의 우생학, 이나 한윤형의 우생학이라 구분지어 부릅니다.) 후에 나오는 ‘진화심리학을 패러다임 내부에 두는 우생학’과는 거리가 멀어지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뭐가 이상하다 싶었고 비판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1. 박정희를 우생학이라 지칭하는 것에 대하여. 2. 진화심리학을 우생학의 패러다임 내부에 속했다고 서술하는 것에 대하여. 말이죠. 박정희에 대한 서술이 그렇게 비유적이라면, ‘진화심리학을 내부에 두는 것은 불가능’하고, 진화심리학을 패러다임 내부에 두면, 박정희의 우생학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 둘다를 비판하는 전략을 택한 겁니다.

    물론, 한윤형이 자연주의 공통지반 운운하는 것은 ‘박정희의 확장된 비유적 우생학’이라는 ‘이택광의 우생학’을 정당화시켜주지 못하지요. 구체적으로 정리해서 글 올리겠습니다. 지금 논의를 정리하고자 해서 제가 생각하는 논점 별로 글 올리는 중인데 그 와중에 논쟁이 더 불붙고 있어서 약간 당황중입니다.

    3. 글쓰기

    저는 인문학적 서술들이 우재님이 말씀하신 그대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궤변, 비유, 과장, 따위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저는 인문학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문학은 인문학자들이 해야겠지요. 생물학적, 과학적 사실로 인하여 변화된 세계를(인간이 측정할 수 있는 최선의 세계를 인문학자들은 언제나 수용해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형이상학적 관념론이 되어버리고 혼자만의 학문이 되니까요) 인정하고 수용하는 인문학자들이 말입니다. 저는 이택광 교수가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이택광 교수의 자세한 말씀은 듣지 못했지만, 한윤형이 앞장서서 변호하는 것을 그의 논지라고 판단한다면 말이죠.

    4. 잡설

    제 생각은 어쨌든 이렇습니다. 댓글로 적은 내용들을 보강해서 글로 올려볼게요. 우재님께 말씀드렸고, 윤형씨 블로그에도 정중히 양해를 구하며 트랙백 보내기 시작한 것이었는데 ‘배우고 싶은 마음으로 공손히’ 글을 써도 윤형씨는 자꾸만 욕설을 섞는다든가, 비아냥 거린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대하니까 저도 참 그런 방식으로 따라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뭐 인터넷 소통의 한계점이겠지요.

  5. 아이고 좁은 칸에 스크롤 돌려가며 글 쓰다 보니 이상하게 적힌 게 많네요. 좀 배려해주시고 읽어주세요 ㅎㅎ

  6. 욕은 안 했는디요. ;;; 설마 “헉 시발 나보고 특권을 행사한대 ㅠㅠ” 뭐 이런 걸 욕이라고 받아들이신 거면…;;;

  7. 잠깐 70년대에 나온 박통선집을(조갑제가 찍은 몇만원짜리는 보고싶지 않았고) 본 바가 있는데 아주 대충 봐서 기억이 안난다는. ㅈㅈ 조만간 열심히 보겠다는

  8.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 진화생물학적 진보담론이 필요없을 것 같다는 저의 막연함을 이렇게 해결해주시다니 – _- ㅋ 놀랍습니다.

  9. 1. “이택광의 글에 스쳐지나가듯 언급된 ‘우생학’과 ‘진화생물학’이라는 개념적 문제를 짚고 넘어가는 것은 그다지 효율적인 비판 방식이 아니다.”

    1)대수롭지 않은 문제인지 대수로운 문제인지가 벌써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2)대수롭지 않은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런 개념적 문제를 짚는 게 과연 그렇게 효율적이지 않은 것인가(‘효율적인 비판’의 의미가 무엇인가)도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3)효율적인 비판이 아니면 반드시 그렇게 부정적으로 봐야 하는 건지도 역시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2. “치사하게 생물학자라는 이유로 좀 안답시고 우생학은 그런게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이택광 교수가 사용한 우생학이라는 문맥상의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이다.”

    1)아울러, 누가 사용한 어떤 용어의 문맥상의 의미(어떤 의미로 그 용어를 사용했는가)를 이해하기만 하면 ‘그 용어의 의미는 그런 게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아야 하는지도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2)또한, 그게 과연 ‘치사한’ 건지는 더욱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3)마지막으로.. ‘알면서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게 더 치사하지 않은 건지는 더더욱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10. 거기서 특권 운운하는 게 ‘모욕’이구요. 거기서 저 정도의 반응이면 저 자신을 희화화시키면서 넘긴 거에요. -_-;;;; 이런 걸 얘기해야 한다는 게 슬프네요. 사회적으로 제가 무슨 특권을 누릴 수 있는지 님이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11. 흠..진화생물학 자장과 경제학 자장????
    이거 원… 중국집 ‘자장’면도 아니고….그렇다고 모기’장’도 아니고..수영’장’?? 해수욕’장’?? 도대체 뭐여…..

    설마 magnetic field 할때의 자장????? ㅋㅋㅋ 미치겠다. 그야말로 내용의 심오함이 아닌 단어의 심오함이 묻어나는…. 개인적으로 field하면 기하학에서 곡선의 길이 측정과 관련이 있는데 인문학자가 말하는 field란 것은 무엇과 관련있는지 모르겠군요.

    곡선의 길이와 진화생물학이 만나다.
    = 진화생물학의 자장

  12. 어려운 문제 투성이인거 맞습니다. 특히 인문사회과학의 논쟁에 있어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입을 닥쳐야만 합니다. 전 그냥 일단 말을 하고 판단은 상식에 맡기자는 주의입니다.

  13. 그냥 어떤 커다란 조류 정도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자기가 뭔가를 끌어당기고 자장이 보자기 같으니까, 대충 그런 이미지를 진화생물학이 사회담론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미지로 그리시면 됩니다. 은유입니다. 무시할 이유 없습니다.

  14. < 국가와 혁명과 나>같은건 일반 출간 되었던 책이라는. 박통판 한국사도 있었는데(역시 일반출간) 제목은 까먹었고.. 하여간 박통선집이라면 예를 들어 홍재전서보다 중요한 책임에는 틀림이 없을꺼라는.

  15. 맞습니다.. 다른 사람의 진지한 주장에 대해, ‘맞는 말이지만 대수롭지 않은 문제다.’라거나, ‘맞는 말이지만 치사하다.’고 말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16. 관련된 논의를 담은 책을 구할 수는 없을까요?? 최재천 교수나 에드워드 윌슨 말고.

  17. 쓰고나니 제 글은 좀 뻘글이 된 듯한데, 애초에 이택광의 글이 좀 무리였다고 봐요. 인문학 이야기를 끌어들이기에는 엉성한 틀이었고, 차라리 인문학 이야기 없이 한국 사회의 대중 담론을 지배하는 두 개의 패러다임 이야기만으로 보기엔 내용이 좀 빈약하고, 어쨌든 용두사미격이랄까.

  18. 제가 알기론 최근에 ‘다윈의 대답’이라는 책에 ‘다윈 좌파’에 대한 논의가 등장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자세한 건 잘 모르겠습니다. 있다해도 최근에서야 논의된 주제일겁니다. 이런 논의 자체가 외국에서도 흔한 것은 아닙니다.

  19. 핑백: 歲寒時節
  20. 출판사 이음에서 나온 다윈의 대답 시리즈 제1권이 저명한 윤리학자(공리주의자) 피터 싱어가 쓴 Darwinian Left이고, 위의 김우재님 본문에 나오는 최정규 교수가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라고 번역 제목을 붙였습니다. 책 내용은, 좌파들도 근래의 (진화)생물학이 밝혀낸 ‘인간 본성’을 잘 감안하라는 것인데, ‘좌파’와 ‘본성’에 대해 아직도 잘 감이 안오는 저로서는 이 정도로 그치겠습니다. 김우재님께서 본문을 통해 여러가지 측면을 깔끔하게 잘 지적하셨다고 보며 저도 이택광 교수의 글을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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