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와 이택광의 ‘밥그릇 투쟁’

저주받은 운명: 아이츄판다

철학이라는 동네북: 노정태

반란과 찬탈: 아이츄판다

‘소녀시대의 생물학’을 써야 하고, ‘왜 다시 아나키인가’라는 글을 좀 올리려고 했더니, 또 이런 떡밥을 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다. 내가 고민하는 이유는 이러한 논쟁이 내게 너무나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실은 내가 2003년부터 놀았던 곳을 추천하고, 그 곳에서 칸트 및 과학철학, 철학에 대한 인덱스 검색을 권유하는 것으로 나의 역할이 끝날 수도 있다. 블로고스피어에서 이런 식의 논쟁이 있기 전에 실은 오래전부터 그런 진지한 논의들이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시금 시작되는 논쟁에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없다. 언제나 진지한 논의들은 대환영이다. 우선 아이츄판다와 노정태의 글을 아주 짧게 요약한다. 여기서 그치면 별 재미가 없으니, <칸트와 과학>이라는 글에서 내가 언급했던 라이엔바하의 입으로 이 지긋한 논쟁의 60여년 전 판본을 감상하도록 하자. 그리고 노정태의 글과 이택광의 최근 글에서 나타나는 ‘밥그릇 투쟁’에 관해 인상비평을 시도하겠다.

아이츄판다와 노정태

이 둘의 논쟁 구도는 오래된 것이다. 라깡에서 시작된 논의가 <인문학적 제어론>으로, <과학은 철학과 대립하는가>라는 자못 진지하고 또 진부한 구도로 흘렀다. 복잡해보이지만, 둘의 대립을 나누는 지평선은 단순하다. 아이츄판다는 라깡류의 비과학적인 프랑스 철학이 보란듯이 유통되는 현실이 못마땅하다. 노정태도 이에 완전히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학문 서로 간의 존중을 요구한다. 서로가 과학자의 입장에서, 철학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학문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공격의 수위에서 언제나 아이츄판다가 앞선다. 노정태는 그러지 말자고 한다. 이쯤 되면 답이 나오기 힘들다.

이번 논쟁도 마찬가지 구도다. 강유원의 책에서 독일관념론의 후퇴를 읽은 아이츄판다가 근대학문 독립의 역사를 거론하며, ‘철학 단독의 영원한 주제 따위는 없다’라고 주장했고, 노정태는 철학이 동네북이냐며 맞선다. 철학 본연의 주제는 여전히 존재하며 존재할 것이라는 말이다. 눈에 거슬리는 것은, 도킨스에 대한 종교학자의 비판을 거론하며 철학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칸트를 논한다고 욕하는 노정태의 태도다.

“칸트가 죽고 난뒤 물리학자들과 수학자들에 의해 왕위가 찬탈되리라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아이츄판다의 말은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다. 노정태는 이게 철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라며 아이츄판다의 무지를 비꼰다. 문제는 ‘왕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다. 그 왕위가 ‘형이상학이라는 철학의 독립된 주제’라면 노정태가 맞다. 실제로 칸트는 당대의 과학적 성과들로부터 형이상학의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칸트가 그렇게 생각한 이상, 양자역학이 등장하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등장한 칸트 사후에 칸트가 생각했던 ‘뉴턴의 물리학 체계’가 무너지면서 왕위가 찬탈된다고 보는 것도 부분적으로 옳은 지적이다. 칸트 사후의 과학은  유클리드와 뉴턴을 확고한 지식체계의 기초라고 생각했던 칸트의 왕위를 찬탈했고, 동시에 과학과 수학의 발전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철학자로서의 칸트의 왕위는 찬탈하지 못했다. 논쟁이 무효가 되는 지점이다.

라이엔바하의 화석

그러니까 대체 철학이라는 학문의 독립적인 주제라는 것이 있느냐는 화두는 아주 오래된 것이다. 근대과학이 탄생하면서부터, 그리고 비엔나와 베를린에서 일군의 철학자 과학자 집단이 철학을 과학처럼 만들겠다는 야심찬 시도를 하면서부터, 또 양자역학이 태동하고 과학철학이 발전하면서부터, 확률혁명이 시작되고 볼츠만이 과학철학책을 읽으며 열불을 내면서부터, 인지과학의 혁명으로 인식론의 영역에서 철학이 설자리가 좁아지면서부터 언제나 함께 했던 화두이기 때문이다.

사실 베를린 학파를 이끌었던 인물로서 라이엔바하는 카르납보다 좀 덜 알려져 있지만 중요한 과학철학자 중 한명이다. 그러니까 노정태가 고민하는 철학의 독립적인 주제를, 철학자로 훈련받았던 라이엔바하는 철저히 부정한다. 그는 그런 사변철학을 ‘낡은 철학’이라고 일갈하고, 왜 그런 철학 자체가 불가능한지에 대해 철저히 논증한다. 아마 철학사에 밝은 인물이라면, 논리실증주의의 실패를 거론하며 여전히 철학의 독립적인 주제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논리실증주의의 실패가 철학의 독립적인 주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반증하지 않는다. 논리실증주의, 특히 비엔나 써클에 참여했던 초기 구성원들의 시도는 여전히 살아남아 있고, 우리는 그들의 유산 속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리실증주의가 실패했다고 단언하기엔, 우리가 딛고 있는 발판엔 그들의 흔적이 너무나 많다. 지속적으로 독립적인 철학의 지위는 좁아져 왔고, 이런 논쟁이 과학자들에 의해 제기된다는 것 자체가 논리실증주의가 실패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라이엔바하는 이렇게 말한다.

사변철학은 일반성을 지닌 지식, 즉 우주를 지배하는 가장 일반적 원리를 얻고자 했다. 따라서 사변철학은 ‘종합 물리학’ 같은 것에서나 주장할 만한 조잡한 내용을 포함하는 철학 체계를 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 이와는 대조적으로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우주에 관해 설명하는 일을 전적으로 과학자에게 맡겨버리고, 과학을 분석하여 얻은 성과들에 입각하여 지식론을 구성한다. <새로운 철학이 열리다>, 새길, 1994,  p336

라이엔바하가 그렇게 잔인하지만은 않다. 그는 이렇게 철학의 가치를 평가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나는 전통 철학 체계의 역사적 공적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문제에 대한 최초의 통찰에서 그 문제를 명료하게 개진하는 데까지 이르는 길은 멀다. 또 거기서부터 문제 해결에 이르는 길도 멀다.<새로운 철학이 열리다>, 새길, 1994,  p337

<과학적 철학의 탄생>이 원제인 <새로운 철학이 열리다>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난다. 아이츄판다의 60년전 화석이다. 물론 과학철학의 성과조차 미덥지 않게 생각하는 아이츄판다는 라이엔바하가 주장한 것에서 더욱 급진적인 주장을 한다. 그리고 나는 더욱 급진적이다. 나는 과학자에게 아무런 효용이 없는 과학철학이 과학에 어떤 명령을 내리는 것을 거부한다. 다만 과학철학이라는 주제로 철학자들이 모여 노닥거리는 것에 대해선 크게 불만이 없다.

새로운 철학은 지식의 현재 상태를 고려하여 이런 지식론을 전개하기 때문에, 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또 경험적 진리로 만족한다.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하는 철학자는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최선의 추정을 찾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추정을 찾는 일만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하는 사람은 학문적 작업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인내, 자기 비판, 새로운 시도를 위한 준비를 갖추고서 기꺼이 학문적 작업을 해 나갈 것이다. 우리가 오류를 오류라고 확인할 때마다 항상 그 오류를 수정한다면, 오류의 길은 진리의 길이다. <새로운 철학이 열리다>, 새길, 1994,  p360

밥그릇 투쟁

사실 이런 식으로 논의를 진전하자면, 칸트 이후 등장한 과학과 철학의 상호작용, 논리실증주의의 역사 및 이후 과학철학이 걸어온 길과 ‘두 문화’ 및 ‘과학전쟁’까지를 일별해야 한다. 하지만 아이츄판다와 노정태, 특히 노정태의 스탠스만 알면 이 논쟁엔 진지한 구석이 별로 없다. 이택광이 대안사회담론에서 인문학의 개입을 주장한 것과, 노정태가 철학의 독립적인 주제를 거론한 것이 철학자와 인문학자라는 단어만 바꾸면 ‘밥그릇 투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에 대한 자기고백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밥그릇 투쟁’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밥그릇 투쟁’을 위한 현실 인식이 이런 논쟁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택광과 노정태의 ‘밥그릇 투쟁’은 실상 인문학과 철학의 위기에 대한 두 사람의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실용적인 학문이 아니기에 매우 열악하기 그지 없는 이 두 학문을, 대안사회담론에서는 ‘경제학’이, ‘형이상학’에서는 과학이 치고 들어오는 것이 영 못마땅한 것이다. 나는 그 심정을 이해한다. 실은 이종필 박사가 오래전에 주장했듯이, 인문학과 철학의 위기는 이공계 위기와도 맞물려 있는 문제다. 실상 이건 ‘기초 학문 전체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두 사람은 한 편이다. 둘의 적은 기초 학문의 발전을 저해하는 비전 없는 행정관료들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논쟁을 지양하라는 말로 읽을 필요는 없다. 자신의 학문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이들의 논쟁은 장려되어야 한다. 우리에겐 이런 논의가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이택광과 노정태의 ‘밥그릇 투쟁’을 바라보는 나는 분자생물학이라는 나의 학문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된다. 분자생물학의 초창기 역사는 물리학자들과 화학자들에 의한 생물학 침탈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릭이 물리학자였고, 이후 파지 그룹을 만든 델브뤽이, 유전자 코드 해독을 위해 RNA타이클럽을 만든 가모프가, 내 보스인 YN까지 모두 물리학의 진영에서 생물학으로 넘어온 이들이다. 화학자들의 이름은 너무 많아 나열이 불가능할 정도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의학을 전공하고 생물학으로 넘어온 이들, 예를 들어 시드니 브레너가 분자생물학의 역사에서 영웅에 속한다. 왓슨과 같은 순수한 생물학자 출신이 있긴 하지만, 분자생물학은 사실 잡탕밥과 같다. 그리고 그런 잡탕밥이 만들어지던 와중에 생물학자들은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어도, 그들의 진입을 틀어 막지 않아다. 오히려 장려했다.

그렇게 성장한 분자생물학의 진입을 노정태처럼 막으려 했던 부류가 바로 마이어와 조지 심슨 등의 진화생물학자들이었다. 신다윈주의의 새로운 종합을 완성하고 놀던 이들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분자생물학자들의 진입을 막으려 했다. 에드워드 윌슨은 제임스 왓슨의 건방진  태도를 회상하며 당시를 ‘분자 전쟁’의 기간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결국 분자생물학이 주축이 되었다. 유전자가 뭔지도 모르고 연구하던 진화생물학은 왓슨과 크릭으로부터 폭탄을 맞고 어쩔 수 없이 변화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당시 고전적인 박물학의 독립적 영역을 지키려 했던 도브잔스키, 마이어, 심슨의 행태는 그들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치졸한 흔적으로 남았을 뿐이다. 그렇게 두 학문은 역사적으로 승패가 갈렸다.

나는 현대의 인문학과 철학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이 짖쳐들어오고 있고, 인문학과 철학의 존립기반이 위태롭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력은 ‘스타일’로 철학을 하겠다고 신선노름을 하고 있고, 결국은 과학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평가는 역사가 해주겠지만, 나는 철학과 인문학이 좀 더 열리지 않으면 지금껏 확보해왔던 그 좁은 영역마저 모조리 과학에게 내주고 말것이라고 생각한다. 윌슨의 통섭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나지만, 국내의 인문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조금 더 과학에 대해 성찰해야 할 의무가 있다. 마찬가지로 국내의 과학자들도 자신의 학문을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자연이라는 개념>의 서문에서 콜링우드가 했던 말은 국내의 철학자, 인문학자, 과학자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연과학이, 이른바 과학자들만의 것이며, 또한 철학이, 이른바 철학자들만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이 해 온 작업의 원리들을 전혀 반성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에 대해 성숙한 태도를 가질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의 과학을 한 번도 철학적으로 성찰해 보지 않은 과학자는 삼류 과학자, 엉터리 과학자, 또는 애송이 과학자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어떤 경험도 해 보지 못한 사람은 그런 경험에 대한 반성을 할 수가 없다. 자연과학을 전혀 공부해 보지 않았거나 또는 자연과학 분야에서 일한 경험이 전혀 없는 철학자가 자연과학에 대해 철학적으로 성찰할 때, 대체로 자신의 우둔함을 드러내 보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19세기 이전의 탁월하면서도 저명한 과학자들의 저술에서 드러나듯이, 그들은 항상 “어느정도”는 자신들의 과학에 대해 철학적인 사고를 했다. (중략) 자연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을 서로 상대방의 분야에 대해 거의 모르고, 또한 전혀 공감하지도 않는 두 분류의 전문직업인들로 분리하는 풍조가 생긴 것은 19세기 초반이었다. 그것은 양쪽 모두에게 피해를 준 바람직하지 않은 풍조였다.(중략) 그 둘을 연결하는 교량을 건설하려는 작업은 계속 진행되어야만 한다.

근본주의의 충돌

나는 아이츄판다와 노정태의 충돌에서 근본주의 진영간의 전투를 본다. 좀 더 근본주의적인 태도는 아이츄판다에게서 보인다. 하지만 이에 대응하는 노정태도 금새 근본주의자로 변신한다. 근본주의자들의 싸움은 건강할 수 없다. 나아가, 서로의 전문적인 영역에서 완벽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고 ‘정말 무식하다’류의 감정을 유발하는 논쟁을 주도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 그런 논쟁은 누가 더 많이 아는가의 지식잡화점식 품평회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맥락을 훼손하지 않는 오류는 관용하는 것이 맞다. 용어에 집착하는 것은 논쟁에 방해가 된다. 이해력이 수준급인 두 사람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철학 공부 좀 하시죠’라던가, ‘과학 공부 좀 더 해야겠어’ 류의 이야기는 좀 그만하자. 이게 노정태가 폄하하는 팩트골룸들의 논의와 뭐가 얼마나 다른지 나는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이런식으로라면, 나는 분자생물학의 성과를 가지고 마음대로 해석질을 하는 모든 철학자들의 논의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바로 그 지점에 ‘열린 마음’과 ‘생산적인 토론’의 핵심이 있다. 관용이라고 말해도 좋다.

아 이젠 정말 '소녀시대'에 집중해야겠다.

16 thoughts on “노정태와 이택광의 ‘밥그릇 투쟁’

  1. 배우는 입장이다보니 논점에에 한참 벗어난 질문을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전통적인 철학사에 무지합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꾸준히 사유체계(=철학체계)를 다듬어 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역사적으로 철학의 영역은 지속적으로 축소되어왔다 라는 주장은 참으로 마음에 잘 와닿습니다.

    더 나아가 철학만의 고유의 영역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것이 아주 오랜 논쟁이 있었다는데에 반가움이 느껴지네요.

    일차적인 제 질문은 윤리학이나 미학의 측면에서의 철학의 영역은 어떠한가? 철학고유의 영역이라고 할수 있는가? 입니다.

    예전에 제 스스로 철학을 정의 내리기로는 ‘가치를 부여하는 사유 나 논리’가 철학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상( 자연현상이든 사회현상이든 심리현상이든..)을 이해(understand)하고 파악하고 설명하는것이 과학이라면

    현상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철학이 가치를 부여하는 자격을 가졌다라기 보다는 가치를 부여하는 일련의 지적흐름을 철학이라고 보는것입니다. 또한 개인에 대한 가치인지, 사회에 대한 가치인지.. 영혼에 대한 가치인지.. 그런것도 철학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보았습니다.

    철학의 밥그릇을 빼앗기고 있다는 견해는 오늘 처음 배웠습니다만.
    예전부터 철학의 쇠퇴는 느끼고 있었고.. 어릴적 저는 자본주의의 발달이 그 원인이 아닐까 분석했었습니다.

    현대사회는 가치부여의 제1기준이 ‘돈’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가치를 부여하는 편리하고도 압도적인 기준이 생긴것이고 가치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철학은 설자리를 잃어버리고 점점 허약해 지는것이다.

    ps. 저도 블로그를 만들어야 여러사람들과 트랙백을 주고받으면서 깊이있게 사유를 전개해볼수 있을텐데 만들어놓고 불성실하게 관리하느니 안하니만 못하다고 생각해서 늘 미루고 있습니다.

  2. 라이엔바하는 윤리학에 대해서도 아주 비관적이고, 그나마 철학자나 인문학자들은 윤리학을 가지고 버티는 중이고, 진화론자들은 윤리학마저 잡아먹겠다고 하고, 그런 형국입니다. 미학은 원해 그 존재가치가 철학보다도 모호한 그런 판국입니다. 음..책 한권으로 이런 논의를 모두 포괄할 수는 없지만 그냥 꾸준히 인터넷에서 좋은 논문들과 논의들을 따라가시고, 블로그에올려진 책들도 틈틈히 읽으시고(너무 열심히 읽지는 마시고) 게다가 저도 모르는 게 많으니 뭐..

    전통적인 철학은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 이렇게 구분됩니다. 가치를 부여한다라..윤리학이 그런 학문이긴 합니다. 철학은 누가 정의내리기도 힘들고 정의도 없습니다.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일단 블로그를 만드세요. 왜냐하면 이런 경우 미리 계획하고 달려드는 것보다, 쓰면서 배우는게 훨씬 많거든요. 글도 먼저 생각하고 쓰는 방식도 있지만. 스다보면 생각이 떠올라 덧붙혀지는 경우가 많아요. 너무 계획적이다보면 아무것도 못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일단 저지르고 본다. 원래 이게 제 주의입니다.

  3. 철학자들 중에서도 철학의 종언을 말한 사람들이 많은데 왜 새삼스레 이러는지 (먼산). 난 철학과가 없어지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철학과 출신.

  4. 정말 어려운 문제로군요. 과학이든 철학이든 우리가 세계를 보는 틀이라 생각합니다. 우열을 가른다는 것은 의미없는 논쟁이라 생각하며 좀 더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으며 좋겠습니다.

  5. 깊이 따지고 들면, 밥그릇 투쟁입니다. 오래된 지긋지긋한 논쟁이기도 합니다.

  6. 헉 밥그릇 논쟁이라면 정말 해결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초록불님의 마지막 수업 패러디를 읽으면 그 무서움을 아실 것입니다.

  7. 칸트의 형이상학에 대해 어느 쪽에 포인트를 주느냐에 따라 과학과 다른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을 정초하려한 칸트의 시도가 현대 과학의 새로운 발견과 성과들이 나온 지금 상황에서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에 대해 의견은 충분히 갈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로 분석철학적 전통에서 칸트를 바라본다면 부정적이겠고 선험철학의 구도에서 바라본다면 긍정적일텐데요… 그과학에 가까운 입장에서는 칸트를 당대의 과학적 성과를 종합할 수 있는 형이상학을 시도했다고 보겠지만 철학 고유의 맥락에서 본다면 칸트에게서 가장 중요한 구도는 선험성에 있다고 보겠지요. 아마도. 그리고 이것가지고 양측이 꽤 논쟁하는 걸로 알고 있고요(아. 제가 뻔뻔하게도 지금 헛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걸 논증하는 것만해도 논문하나 나올텐데 쓸 능력도 없으면서 이런 위험한 소리를 하다니…T.T… 배우는 과정에 있는 사람의 만용으로 너그러이 여겨주시기를)

    논쟁이 무효라고 하시기는 했지만 개인적인 견해로는 노정태님의 견해에 동의가 갈 밖에 없는게 아이추판다님이 하시는 말씀을 보면 선험성이라는 칸트 철학이 논의되는 차원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는 채로 그저 철학의 헛소리를 반박하는 현대 과학의 성과가 이렇게 나왔는데 뭔 헛소리임? 이러고 계시다는 거죠.

    이런 비유를 한번 들어보죠. 데카르트가 형이상학 하면서 상당히 현대 과학으로 반증이 될 수 있는 헛소리들을 많이 하기는 했죠. 갑자기 그 구체적인 예들은 기억이 안납니다만…-_-;;; 그런데 그런 것 말고 그가 철학의 제일원리로 삼았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런 부류의 철학적 내용도 과학적 발견으로 반박되거나 헛소리라고 여겨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일까요? 만일 그걸 헛소리라고 반증하려면 대체 어떤 과학적 탐구를 해야 할까요?

    설령 양보해서 칸트의 시공간론이 현대 과학의 새로운 발견으로 완전히 틀린 것으로 입증된다고 하더라도 칸트의 형이상학은 그 존립근거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선험적 감성론 일부의 내용만 파기되고 칸트의 형이상학 중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형이상학이 부정될 뿐이지요.

    뭐. 감정적으로도 아이추팬더님 글은 좀 불쾌했습니다. 노정태님의 글도 좀 거칠게 무식을 면박주는 식으로 기분 상할 수 있게 쓰기는 하셨지만 그에 대한 아이추팬더님의 답글도 단순히 과학적 발견 몇개 딱 몇줄로 제시하면 칸트 철학이 완전히 틀린 과학적 가설로 확인 되기라도 한 것처럼 단정적으로 쓰시면서(칸트철학이 논의되는 고유의 맥락에 대해 완전한 몰이해와 무배려를 드러내시면서 말이죠) 그 글을 설명하는 다른 글에서는 노정태님 혹은 그분의 견해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완전히 그분 특유의 박식한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광신자로 조롱하기까지 하니 만학의 왕이라던 철학이 분과학문들에게 다 자기 영지 떼 주고 거지꼴 되었다고 해도 이런 정당하지 못한 대접까지 받아야 하는 심정이 들더군요.

    철학이 다시 왕이 되어야 한다라는 식으로 절대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구요. 오히려 거지라서 구걸다니는게 참 재밌고 즐겁고 거지에게는 거지대접 하는게 당연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지만 이런 대접은 정말 거지 대접이 아니라 인간 대접도 안 하는 거니까… 아이추팬더님이 예전 라캉논쟁 때문에 참 욕보신 건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만 다른 필드에 대해 발언하실때는 그 필드에 대해 최소한의 존중은 보여주셔야 되는 게 아닌지…

  8. 나중에 발견한 건데 도킨스에게 한 말 하는 테리 이글턴은 종교학자는 아님. 마르크스주의 문학 비평가.

  9.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한의학을 전공하는지라, 이런 류의 논의들을 접할때면 항상 애매한 포지션에서 갈팡질팡하게 됩니다. 예전에 김우재님의 글에서 ‘과학자의 종교는 과학이다’는 도올선생의 말을 읽은 기억이 있어요. 제 나름대로 그 말을 ‘아는 것에 대해서는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솔직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는 있습니다. 아는 것에서 아직 모르는 것으로의 논리적 비약은 언제든 끼어들 수 있는 것이니까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로 말이지요. 그런 조건을 갖췄다는 전제하에서라면 어느 학문이든 학문으로서의 가치는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한의학을 포함한 임상의학이 그런 의미의 과학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항상 의문을 갖게 되지만요. 결국 밥그릇의 문제에서 자유롭게 이야기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뻔한 결론으로 돌아오게 되지요.ㅎㅎ

    아! 그리고 분자생물학에 대해 질문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단백질의 3차원 구조같은 것들이 밝혀지게 되는 역사적 과정들이 궁금져서요. 약리학의 기본개념인 리간드-리셉터가 처음에는 가설로 세워지고, 이에 대한 실험들이 설계가 됐을 거 같은데.. 아무래도 단백질의 구조를 처음부터 눈으로 보지는 않았을 거 같구요.
    특정 리셉터에 대한 작용물질의 구조가 약간만 변형되더라도, 오히려 길항작용을 하기도 하는데, 3차원 구조만으로 그러한 작용의 +/- 랄까 그런 것들이 변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 얼핏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중고딩때 분자생물학의 효소 반응에 대해서 배우면서도 너무 당연하다 여겨온듯 합니다. 한번도 그 이론이 자리잡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아요. 분자생물학의 역사적 변천 과정이랄까, 가설들이 수립되고 확인되는 과정들을 알 수 있는 책이 혹시 있나요?

    쓰고보니 이 글의 내용과는 별 상관이 없는 질문이긴 합니다만..

  10. 한의학 공부를 한답시고 예전에 알던 한의사분께 책을 한구너 구해놓고는 여전히 못읽고 있네요 < 한의학특강>이라는 책인데..
    리셉터-라이간드 발견의 과정은 따로 공부해본적은 없는데 (역사가 상당히 짧습니다) 모랑쥬의 < 분자생물학:실험과 사유의 역사>를 읽으세요. 가장 좋은 책입니다.

    리셉터-라이간드는 세포막을 사이에 두고 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에, 라이간드만 잘 추출할 수 있다면 어세이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을 겁니다. 나중에 구조들이 밝혀졌고 알고 있던 반응에 구조적 설명이 더해지게 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부터 구조로 모든 걸 설명하지 않아요. 나중에 구조가 따라옵니다. 보통 기능을 먼저 알고 구조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구조만 보고는 기능을 알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단백질이 단순하게 생긴것도 아니고 말이죠. 기능이 알려져 있으면 거기다가 구조를 끼워맞추는 건 쉽습니다.

    여하튼 말씀하신 문제들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모랑쥬의 책이 가장 좋은 해답입니다. 블로그 RSS 등록해둡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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