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로서의 과학자

버날의 일대기와 그의 사상을 짧게 요약한 글이다. 인도의 천문물리학 연구소의 샤테르지 박사가 쓴 글인데, 버날에 대해 국내에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므로 좋은 소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공산주의자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생 공산주의자였는지도 처음 알았고, 홀데인이 인도 시민권자였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상대적으로 니담에 대해서는 국내에 알려진게 많은데 버날-니담-홀데인으로 이어지는 라인에서 과학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얻을 게 많다. 영국엔 이런 반동분자 과학자들이 이렇게나 많았는데 왜 그런 전통을 좀처럼 요즘엔 보기 힘든 것인지 모르겠다. 도킨스같은 보수주의자들이 영국 과학의 대변인인 듯 착각하지 말자. 버날은 20세기 과학사와 과학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다. 그의 과학적 업적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 그는 여성 대한 차별에도 반대했고 로잘린 프랭클린을 키운 인물이기도 하다. 원문은 여기. 초역이라 군데군데 이상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충 읽으시길. 이런거 번역한다고 나한테 콩고물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혁명가로서의 과학자 Scientist as revolutionary

버날의 삶은 과학자의 지식과 기예는 오직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사용되어야만 한다는 책임의 증언이다.

S. 샤테르지(S. CHATTERJEE)

1940년의 어느날에 두 사람이 영국 시골의 한 기차역에 내렸다. 그들은 국제적으로 명망있는 과학자들이었고 실험을 수행하기 위한 폐창고를 물색하고자 했다. 그들은 그 실험을 위한 훈련을 받아본 적도 없었고 경험도 없었으며 연구비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 중 한명은 생물학자로 전향한 물리학자 데스몬드 버날이었고, 다른 한명은 의사에서 해부학자로, 나중에는 동물원의 큐레이터로 전향한 솔리 주커만이었다.

실험은 매우 긴박한 종류의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된 상태였고, 독일 공군에 의한 폭격에 의해 영국은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당시는 레이더가 개발되지 않은 시기였다. 실험은 크기가 다른 폭탄이 가진 잠재적인 피해정도를 결정하고, 폭탄이 떨어진 곳에서 멀리 떨어질 수록 그 피해가 얼마나 줄어드는지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정말 간단한 일이었다. 원숭이와 비둘기들을 철장에 가둬두고, 각기 다른 거리에서 폭약을 폭파시킨다 -물론 경찰의 허가하에 실험이 수행되었다. 그리고나서 과학자들은 철장과 그 안에 갇혀 있던 생물들의 피해를 조사했다. 피해는 기대했던 것보다 매우 약한 것으로 밝혀졌다.

두 명의 과학자는 이제 자신들을 기니아피그로 사용했다. 즉, 자신들이 철장안으로 들어가 폭발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직접 조사해보고자 한 것이다. 그들의 발견은 영국시민들의 사기를 고양시키는 데 크게 일조했고, 도시보호체계를 계획하고 보호방벽을 디자인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건 가장 취약한 계층인 노동자 계급에게 특히 중요했다.

2001년 5월의 두번째 주에 탄생 100주년을 맞은 버날의 삶은 이러한 책임의 증언이었다. 그는 매우 드물게 아주 다재다능한 사람이었고, 그의 영향력은 과학자 사회를 넘어서 있었다. 과학에서, 그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 시스템에서 구조와 기능의 상호관계를 이해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사회적인 문제에서, 그는 과학의 기능과 과학이 기능하는 사회의 구조 사이의 상호관계를 탐구한 개척자였다. 철학자들은 세상을 해석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세상을 어떻게 변혁할 수 있는지 이해해야만 한다. 이러한 세계관을 가지고 버날은 과학자의 의무는 과학의 사회적 기능을 변화시켜, 과학이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주류계급들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라 여겼다.

존 제스몬드 버날은 1901년 5월 10일, 스페인 목회의 유대교였던 아일랜드의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미국인이었다. 그는 조숙한 어린아이였고 이것저것 안해본 것이 없었으며 심지어 9살에 자서전을 쓰기도 했다. 그는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리 손재주가 좋지는 않았다. 한번은 X-레이 튜브를 만들던 중에 친구와 함께 감전사할 뻔하기도 했다. 성장한 후에 버날은 그의 동료들이 기구를 만들 수 있도록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많이 제공했고, 고장난 시계같은 아주 값싼 물건들로 기구를 만드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10살 되던 해 버날은 아일랜드를 떠나 잉글랜드의 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목격했고, 이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영국사회에 가져온 비극을 목격했다.

버날은 캠브리지에서 공부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지적 만족을 느끼게 된다. 캠브리지에서 그는 많은 모임에 참석했고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가 만난 사람들 중엔 학생이나 지식인 뿐 아니라 군인들과 노동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해가 지지 않는다는 대영제국에서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의 비참한 삶을 보고 충격을 느꼈다. 1919년 11월 7일, 버날은 친구에게서 러시아의 10월 혁명의 소식을 들었고, 소련에서 시행중인 사회주의 실험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러한 정보들이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계기가 되었다. 버날은 이제 그의 아일랜드 민족주의가 얼마나 좁은 관점이었는지 깨달았다. 게다가 그는 “내가 싫어했던 모든 것들을 쓸어내 버린 것은 민중이었고, 그들이 과학적 세계를 가져올 것이가”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는 소련이라는 사회를 기초한 이데올로기, 즉 마르크시즘과 레니즘의 공부를 시작한다. 이러한 세계관과 조망을 가지고, 버날은 캠브리지가 제공하던 것과는 다른 좀 더 넓은 비전을 지닌 과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졸업시험을 위해 그는 수학, 화학, 생물학, 물리학과 광물학 등을 읽었고, 그의 백과사전적인 지식은 그에게 ‘현자’라는 별명을 안겨주었다.

마르크시즘을 받아들이면서 버날은 카톨릭을 거부하고 무신론자이자 공산주의자로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가족들을 불편하게 했다. 버날의 아버지는 그에게 신부님을 보내 버날의 신앙심을 회복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보낸 신부는 버날을 만난 후 역시 교회를 떠났다.

조금 다른 종류의 조우도 있었다. 어떤 학생들은 이 어린 공산주의자에게 본때를 보여주어야한다고 생각했고, 어느날 버날의 방을 공격했다. 이 전투그룹(훗날 영국의 제독이 된 로드 마운트바텐에 의해 조직된)은 버날에 의해 패퇴당한다. 그들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담배를 물고 쳐들어간 것이었다. 버날은 불을 꺼버렸고 그들은 버날을 볼 수 없었지만 버날은 그들의 담배불을 보고 그들을 때려눕힐 수 있었다.

1923년에 버날과 그의 부인은 공산당의 당원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1926년 대파업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일을 도왔다. 비록 10여 년 후에 그는 당원을 포기하지만, 여전히 공산주의자로 남았고, 형식적이고 깊은 공산당과의 유대관계는 계속되었다.

마르크시즘을 받아들인 캠브리지의 학생은 버날 혼자가 아니었다.  조셉 니담이나 JBS 홀데인과 같이 뛰어난 학생들도 캠브리지에서 마르크시즘을 받아들인 그룹의 회원이었다. 소련의 과학자였던 오파린처럼 홀데인도 화학적 진화를 증명하는 선구적인 실험을 수행했고, 이는 지구상의 생명이 무기물로부터 진화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버날은 여기에 한가지 차원을 덧붙이고 싶어했는데, 그것은 바로 분자의 화학적 성질뿐 아니라 분자들이 어떻게 배열되는가의 문제, 즉 구조가 어떻게 기능을 결정하는가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러한 버날의 관점은 1953년 왓슨과 크릭에 의해 DNA 이중나선 구조가 결정되면서 그 서막을 알리게 된다. 즉 20년 동안 버날의 선구적인 아이디어가 생물학에서 공인된 방법론으로 인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유전체 사업은 버날의 비전을 확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버날은 “생명은 더 이상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다. 생명은 실질적으로 해독이 가능한 암호문이나 수수께끼, 혹은 코드에 불과하다. 오늘날 과학적인 생물학자들이 그러한 생명의 신비를 제거한다는 것이 생명이 가진 복잡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경외를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관점을 견지했다.

비록 학생 버날의 전공은 수학과 물리학이었지만, 그는 생물학 분야로 그의 마지막 작업분야를 정했다. X레이 결정학을 정립하고, 생물학의 중요한 도구로 만든 사람이 바로 버날이다.

그는 컴퓨터가 없던 시절, 초기의 결정학자들을 돕기 위한 공식들을 테이블로 만들었고, 성호르몬과 단백질, 바이러스 및 각기 다른 상태의 물분자에 대한 구조연구에 선구적인 공헌을 했다. 이후 그는 액체 상태에 대한 첫번째 모델을 만들었다. 또한 그는 혼합물의 물리학의 선구자로 간주된다. 많은 유명한 생물학자들과 노벨상 수상자들이 그들의 성공에 버날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했다. 도로시 호지킨은 그녀의 노벨상은 버날과 함께 수상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헤모글로빈과 마이오글로빈의 구조에 관한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막스 페루츠와 존 켄드류의 연구, 바이러스의 전자현미경 사진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아론 클러지의 연구는 모두 버날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버날 자신은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버날과 그의 동료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생물학만이 아니라 삶 그 자체에 있었다. 그들이 연구실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든 원인은 연구실 밖에 있었다. 버날이 캠브리지 시절 ‘캠브리지 과학자들의 반전 운동 그룹’을 조직했던 것은 이러한 전지구적 이슈들 때문이었다. 버날의 그룹은 1930년의 대공황, 히틀러 독일의 나찌즘, 스페인의 시민전쟁, 일본의 중국침략과 영국 식민지들의 독립운동 등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암울한 세계적 상화에서 버날에게 소련은 희망의 상징이었고, 따라서 그는 소련의 과학자들과 교류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때 니코라이 이바노비치 부하린이 1931년 영국으로 팀을 데리고 건너왔다.

그 토론은 과학자들에게 두 가지 긴급한 요구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일반 시민들이 과학이 어떻게 그드르이 삶을 돕고, 또 잘못 사용되었을 때 해가 될 수 있는지를 교육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과학자 사회도 이러한 사회적 이슈에 관해 좀 더 교육받아야 한다는 것.

이러한 사회적 질문들에 대한 버날의 분석은 그의 작업들에서 발견된다. <과학의 사회적 기능>은 1939년 출판되었고 큰 반향을 몰고 왔다. 소련에서 사회주의자들의 혁명이 일으킨 자유에 대한 영향력에 대한 분석이 이 책에 실려 있다. 그는 자본주의 체계의 폭발적인 본성이 과학의 성장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다. 이 책은 또한 식민지 인도의 과학에 대해 간략히 분석하고, 인도 과학의 독립성과 창의성을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그의 가장 예리한 분석은 인도 과학의 발전에 기여한 주된 사회적 동력이 과학자들 자신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서, 독립을 위해서 싸워온 정치 운동가들이라는 점이었다.

책의 많은 부분은 나치 독일의 과학을 분석하는데 할애되고 있다. 버날은 독일 대학에서 교육되고 있는 과학이 산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특히 화학 산업- 따라서 군사주의에 의해 지원되었으며 결국 파시즘이 대학으로 진입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분석한다. 버날에 따르면, 히틀러가 학계를 파탄낸 또 다른 이유는 그가 비유대계 지식인들로 학계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비유대계 지식인들은 유대계 교수들을 배제함으로서 그들에게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는 데 동조했다.

파시즘 아래서, 과학은 인종의 순수성이나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같은 인간의 특정한 가치를 옹호하는 도구가 되었다. 평화는 전쟁에 대한 준비기간으로, 군대는 국가 교육의 가장 우수한 학교로 인식되었다. 그 곳에서 모두가 침묵하는 법을 배워야 했으며, 필요하다면 정의롭지 못한 채 침묵해야만 했다. 하지만  희망의 메시지는 프랑스의 지식인들에게서 왔다.  그들은 프랑스의 파시즘과 싸웠고, 반파시즘의 구호아래 인민 전선을 조직해 대중을 이끌었다. 위대한 지식인들인 프레드릭 졸리옷(이레네의 남편), 이레네 졸리옷 퀴리(퀴리 부인의 딸), 랑게빈, 바블로 피카소, 그리고 장 폴 사르트르 등이 이러한 인민 전선의 상징이 되었고, 인민 전선의 주축에는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다.

버날은 히틀러 치하의 제3제국이 세계 대전을 일으킬 것이고, 영국 과학자들은 이러한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결론내린다. 이러한 언급은 버날과 그의 친구들이 영국 정부로부터 관심을 받게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비록 버날이 지옥의 불꽃과도 같이 빨간 공산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극렬한 반파시즘 운동에 헌신했었기에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버날은 전쟁 기간동안 군사작전 연구에 많은 기여를 한 선구자였고, 실제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관여하기도 했다. 그는 풍속에 상관 없이 노르망디 해안가의 사진을 항공사진으로 찍을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는 특별한 공헌을 했다. 해안가의 굴곡을 정밀히 측정하게 됨으로써 탱크나 기타 중장비들이 안전하게 상륙할 수 있는지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이러한 반파시스트 연합은 무너졌고, 냉전체제가 시작되었다. 버날은 그의 친구 프랑스의 졸리옷처럼 이러한 체제의 성립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게다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은 과학의 결과물이 파괴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도록 놔두어서는 안된다는 과학자의 책임을 더욱 강화시켰다.

버날은 냉전체제의 폐해를 포함한 의제로 다양한 포럼을 조직했고, 그 결과로 ‘과학 노동자 연맹’, 퍼그워시 컨퍼런스, 세계평화협의회 등이 발족되었다. 인도 과학자들인 M.N. 사하, D.D. 코삼비, S.S. 소케 등도 이러한 평화운동의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영국 과학자들로 하여금 막 독립한 식민지 국가의 과학 정책을 돕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고, 유네스코(UNESCO: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sation[footnote]내가 문화유산 지정하는 단체로만 알려져 있는 유네스코의 긴 이름을 모조리 보여주는 이유는, 유네스코의 창립이 제3세계에 과학 및 교육 문화가 공평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거기서 과학이라는 말은 쏙 빠져버렸다. 유네스코의 성립과정을 좀 공부해보면 재미있다. 쟁쟁한 과학자들이 유네스코의 성립에 기여했다. 줄리앙 헉슬리는 유네스코가 유네코가 되지 않도록 S를 넣는데 일조한 인물이다.[/footnote])의 성립을 지지했다.

버날의 기념비적인 작업인 <역사 속의 과학 Science in History>은 1950년대에 출판되었고, 소련 과학 아카데미의 한 세션은 이 저술에 대한 연구에 바쳐지기도 했다. 이 책은 단순한 과학의 연대기가 아니다. 이 책은 과학이 역사 속에서 기능해온 역할을 분석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버날에 따르면 “과학은 인간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실패하지 않을 것이며, 다만 그 능력을 이용하는 사회 조직의 부재로 인해 실패할 뿐이다.” 이처럼 과학이 실패하는 이유는 제국주의자들의 시스템이 과학의 진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인성을 멈추게 만들어 저개발을 영속화시키기 때문이다. 버날에 따르면 거대한 인간의 능력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체계가 붕괴됨으로써만 인류와 과학의 진보를 위해 사용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희망은 사회주의 체제에 있다. 그는 사회주의 체제 아래에서 이루어진 과학적 진보를 방세히 분석한다.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는 사회주의 이념의 사망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 어떤 사회에서도 사회주의 사회에서처럼 빠르게 과학이 발전했던 적은 없었으며, 과학이 인간성에 이처럼 크게 기여한 적도 없었다. 버날은 이러한 사회주의 국가들과 중국에서의 과학의 미래가 그 국가들의 내부적 안정성, 전쟁의 위협(핵전쟁을 포함한)을 피할 수 있는 능력 및 사회주의자 진영 내부의 갈등을 봉합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러한 결론은 동유럽의 발전을 보았을 때 예언적인 측면이 있었다.

버날은 1971년 9월 15일에 사망했고, 20년 후 소련은 붕괴했다. 그는 1950년대에 소련을 자주 방문했던 사람이고 스탈린 시대 및 그 이후의 소련이 가진 불완전성을 인지했을 것이다. 그는 스탈린이나 스탈린 이후의 지도자들에 대해 비난한 적이 한번도 없으므로 그가 소련의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는 조우 엔라이나 니키타 후루시초프, 마오 쩌뚱, 콰메 은크루마, 자와할라이 네루 등의 지도자들과 친분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피카소, 나짐 히크멧, 폴 로베송, 파블로 네루다 등의 반제국주의적 지식인들과도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활동은 그가 반제국주의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버날과 인도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인도를 몇번 방문했다. 그의 친구 블래켓은 과학 자문가로 인도를 자주 방문했다. 그의 제자인 도로시 호지킨은 많은 인도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들 중 일부는 벵갈루루에서 일했다. 버날의 친구 JBS 홀데인은 1950년대 인도에 거주하면서 인도 시민권자가 되었다. 인도 과학자들은 두가지 점에서 버날에게 빚을 지고 있다. 버날은 GN 라마찬드란(인도 전후의 가장 유명한 과학자)이 단백질 구조를 푸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첸나이의 한 학회에서 만났고, 콜라겐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콜라겐 샘플을 얻을 수 있는 장소를 버날이 라마찬드란에게 알려줌으로써 그의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그 만남이 라마찬드란이 콜라겐 구조에 대한 선구자적인 연구결과들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버날은 일종의 촉매였다.

버날은 1950년 푸네에서 열린 인도 과학 회의기간 동안 인도 과학 연구소의 A.R. 바수데브 무르티를 D.D. 코삼비에게 소개시킨다(버날은 그의 책 <역사 속의 과학>에서 코삼비가 과학을 ‘필요의 인지’과정이라고 정의한 것을 인용하고 있다). 코삼비는 무르티가 엥겔스의 가족, 사유 재산, 국가의 기원의 계보를 따라 인도의 역사를 분석하게 조언해주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코삼비의 과학자 사회와의 공동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는 과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생생한 토론을 자극했고, 고대 인도의 문화와 문명에 대한 토론도 벵가룰루에 정착시켰다.

버날 후기 저작의 핵심은 과학이 인류를 위한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20세기 지식의 분열로부터 야기된 과학의 혁명은 인류에게 일하지 않아도 풍요롭게 살 수 있으리라는 기대, 백만장자나 왕자가 아니더라도 시민 누구나 이러한 풍요를 누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풍요를 누리기 위해서 민중은 전쟁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연대해야 한다.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를 가리는 사상의 전투는 계속되어야 하지만, 이러한 전투가 무기나 전쟁에 의해 해결되어서는 안된다.

20세기, 과학은 낭만적인 지식 추구로부터 과학 노동자의 활동이 연구비를 대주는 대기업이나 국가에 의해 종속되는 봉급 노동이 되어버렸다. 지식의 평등한 사용은 과학노동자 모두를 포함하는 노동자 계급의 과학과 기술에 대한 민주적 요구다. 20세기의 민주혁명은 인류에게 지상 낙원에 대한 기대를 선사했다. 그 낙원에서는 누구도 선악과를 맛보는 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된다. 사회 속의 과학, 20세기에 이르러 실제 활동에 있어 지침서가 된다는 것이 입증된 그 과학은 인류가 역사를 제대로 만들어 나가도록 도와줄 것이다. 과학의 도움이 있을 때, 진정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샤테르지 박사는 벵가룰루에 있는 인도 천문물리학 연구소의 과학자다.

그래도 내가 버날보다 나은 시대에 살고 있다. 소녀시대가 활동하고 있는 시대.

11 thoughts on “혁명가로서의 과학자

  1. 순간적으로 샤테르지의 사진인 줄 알고 깜짝 놀랐음.

  2. 핑백: keizie's me2DAY
  3. 한 사람의 머리속에 지식이라는 탑을 어떻게 쌓아가는지, 그리고 그 탑의 모습들이 각자 다른지 참 신기합니다. 특히나 사회에 가치로운 모습을 그려내거나 주장하는 분들의 그것들이 각자 다르다는게 더욱 신기할따름입니다. 그런 것으로 보면 지식은 진리의 영역이 아닌가봐요. 정치가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고 말했던 정치철학가 말과 비슷하게 말이죠.

    어려운데 재밌다 ㅎㅎㅎ 우재쌤 오늘도 재밌게 보고 갑니다.

  4. 글쓴이의 평가를 받아들여 ‘사회주의 체계 안에서 과학은 더욱 발전하였고 사회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라고 한다면 대한민국의 반공주의와 과학이 사회와 유리되는 현상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가설을 세워 볼 수 있겠네요.

  5. 보통 번역된 글들은 영문에 충실하는 바람에 문법적으로 어색한 문장 구조가 많은데 김우재님 글은 매우 깔끔하네요. 번역에도 나름 일가견이 있으시군요. 전 간혹(아니 자주) 번역된 글을 읽다가 어느 순간 글의 요지가 파악이 안되는 경험을 합니다만…제가 이상한 건지 글이 이상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번역된 글들은 보통의 책보다 읽는데 몇배의 시간이 걸린답니다.(나만 그런가 -_-;)

    그러고 보면 외국 서적은 지은이 못지 않게 번역가가 뛰어나야만 책이 빛을 발하는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글을 읽다보니 김우재 님은 한글 문장에도 잘 훈련된 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여지가 있다면 번역일도 권해 드리고 싶군요.(너무 빡센가요 ㅎㅎ?) 아무튼 참 다재다능 하시다능…ㅋㅋ

  6. 저도 번역이 부드럽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John Desmond Bernal이라는 과학자의 존재를 알게 되었네요.

  7. 버날에 대한 이야기가 재밌네요. 그러고 보면 가뜩이나 과학사가 대중과 먼 상태에서, 공산주의자 과학자의 일대기란 우리나라의 반공주의와 얽혀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긴, 과학자들에게 사상이나 신념, 입장을 송두리째 거세해 버리거나, 애써 축소해 소개하다 보니 그렇겠지만 말이죠.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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