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생학이 나쁜 것인가

최근 자연과학의 혁명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이 추적되지 않고 또 자연과학자들이 철학잡지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전투적 유물론은 전투적일 수도 유물론적일 수도 없다. 레닌, <전투적 유물론의 의의에 대하여>

사회주의 이론의 세 거두,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은 모두 자연과학의 목소리에 자세히도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저작에서 동시대 자연과학적 성과들과 이를 헤겔의 변증법과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하나의 과학이론으로 만들고 싶어했고, 그로부터 그들의 이론의 확실성을 보장받고 싶어했다.

과학의 가치중립성, 과학의 가치지향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내가 이렇게까지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솔직히 잘 알지 못하겠다. 19세기 말부터 이를 고민했던 과학자, 철학자, 사상가들의 저술들만 훑어봐도 이것이 아주 때늦은, 그리고 케케묵은 냄새가 나는 논의임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국가에 살던 이론가들과 과학자들만이 자연과학과 가치의 관계를 고민했던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 사회에 살던 사상가와 과학자들도 그런 고민을 했다. 칼 포퍼가, 마이클 폴라니가, 로져 스페리가, 존 듀이가 모두 그런 고민을 했던 인물들이다. 문제는 아직까지도 그들의 노력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국내의 과학문화는 후졌다.

완성되지 못한 저작 <자연의 변증법>에서 엥겔스는 자연과학의 성과에 대한 연구로부터 변증법을 구제하려고 노력한다. 그 시도가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특히 불변하는 자연이라는 개념에서 혁명의 어떠한 철학적 지지도 볼 수 없었던 엥겔스가 다윈의 진화론과 생물학의 진보개념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생물학적 변증법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과도 또 달랐다. 이는 엥겔스가 속류 사회진화론자 루드비히 뷔흐너에 대한 논쟁적인 책으로 <자연의 변증법>을 기획했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레닌과 엥겔스가 공히 동의하는 지점이 하나 있다. 과학의 가치중립성이라는 논제가 부르주아적인 관념이라는 것이다. 역사를 일종의 이데올로기의 투쟁이라고 보았던 두 인물이, 나아가 그 역사를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일반화시키고 이를 19세기 자연과학의 가장 위대한 성취라고 자뻑하던 두 인물에게 고고한척 하며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말하는 과학자들의 태도가 부르주아지의 그것으로 보였다는 데에는 이상할 것이 없다. 문제는 레닌과 엥겔스가 과학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자연과학이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도 이들은 파악하지 못했다. 그것은 자연과학이 발견한 것들에 대한 분석과 적용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과학의 방법론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적용으로부터만 나온다.

우생학과 리센코주의, 그리고 맨하탄 프로젝트는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더욱 공고히 하고, 과학자들로 하여금 상아탑속에 움츠리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다. 틈만 나면 지식인들이 과학자들을 공격하는 약방의 감초가 된 우생학은 줄기세포 논쟁과 인간 복제 문제 등등을 거치면서 너무나 당연하게 취급되고 있다. 우생학은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류의 복지에 해가되었고, 불행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의 섣부른 적용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우생학의 역사가 이를 너무나 자명하게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생학과 리센코주의, 맨하탄 프로젝트가 과학의 사회적 적용을 막는 기준이 된다면 우리는 이를 조금 더 자세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실은 서구에서는 이미 이에 대한 많은 분석이 있었는데, 국내의 후진 과학문화는 이를 받아들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아는 사람은 안다. 위의 사례들에서 과학자들은 주도적인 위치를 점유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가 그 주도적인 위치에 과학자가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위의 사례들에 대한 자세한 반박 대신 나는 한가지 명제를 제시하려고 한다. 그것이 과학의 가치중립성이라는 무의미한 논변으로부터 과학의 가치지향성을 정당화할 명분까지를 확보할 근거가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자연과학의 발견물들은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이다. 문제는 그 발견물들을 사용하는 데에 있다. 그 과정에 가치가 개입한다. 과학의 발견과정 자체에 가치가 개입한다는 것이 과학사회학자들 중 일부의 주장이다. 여기서는 그런 주장을 다루지 않겠다.

우생학의 발전에 그 어떤 사회적 가치가 개입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억지다. 굴드의 <인간에 대한 오해>는 이러한 억지에 대한 통렬한 반박이다. 분명 우생학적 연구에는 백인 과학자들의 인종적 편견과, 그들이 겪어야만 했던 사회적 경험이 녹아들어 있었다. 예외적인 경우가 있었지만(티데만의 경우가 그렇다. 사이언스타임즈에 내가 쓴 글 ‘하이델베르그의 위대한 과학자‘를 참고할 것. 그런데 도대체 과학에 관련된 내 글에 딴지를 거는 사람들은 미르이야기는 읽고 말하는 건가?) 그 경우에도 과학자가 과학적 발견물을 사회적 개입 없이 가치중립적으로 판단했다고 보기 어렵다. 어느 경우던 과학적 발견에 가치가 개입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한 일이다. 또한 우생학은 독일과 미국의 국가 이익에 의해 가장 비참한 비극을 경험했다.

리센코주의는 조금 다른 예다. 여기서 우리는 이론적 독단이 가져온 폐해를 목격한다. 리센코주의는 측정량에 이론이 승복하는 과학의 세속화과정의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린 사례다. 리센코주의에도 과학적 발견에 가치가 개입되는 과정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합당한 유전학적 이론만이 허용되었고, 그것은 라마르키즘이었으며 따라서 이에 반하는 모든 발견들은 매장되고 합당한 발견들만이 발표될 수 있었다. 우생학과 달리 리센코주의의 문제는, 이론의 불변성, 확실성에 대한 집착이 가져오는 폐해와 관련된 것이다. 그것을 이념이라 바꾸어 불러도 문제가 없다. 레닌과 엥겔스에게서 나타나는 문제도, 그들이 자연과학의 성과들에 대한 탐구로부터 자신들의 이념, 즉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이념의 정당화 근거를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그들의 무지가 녹아 있다.

맨하탄 프로젝트의 경우는 국가의 이익이 과학과 결부될 때 나타나는 문제를 보여준다. 국가의 이익이라고 에둘러 표현한다 해도, 결국 이는 리센코주의가 보여준 이념종속성과 다른 문제가 아니다. 과학이 그보다 강력하게 현실을 지배하는 힘에 의해 종속되었을 때, 과학은 언제나 왜곡되었다. 그리고 그 원죄는 모조리 과학 그 자체 혹은 과학자들에게 전가되었다. 너무나 쉬운 결론이다.

세 가지 사례 모두에서 과학적 발견물이 사회에 적용되는 것은 위험하다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사람이 있다면 바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과학적 발견물이 사회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이다. 세가지 사례에서 우리는 과학적 발견이 전혀 과학적으로 사용되지 못했다는 사시을 알 수 있다. 우생학과 핵폭탄은 정치적 의도에 의해 악용되었다. 리센코주의는 이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학을 왜곡했다. 여기 어디에도 과학적 발견물이 과학자 사회내에서 ‘과학적’으로 사용되는 예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적 발견물의 과학적 사용의 예는 인류역사에 수두룩하지만, 우리는 우생학과 같은 반례들로만 이를 부정하려 한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과학적 발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 사용법은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가 끝없이 물어야 하는 질문은 바로 그것이다.

과학의 세속화란 이론이 측정량에 의해 끊임없이 제한받는 과정이다. 측정량의 도전을 거부하는 이론은 과학자 사회에 의해 버림받는다. 과학적 발견이 승인되는 과정, 그러한 승인과정을 주도하는 과학자 사회의 의사결정과정, 그것은 포퍼에 의해 열린사회의 가장 좋은 사례로 인용되곤 했다. 실은 그것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신중함의 다른 이름이며, 독단을 인정하지 않는 열린 마음의 다른 이름이다.

과학의 발견물들은 얼마든지 적극적으로 사회에 적용될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 과학적 발견물들이 그럴 수 없다면, 그 어떤 지적 성과물들도 그러한 자격을 얻을 수 없다. 문제는 과학적 발견물들을 사회에 적용하는 방식이다. 이 지점에서 많은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더 이상 과학적 발견물의 가치중립성이라던가, 그것의 적용불가능성 따위를 논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논의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라는 지점이다. 그리고 나는 과학적 발견물들은 그 발견물을 만들어낸 과학의 방법론과, 그러한 과학적 방법론에 익숙한 과학자들에 의해 가장 잘 적용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적 발견물들이 과학자에 의해 주도적으로 적용되는 역사적 사례를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러한 사례는 겨우 한 두건이었으며 그마저도 이념과 독단이 횡행하던 사회적 혼란기에 시도된 것들이었다. 과학은 그러한 사례들로부터 충분한 자성의 기간을 거쳤다. 더이상 그러한 예에 주눅들 이유는 없다. 우생학과 같은 역사적 사례들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은 과학이 더이상 사회에 적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윤리적 강령따위가 아니라, 그것을 누가 어떻게 사용해야만 했던 것인가라는 실제적인 문제해결에 관해서다.

과학사를 공부해보면,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발견물의 사회적 적용에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가 드러난다. 그들이 발견한 것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전문가로서, 과학자들은 신중함이라는 미덕을 지닐 수 있었다. 나는 신중함이라는 미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거기엔 과학적 발견물들이 승인받는 과학적 방법론의 시스템과, 그러한 승인과정을 주도하는 과학자사회이 민주적 의사결정시스템에 대한 고려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한 시스템이 갖추어졌을 때, 과학자의 신중함이라는 미덕이 플러스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런 시스템을 갖추기 위한 구체적 실천방안을 난 아직 잘 알지 못한다. 막연히 나는 과학자들이 전면에 나서야 하며, 그들의 지위가 격상되어야 하고, 그들이 직접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회가 아름다울 것인지 알지 못한다. 여성 국회의원이 많아지면 국회가 부드러워지고 아름다와질것이라더니 전혀 그렇지도 않은 것을 보면 나의 이런 생각이 틀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과학자들에게 가치중립성 따위에 매몰되지 말고, 그러한 신화를 깨고 사회에 책무를 다하기 위해 사회로 나오라는 과학사회학자들의 주장에 소극적으로 반응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그들의 주장을 역이용한다. 그래 과학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전면에 나서겠다. 그러니 사회학이 사회에 적용되는것처럼 과학이 사회에 적용되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 당신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겠으니, 과학의 객관성과 절대성의 영역을 당신들의 요구처럼 약화시키고, 상아탑에 갇힌 과학자들을 모조리 사회로 끌고 나오겠으니, 과학자들이 정치를 하고 사회를 변혁시키는 주체로 서는 데 당신들이 도움을 좀 달라. 이렇게 말하면 과학사회학자들이 뭐라고 말할까. 나는 그게 궁금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왜 박명수가 노래를 그따위로 망쳐버렸는지 더 궁금한 것이다.

35 thoughts on “우생학이 나쁜 것인가

  1. 과학의 발견 그 자체는 가치중립적이지만, 그것의 실제적 적용과정에서 특정 가치를 강화하도록 유도하는 사회환경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현실이 있고, 인문학자들은 그 뿌리를 추적하기보다는 일단 가치중립적으로 기능하지 못한 우생학과 맨하탄 프로젝트 등 과학의 각 연구들을 비판했고, 그로부터 가치중립성이라는 개념으로 후퇴해 버린 과학.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지키기 위한 방안으로는 사회의 환경으로부터 격리됨으로써 발견에 관한 것만을 논하는 매우 좁은 행동반경으로 제한되는 방법이 있기에 사회참여를 줄였던 것이고. 그런 역사들의 기저에 < 과학자는 사회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고.

    과거 과학의 정치참여 행보에 비추어 보았을 때 최근에 형성된 과학의 가치중립성이라는 개념은 참으로 과학의 일부만을 대변하는 개념이고, 또 그것이 나타난 배경을 살펴보았을 때, 과학자가 가치를 지향한다고 해서 과거에 그들의 행동을 암묵적으로 결정했던 사회적 가치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질 수 없고. 과학자가 특별히 더 괴팍한 인상을 가졌다거나 하긴 어려울 테니.

    그러고 보면 애니메이션에서 과학자가 괴팍한 이미지로 흔히 묘사되는데 그것이 언제부터 그랬던 것인지 추적해 보는 것도 참 재미있을 듯하군요. ㅎㅎ

    제가 이해한 것이 맞습니까?

  2. 사실 저 짤방은 백댄서를 보기위한 짤입니다.

  3. 과학자가 이상하게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었습니다. 프랑켄슈타인때부터 지금까지. 과학은 경외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게 잘 없어지질 않네요. 역사는 그 반례들로 가득차 있는데도 말이죠. 독해력이 뛰어나십니다.

  4. 제가 소녀시대 사진을 보러 오는지 김우재님의 글을 읽으러 오는지 어느샌가 잊어버렸습니다. 냉면~ 냉면~ 냉면~

  5. 김우재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Crete라고 합니다. 현재 새로이 공론사이트 아크로(acro.pe.kr)의 사회자팀을 맡고 있습니다. 단순한 시사토픽보다는 좀 더 심도있는 토론이 가능한 사이트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번 김우재님의 포스팅을 좀 더 많은 회원들과 나누며 토론의 깊이를 더해 보고 싶습니다. 과한 청인 줄 압니다만, acro.pe.kr의 메인게시판에 이번 김우재님의 포스팅을 올려주실 수 있으실런지요.

    그럼 좋은 주말되시기 바랍니다.

  6. 소녀시대 사진을 보러 오는 적통(red pain)님이 진정한 저의 지원군이십니다.

  7. 선생님 오늘의 글도 잘 봤습니다. ^_^

    과학의 가치중립성과 가치지향성.
    사회와의 접합점에서 그 방향이 달라질 수 있고,
    옳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좋은 거름도구가 필요하고
    그 역할을 과학자가 전면에 나서서 하겠다.
    이것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겠는가.

    짧은 독후감이 잘 이루어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

    오늘은 들어가면서 추천해주신 ‘게놈’을 사들고 가봐야겠습니다.

  8. 이 글을 통해 어느정도의 입장을 알것 같습니다. 제가 트랙백을 걸지 않는것은 그럴 생각이 없기도 하지만 블로그가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쓰던걸 없애버렸거든요. 그러니 저를 정체를 밝히지 못하는 겁쟁이라 생각해도 할말이 없지만 정말로 그래서 그런건 아니라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이건 그냥 개인적 바램입니다.

    우재님 글을 요약하면, 과학의 가치지향성은 아무 문제가 없다. 다만 그 과정이 “과학적”이어야 한다. 똥이 무서워 된장을 못담글까? 단지 된장과 똥을 어떻게 구분하는지만 확실히 해두자.

    대략 이 정도… 예상했던것보다 훨씬 소박한 주장인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현실적으로 똥과 된장이 구분되지 않거나 거의 구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리센코 사건이나 황우석 사건이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를 점유하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것들이 똥에 비유된다면(식사하시는 분들껜 대단한 결례지만) 이념적 성질을 포함한 토론, 의사결정 과정상에서 과학의 결과물이 “긍정적 방향으로” 쓰여지는건 된장으로 비유가 되겠죠. 그리고 우재님은 이 후자의 것을 위해 과학의 가치지향성을 강하게 주장하는것이겠구요.

    문제는 똥을 내놓고 있으면서 그것이 된장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을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된장과 똥을 구분하는 기준이란것도 없다는데에 있습니다. 창조과학 하는 사람들을 보면 분명히 드러나는데, 어디 그 자들이 자신들을 “똥”이라 생각합니까? 더구나 창조과학과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기 위한 내셔널리즘을 표방한 과학이란게 어차피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가 하는 점에서만 다를뿐, 피장 파장이라는데에 제가 지적했던 문제의 핵심이 있습니다. 모두 자신들만이 옳다고 하며 자신들의 과학이 “좋다”고 얘기합니다. 어차피 정답이 없는 분야이고 가치가 개입되어 있는 이상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는 분야란 말입니다. 기껏 얘기해봐야 불교와 기독교중에 어떤것이 더 낫느냐 이런식의 논쟁밖에 될게 없다는거죠. 민중들을 위한 과학이요? 민주적인 과학이요? 그것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시는것 역시 우재님만의 “가치관”에 의한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인종주의”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내세우는 우생학과 뭐가 다르죠? 네 우생학이라고 해서 특별히 나쁠게 없습니다. “민주주의를 결부시킨 과학”도 우생학과 별 다를게 없거든요.

    어쨋든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결부시킨 과학은 그 의도를 떠나 “왜곡”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재님이 내세우는 과학이 무엇일지는 몰라도 그것이 “왜곡되지 않는다”란 주장은 근거가 희박해보입니다. 시대적으로 좋은 가치라 평가되는것을 과학과 결부시켜도 어차피 왜곡되는건 마찬가지란 얘기죠. 게다가 어떤 과학이 더 좋은 과학이냐 하는건 과학적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메타-과학적 논의거든요. 어떻게 과학을 넘어서는 논점을 과학과 결부시키려 하십니까? 이러한 것은 과학이 아닐뿐더러 과학적 틀로 생각할 수 있는것도 아닙니다. 차라리 철학이라면 모를까.

    제가 이런 얘길 쏟아놓는다고 해서 과학이 사회에 적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에 반대한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저도 당연히 거기엔 백번 동의합니다. 다만 저는 그러한 주체가 과학자는 아닐거라는 점에서 우재님과 다른 의견을 갖습니다. 과학자가 정책을 결정한다면, 정책 입안자의 존재이유는 희박해집니다. 정책 입안자가 할일이 있고, 과학자가 할일이 따로 있다는 얘깁니다. DNA이중 나선 발견을 했던 제임스 왓슨과 같은 사람이 현재 과학 정책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고 해서 과학자가 사회에 적극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당화되진 않습니다. 이 사람의 현재 역할은 과학자가 아니라 “과학을 공부한 행정가”니까요. 모르는 사람들은 왓슨과 같은 사람을 놓고 “과학자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훌륭한 표본이다”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사람은 탁월한 행정가로서 기능하고 있는거지 지금 과학자로 일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가끔 우재님 글을 보면요.(요새는 그 주기가 더 짧아졌는데) 과학사회학, 정책과 이념, 과학의 사회에의 적용등을 과학 그 자체와 거의 마구잡이로 혼용하고 계시는듯 합니다. 물론 각각의 것들이 어떠한지는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죠. 굳이 각각을 분리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기때문에 그런것 같은데, 모두를 초월하는것과 개념을 뭉개버리고 이거저거 마구잡이로 섞는것은 구분이 되어야겠습니다.

    이번 글로 우재님의 입장을 잘 이해할것 같습니다. 저도 그리 시간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다음번에 언젠가 이와 관련된 논의를 해볼 생각을 갖고, 여기서 그만하겠습니다. 아무튼 우재님이 제가 예상하는 바와 많이 빗나가 있어서 조금은 실망했습니다. 그것이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9. 동의하지 않는것은 소녀시대짱님의 마음입니다. 실망을 했다는 말. 제 블로그에서 참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 제가 진정 듣고 싶은 말은, 실망했다는 그런 가치판단적인 발언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건설적인 대안입니다. 님도 그런 부류는 아닌 듯 합니다.

  10. 게놈은 참 잘 쓴 책입니다. 리들리는 참 못생겼는데 글은 참 잘생겼습니다.

  11. 올렸습니다. 그곳은 알고 있었는데 왠지 모를 장벽이 있습니다. 회원제를 없애고 그냥 회원들간의 링블로그로 만들면 안되는지?

  12. 건설적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속단하진 않으셨으면 합니다. 저도 나름의 견해가 있습니다. 다만 이런곳에서 댓글로 그런걸 끄적이는게 적절치 않기도 하고 시간도 허락하지 않으니 그럴수가 없는 입장임을 이해해주십시오.

    또 건설적 대안이 꼭 나와야만 생산적인 논의가 되는것도 아닙니다. 쉬운예를들어 아인슈타인이 EPR 패러독스를 내놓은게 어디 양자역학에 대한 건설적 “대안”씩이나 된다는 말인가요? 나쁘게 보면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결점을 어떻게든 찾아내려고 했고 그 결과로 나온게 EPR 패러독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딴죽은 후대에 와서 양자역학의 “비국소성”의 중요한 성질을 명쾌하게 끄집어낸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분야의 예를들어도 그렇습니다. 이쪽의 대가인 마빈 민스키가 로젠 블럿의 퍼셉트론을 이론적으로 무참히 밟아버렸던것도 그 사회적 함의는 별개로 하더라도 수학적으로 퍼셉트론의 한계를 아주 정밀하게 분석해낸 개가로 평가됩니다. 그것은 대안이 아니었으나 이론의 한계를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딴죽입니다. 이처럼 어떤 의견은 대안같은걸 만들지 않아도 충분히 의미있는것일 수 있습니다. 물론 제가 딴죽을 건 내용이 정말로 의미가 있는것이었는지 아닌지는 알아서 판단을 하시면 될일이고.. 지금은 제가 여기에 관심을 두고 있진 않습니다.

    제가 여러가지로 우재님과는 입장을 달리하는것 같은데 아마 이 부분은 나중에 논문으로 대결해야지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군요.

    저는 다음을 기약하겠습니다.

  13. 속단하기는좀 그런데, 대충 보니 행정학이나 경영학 전공하고 과학정책이나 과기부나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등등의 수장이 되고 싶은 그런 부류 아닌가 싶은데. 아님 말구.

  14. 나아가 지금 본인이 아인슈타인이나 민스키처럼 제 글의 논조를 낱낱이 분석했다고 여기는 건 아니죠? 배운게 있으니 사람 이름 가져다 붙히기는 쉬울지 모르는데, 지금 아인슈타인이나 민스키가 활동했던 그런 전문가 사이의 논의와 이런 물렁한 논의가 같은 선상에서 비교될 성질의 것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거죠? 자기 입장을 정해두고, 제 글이 거기에 맞추어지길 원하는 건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독법인지 모르겠어요. 참 실망립니다

  15. 엇. 집에 와서 선생님 블로그에 와보니 소녀시대짱이라는 분이 글을 남겼다.

    음.. 수준이 떨어지는 나로서는 낄 건덕지도 안되지만 하나 떠오르는게 있었다.

    쿨게이던가… 골룸이던가…응??

    아님 말구. (우재 샘 흉내내기 ㅎㅎ)

    그래도 뭐 소녀시대짱이라고 닉넴 적으신거보면

    우재 샘을 존중하시는 것 같아요. 뭐랄까

    진짜로 실력 풍부하신 분이면 지식의 칼을 꺼내서 승부보고 싶은 그런 느낌?

    좋게 말하면 이런거구 아니라면 그는 골룸 ㅇ_ㅇ

  16. 과학적결과 자체는 가치중립적일수 있다. 그러나 과학적결과물자체가 중립적이라는 말은 과학자들이 연구할때나 의미가 있으며 그것은 철저히 사회와 유리되어있다
    .
    일반적으로 사회속에서 과학의산물을 이용할때, 더 나아가 단지 그것에 대해 말할때는 결코 가치중립적일수는 없다. 당신이 누군가가 유전학에 대해 이야기하는걸 듣는다면 당신이 유전학을 연구하거나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미 어떤 종류의 의도,가치,정치적 작용이 매개하게 되어있다. 인간은 사회적동물이라는것을 기억하라. 누군가 <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다/아니다.>라고 말한것 조차 이미 가치중립적이지않다.

    요컨데 사회속에서 나타난 과학은 결코 가치중립적일수는 없다. 우리가 대체로 < 과학이 가치중립적이라고 말할때>의 과학은 사회속에서 나타나는 과학이며 따라서 그것은 가치중립적이라고 말할수 없다.

    사실 전문가라는 뜻은 이론의 문제점이나 어떨때 잘못 적용되는지를 잘 아는 사람을 뜻한다.
    때문에 과학에 대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은 과학이론에 대해 언급하거나 현실에 적용할때는 잘못되기 쉽다. 더 나아가 과학자만이 현실의 적용에서 문제가 생겼을때 이것이 이론의 문제인지 아니면 다른문제때문이지를 파악할수 있다. 이를통해 과학의 발전이 이루어질수도 있다.

    일반 사회속에서의 과학의 쓰임에 대해 과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과학자들이라 하더라도 중립적인 쓰임이란 있을수 없지만 이것만이 과학의 심각한 오용을 막을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나름대로 제 생각을 섞어서 요약해봤습니다. :-)…

  17. 지금 과학을 연구하려면 자본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과학자는 자본에 유기적인 지식인이 되기 쉬운 듯합니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이 정치를 하고 사회를 변혁시키는 주체로 서”야 한다는 말씀은 너무도 지당하신 말씀인 듯합니다. 또한 전국민적 아이돌이 되려면 자본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소녀들은 자본에 유기적인 연예인이 되기 쉬운 듯합니다. 그러므로 “힘내” 같은 혁명가를 많이 불러주어야 합니다.

  18. 과학과 가치, 이래 버리면 할 말이 너무 많아. 어디부터 끼어들어야 할 지 잘 모르겠음. 자연 그 자체, 팩트 그 자체에는 가치가 없다, 인간이 하는 일 중에 가치와 무관한 일은 없다, 이 두 가지 아주 당연한 원칙 안에서 도대체 뭐가 문제가 되는지를 좀 짚었으면 좋겠음. 과학사회학의 구체적 연구보다 그런 걸 속류화시켜서 이해하는 STS-골룸들이 문제인 듯.

    이 사람들은 과학의 “성과”가 문제인건지, 과학에서의 “이론 선택”이 문제인건지, 아니면 “연구 대상의 선정”이 문제인 건지, 아니면 과학의 성과를 “이용하려는 욕망과 의도”가 문제인건지 말야. 아니면 “과학자에게 과학 행정 권력을!”이라는 주장이 논점인 건지 명확히 하지도 않고 그냥 “과학”이란 말 쓰는 걸 너무 좋아해(하는 듯해).

    “이론이 대상을 창조한다”거나 “문제를 던지는 방식이 해답을 전제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가 과학의 가치 적재성을 말하는 거라고 이야기한다면 그 이야기가 과학이 “wishful thinking”이라는 이야기와 전혀 다르다는 걸 알고나 말하는 건지 모를 때가 좀 있음.

    암튼 STS 골룸 싫어. 스트롱 프로그램 하는 사람들이 바보는 아닌데, 대중 담론으로 가면 정말 바보같은 소리만 되는 듯.

  19. 사족이 기시군요.

    제가 우재님이 우려하시는 그 정도의 센스도 없는 사람은 아니니 걱정 놓으십시오.

    어차피 상대가 자기 글에 맞춰지길 바라는건 우재님도 마찬가집니다.

    그만하지요…

  20. 전 중간 부분을 읽고 상당히 뜻밖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연과학의 발견물들은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이다. 문제는 그 발견물들을 사용하는 데에 있다. 그 과정에 가치가 개입한다. 과학의 발견과정 자체에 가치가 개입한다는 것이 과학사회학자들 중 일부의 주장이다. 여기서는 그런 주장을 다루지 않겠다.’

    과학의 가치중립성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제가 항상 하는 이야기하고 워낙 똑같아서 말이죠. 게다가 전 저게 과학 내부에서도 이미 합의되어 있고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내용인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제 말이 사실이라면 논의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오해하고 있다는 소리인데…… 하여간 그런 이유로 우재님께서는 좀 더 라디칼한 주장을 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건 또 아니네요. 결국 논제가 몇가지로 집약될 것 같은데, 약간의 정리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드는 생각은 제가 잘못 독해하진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고, 이글이 ‘스켑틱’에 대한 비판과 어떻게 연결될지 궁금하다는 겁니다.

  21. 제가 과학과 사회에 관심이 많은데, 자연과학자의 견해를 알 수 있게 되어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제가 님의 글을 거칠게 요약하면, “과학의 사회적 가치를 과학자가 [주도하여?] 내리겠다 또는 내려야 한다”로 이해했는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전에 읽은 임재춘의 “한국의 이공계는 글쓰기가 두렵다”라는 책을 보면, 이공계의 소통 부족–더 정확히는 글쓰는 능력 부족이 한국 이공계 위기의 본질 중 하나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공계까지도 거칠게 자연과학의 범주로 묶어서, 제가 님의 글을 읽고 궁금한 점이 여럿 있지만, 그중 가장 큰 하나(에서 파생된 질문들)만 드린다면.

    1) “…과학이 사회에 적용되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한국의 사회 또는 사회담론이 한국 과학계를 억누르는지요?

    1-1) 억누르는게 아니라면, 혹시 한국의 과학계가 그만큼 사회 담론에 영향 또는 주도할 능력이 자체적으로 부족한 것은 아닌지도 살펴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1-2) 억누른다면, 어떻게 얼마나, 그리고 –님의 말을 빌어 (애독자입니다^^)– 정량화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정량화하여 현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지 싶습니다.

    한국 과학계의 능력과 현 상황에 대한 신중한 고찰 (또는 과학적 발견) 없이 가치지향적 결론으로 도약된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22. 마이클 폴라니의 강연문은 좀 많이 멋있었다는. 과학자 사회가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의 구성에 원리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여지보다는 실제상의 기여가 남은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ㄲ

  23. 포스팅해 주신 내용으로 아크로(acro.pe.kr)에서 유익한 토론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회자팀에서 김우재님의 내용으로 [따름 토론 두번째]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과 과학의 가치 중립성 이란 내용으로 추가 토론을 진행중입니다.

    김우재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한번 오셔서 고견을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주말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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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자연과학의 가치중립이라…

    철학이 뒷받침 되지 않는 학문이 어디있으며 설령 그런 학문이 있다면 그 학문은 과연 존재의 이유가 있느냐는 논리 전개만으로도 쉽게 답을 구할수 있는 문제 인거 같습니다. (제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연과학도 철학의 자식인 이상 피는 못 속이는 거죠.

    음…이것보다는 ‘과학은 가치중립이 있을지 몰라도 과학자에게 가치중립은 없다’라는 표현이 더 좋을거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일전에 TV에서 ‘과학에는 국경이 없어도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어야 한다’던 황박사의 말이 오버랩되는군요.ㅎㄷㄷ)

  26. “죄가 무슨 죄가 있냐? 죄 짓는 놈들이 나쁜 놈들이지.” 영화 넘버3의 대사였던가요?
    말씀하신 대로 ‘과학적 발견’ 자체는 ‘총이나 칼’과 같아서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데 쓰일 수도 있고 사람을 죽이는 데도 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은 ‘인간’의 지적 활동이고 과학자를 비롯한 인간은 사회와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죠. 그래서 과학(넓게 말해 학문)의 가치중립성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우재님은 과학적 발견의 사회에 대한 “적용 또는 응용”에 중점을 두고 말씀하셨지만 제가 아는 일부 학자들이 이 문제 못지 않게 우려하는 게 ‘연구 주제’의 선택 문제더군요. 특히 의료 등 ‘실용/응용 학문’ 쪽이 더 심한 것 같기도 한데요, 우리가 사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다 보니까 ‘돈이 되는 연구’, ‘기업이나 국가의 재정지원을 얻을 수 있는 연구’를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실제로 학문적 호기심에 의한 주제 선택이나 학자적 사명감에 따른 주제의 선택은 점점 어려워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27. 과학이 가치중립성이 있느니 없느니에 관한 문제는 쓸모없다는 주장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만, 그 뒤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묻기 전에, 먼저 과학이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을 해야하지 않을까요? 윤리적 강령을 폐기하자고 하면서 또 다시 윤리학으로 도약하는것으로 보입니다.

    과학이 어떤것인가에 대해서 과학이 “일반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어떻게 사용할지도 알수 있지 않을까요? 항상 의도대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닌만큼, “과학”의 전문가이지 “이념”, “정치” 등의 전문가가 아닌 과학자가 사회에 진출한다고 해서 그것이 “과학적”(사실 과학이 과학적으로 사용된다는 말을 이해하진 못했습니다만)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오히려 휘둘릴수도 있겠죠.

    따라서 먼저 과학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무엇인지를 분석해야, 그 다음 질문인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답할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이것은 과학자의 사회진출 문제와는 별개입니다. 저 역시 과학자가 사회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다른 서브컬쳐 집단들이 정치에서 소외되는것 만큼이나 우려하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28. 어떻게 하다가 들어오게 되어 제가 지금 쭉 읽고 있습니다 재밌게^^

    저 역시 프랑켄슈타인이나 스파이더맨까지 보면서 왜 과학자들은 자신의 발견과 창작에 저렇게나 집착해서 말도 안되는 짓을 하도록 나오는 걸까(즉 왜 늘 미치는 걸까) 이상했거든요. 아마도 한 명의 정치가/사회학자의 정치기술보다는 한 과학자의 과학기술이 블록버스터형 스토리를 전개시키는 데 더 적합하다는 논리에서 상상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회참여의 대안적 형태에 대해서는 누구도 확답을 할 수 없지만 제 생각에는, 사회학자(통칭)와 과학자가 따로 사회에 주체적으로 참여한다고 할 때 그 둘의 기술의 범주와 수준을 같은 선에서 비교하고 적용 구역을 확정하는 작업이 우선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과학자들의 참여가 실현되는 형태도 구체적으로 상상돼야 하구요.

    그래서 말인데, 사회학자들로 예를 들자면 사회주의국가건설에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의 과학관료주의가 강령이 될 때 그 이데올로기(혹은 그 이행을 독점하는 공산당이나 위원회)가 강압적인 1인(혹은 1집단)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라면, 가령 보수당과 노동당이 대립하는 자유주의 공식정치에서는 그 정당들 역시 (그것이 선거와 의회라는 제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자와 같은 수준의 사회학적 영향력으로 봐도 좋을까요? 대통령과 집권당의 힘이 비교적 막강한 미국이나 한국의 경우, 정책이나 법안채택에 있어 특정(사회학적)세력의 영향력이 크다고 봐도 좋겠지만, 그래도 대중정치라는 제도적 배경은 역시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회걸설에 대한 과학자들의 영향력을 확대(혹은 법적인 확보, 확정)하기 위한 첫 번째 대안은, 죽을 쑤든 밥이 되든 먼저 과학을 공식제도정치의 무대로 오픈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 수순을 제외한다면 다른 대안은 없을 것 같습니다. 즉 과학자가 독재당 역할을 하겠냐, – 그나마 구실은 갖춘 – 양당제를 채택하겠냐의 문제로 비유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과학자가 실험과 발견을 연구실에서 주도한 후 공적무대에 나와 사회 적용 여부를 공개적으로 묻는 형태가 될지, 아니면 연구 단계에서부터 정치가 적용되는 형태(말그대로 의회에서 승인한 국가예산으로 연구를!)가 될지도 중대한 문제 같아요. 국회에 과학자들의 자리가 주어지거나 정부의 의해 직접 몇 명이 임명될 수도 있겠지만, 아예 독립적인 위원회가 구성될 수도 있겠죠. 후자의 경우 그 위원회는 진짜로 과학계가 주도하는 것으로서, 아마도 초정부/국가적인 규모와 권한을 먼저 확보해야 겠구요, 그렇다면 대중뿐 아니라 각국 정부에 대해서도 큰 압력을 행사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요즘 같은 때는 환경문제에 관하여 과학자 주도의 정보공개와 정책제안이야말로 김우재씨가 말씀하시는 바로 그 대안의 가능한 형태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쨌든 제 말은, 어느 지점에서든 공식정치와 섞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왕이라면 그 지점을 최후로 미루는 것이 좋겠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환경문제(제가 아는 게 밸루 없어서 이 정도의 예밖에 못들겠습니다~)에 대해 또 한 번 생각하자면, 그러한 과학자들의 역할이 지금 현실적으로도 꼭 불가능한 것이냐 하는 겁니다. 꼭 제도적으로 사회참여의 길이 보장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그 보장이야말로 우리가 여태껏 쭉 봐왔던 그런 것들일 테니까요.

    아마도 이 쯤에서 ‘돈’에 대해 말해야겠지요. 소설과 만화라면 과학자 1인의 지적 능력과 (무엇보다도)영향력에 주목하여 그것을 소재로 차용했겠지만 프랑켄슈타인과 문어괴물(?;)을 개발하는 비용의 출처는 별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연구비도 문제지만, 그 산물일 소위 과학기술이 앞으로 자본시장에 어떤 모습으로 출하될지는 아직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정리하고 21세기를 예측해 보는 대담에서 ‘과학자 역할의 변화’를 거론한 적이 있는데, ‘어쨌든 20세기동안 독보적인 권위를 유지한 과학자들은 가치중립의 신화, 실험실의 신화에 걸맞게 노골적으로 자본주의 시장에 진출하는 일은 없었는데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라는 총체적 삶의 방식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입장을 주로 전하는 말이었지만, 정치 이데올로기가 현실의 무대에 서자마자(즉 사람과 조직이라는 물질적 토대를 통하게 되자) 쉽게 그 자신의 윤리적 면모를 져버리고 정치적 상징자본을 개인적 부귀영화의 원천으로 삼았듯이 – 만약 정치와 구분되는 과학의 영역이 있다면 – 정치 외의 영역 또한 어떤 선이 무너져내리는 순간 (제 생각으로는 한 예로, 직접 사회참여의 무대를 확보한 이후로는) 원칙적으로 갈 수만은 없다는 말로 볼 수도 있겠죠. 기존 공식정치와의 연결망을 갖추느라 과학자 집단 이상으로 토대가 확장될 것이고, 애초에 공식질서(자유주의-자본주의적 질서)를 무시하기도 힘들구요.

    물론 과학자를 배제하는 것보다야 배제하지 않는 게 확실하게 좋은 얘기라서 과학자들의 사회진출이 “안 된다”는 것은 그 세 글자 자체로 이미 ‘안 되는’ 의견인 것 같습니다. “미루자”는 것도 불성실하구요. 다만 우재님이 크게 던져준 대안을 홀로 현실적으로 구상할수록 저로서는 미궁에 빠질 뿐입니다. 결국은 기존의 정치-경제무대를 뛰어넘는 역할을 과학자 스스로 창출해내는 길밖에는 없어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현재 자유시장주의의 논리대로라면 가장 많은 비용을 대주는 자야말로 가장 그 자원을 필요로 하는 동시에 그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하려는 적격자인데 말입니다, 과학의 성과가 사회적으로 활용될 수있도록 과학자들에게 주도권을 달라는 얘기는 과학의 성과를 사적으로는 팔아 넘기지 않겠다는 원칙(최소한 법령)을 전제로 하겠다는 얘기로도 봐도 좋을까요? 그것이 말이 안된다면 먼저 과학을 사회학적 의미에 따라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29. 제가 봐도 가치중립성을 따지고 할일이 아닌것 같습니다. 우재님도 언급하셨듯,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문제입니만, 그 대답에 상관없이 인간사회에 미치는 대한 영향력에대해서 고민해봐야할것같습니다.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가 아니라 그 영향력 자체입니다.
    도달한 결론이나 논리가 모든이에 통용되거나 모든인류가 납득할만한 진리는 역사상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이곳에 내비치는 의견의 색깔처럼 같은분야 같은 주제라도 각각 정반대되거나 같은 방향이라도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사상들이 수십억가지가 있겠지요. 만약 이주제에 이자리에 계신분들이 모두 납득하고 인정할 만한 합의점을 찾고, 나아가 상통하는 체제가 이룩된다하여도, 그에 순응하지 않는 무리나 개인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의도나 가치와 상관없이 사용자의 빗나간 판단에 따른 영향력. 역사가 말해주고 있지요
    .우생학은 간단히말해 인간이 애견의 개량을 위해 해왔던 연구들과 다름 없다는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생학은 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나쁠것도 없겠지요.
    어떠한 논리가 진리라하더라도 인간의 다수의 불완전성이라는 특성상, 완전하고 틈새없는 체제는 없는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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