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철학자폐증 치료 백신

왜냐하면, 칸트야말로 과학이라는 타분야 분과들의 발달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자연철학자였기 때문이다.  <이상하, 칸트철학과 생물학의 관계에 관한 연구계획서를 본 후 휘갈기다!>



이택광과 조정환이 논쟁을 벌일 때, 나는 그들을 맹목적으로 비웃지 않았다. 노동자로 사는 내가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까지 그들의 논쟁에 끼어들고 영광스럽게도 논쟁의 일원으로 대접받은 것은 내게 그만큼의 ‘진지함’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택광의 글에 대한 김에녹시아의 글과, 그 글에 대한 한윤형의 반론에서 분명히 나는 김에녹시아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철학자들의 개념 하나하나를 과학주의자의 입장에서 따져들어가는 것의 효용성을 믿지 않을 뿐더러, 그 개념이 상식적이고 이해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사용되는 것이라면 굳이 과학자의 지적 우월감을 내보이는 그런 태도를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스탠스는 그렇다. 치열하고 진지한 논의에 대해, 나는 비록 그 논의의 개념들에 과학적 오류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전체적인 맥락을 보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상식적인 세계관을 지닌 학자라면 공유하는 어떤 기반이 존재하리라는 나만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철학의 자폐증을 옹호하는 이들을 혐오하는 만큼, 과학주의자들과 극단적인 회의주의자들을 경멸한다. 세상은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만큼 간단하지 않으며, 철학과 과학이라는 두 분야의 학문의 상호작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양태를 띠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막 철학이라는 분과에서 그 전통을 향유하려는 이가, 철학계의 논의 구조에 대해 나름의 항변을 하는 것에 대해 나는 충분히 관대할 수 있다. 에드워드 윌슨의 말을 빌리자면, 조직화된 학문분야간의 긴장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며, 나는 수천년의 역사를 지닌 철학에도 그러한 조직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러한 조직성이 권위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지만, 철학에 대한 연구가 권위를 지닌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전개되는 자기조직적인 체계를 갖춘 것이라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아주 단순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는 것이다. 근대과학이 등장한 이후, 적어도 서구의 철학체계는 자연과학의 발전과정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고 언제나 이에 대한 응전을 보여주는 과정 속에서 전개되어 왔다는 점이다. 굳이 데카르트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철학사에 우뚝 서 있는 바로 그 칸트가 그 대표적 인물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헤겔 이후 지속된, 그리고 프랑스를 거치며 이제 대한민국의 철학계를 접수한 그 철학적 자폐성의 태도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데리다와 벤야민, 아감벤 따위의 철학자를 전공하는 이에게, 칸트가 보여주었던 당대 자연과학에 대한 민감한 반응을 기억하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허나, 적어도 칸트를 전공한다는 이가, 철학적 자폐증을 거론하면서 단지 누구보다 칸트를 많이 읽었다는 ‘권위의식’ 따위로 나의 문제의식을 지적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자에겐 칸트를 이해할 자격이 없으며, 칸트를 만날 자격도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칸트의 번역본을 훑어본 그런 크랭크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독일에서 칸트를 공부한 과학철학자와 대화하며 5년을 보냈다. 만약 존귀하신 칸트 전공자께서 그래도 나는 칸트를 제대로 읽지 않았으니 칸트에 대한 언급을 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럴 의향이 있다. 나는 타분야의 학문체계를 존중하며 그것은 철학과 같은 인문학만이 아니라 한의학과 같은 과학과 비과학 사이를 오간다는 학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언급한 과학철학자의 견해를 밝혀보자.

아인슈타인의 글 곳곳에 칸트와 헤겔에 대한 반감이 묻어 있다. 메라의 입장이 옳다면, 이러한 사실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전문 철학자가 아닌 아인슈타인의 칸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외양으로서의 경험적 대상이 칸트에게서도 주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객관적 서술 대상이 되는데, 바로 경험을 생성하는 시공간의 조건이 칸트에게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외로 칸트가 대상을 주관적 관념과 연관시키는 것에 열성적으로 비판했다는 사실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그 조건은 기본적으로 마음의 조건이기 때문에, 물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칸트에 대한 반감은 그러한 조건에 근거한 선험성에 대한 반감이며, 경험이 마음의 산물이라는 것에 대한 반감이기도 하다.

이쯤에 이르러, 칸트 전공자는 다른 방식으로 칸트와 아인슈타인의 일체감을 과시하려고 할 것이다. 물 자체는 알 수 없고 단지 이성에 의해 호소될 뿐이지만, 그것은 또한 실천적 판단의 직접적 대상이다. 실험을 통해 물 자체를 파악하는 것은 칸트에게도 가능하다. 여기서 나타나는 ‘이론 이성'(theoretical reason)과 ‘실천 이성'(practical resaon) 사이의 긴장감 따위는 접어두자. 이러한 논증 자체에 아인슈타인이 관심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논증은 물리학자에게 필요한 지침서 개념의 지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후기에 직관을 강조했다고 해서, 그것이 경험에 대비되는 그러한 것일까? 아니다. 내가 읽은 아인슈타인은 경험의 역사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주어진 한 시점에서 여러 방식으로 제한된 인간의 경험은 유사하게 나타나며, 이에 대한 대표적 실례는 지각경험이다. 하지만 기억을 경험의 영역에서 단절시킬 이유가 없고, 또 구분이 필요하다고 해서 다른 능력이 지각경험과 단절된 것으로 취급될 이유도 없다. <J. 메라: 아인슈타인, 물리학과 실재 (1999)>, 이상하

도대체 아인슈타인은 칸트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 철학자폐아만큼은 이해했을까. 그래서 노골적으로 칸트와 헤겔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것일까. 그렇지 않다. 경험과 선험이라는 상식적인 개념적 차이만 이해할 수 있어도, 아인슈타인이 칸트에 대해 보여준 노골적 반감은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칸트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기 위해 칸트의 철학서들을 모조리 독파해야 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바보다.

“김우재 학형께! 우리의 학풍을 위해서…”라는 휘갈겨진 글이 첫장에 새겨진 왕의 책 <과학 철학>은 이런 구절로 시작한다.

질량에 대응하는 직접적인 측정량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과학을 모르는 사람이다.

측정량에 대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과학에 대해 얘기할 자격이 없다. <이상하, 과학철학, 첫페이지>

이 구절에 함축된 뜻을 푸는 것만으로도 글이 길어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작업도 철학일 것이라 생각한다. 철학자폐아가 말한 그 세 가지 종류의 철학작업 이외에 내가 몇번 언급했고, 또다시 언급해야만 하는 철학의 갈래가 있다. 그것은 전문화된 철학자 집단과는 동떨어진 영역에서 자신의 작업과 세계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이들이 삶의 막바지에 내어 놓은 사상이다. 왜 그것은 철학이 아닌가? 철학자 집단이라는 자폐아 집단(실제로는 역사적으로 그렇지도 않았던, 그 자폐아가 만들어낸 날조된 개념에 불과한)이 자신들의 저술들을 서로 언급하며 나눠 먹는 그러한 전통 외에, 언제나 자신의 작업을 민감하고 치열하게 바라보던 과학자들이 있었고, 그들의 작업은 그 자체로 완성되 철학이다. 볼츠만이 그랬고 마흐가 그랬으며, 이미 언급했던 모노가 그랬다.

과학자들 중 일부는 반드시 그들이 다루는 과학 내에 함축된 비정합성과 철학적 문제를 의식하고 있다. 어느 시대든 그 당시 이론이 안고 있는 비정합성과 철학적 문제에 관심을 가진 과학자들이 존재했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이론은 더욱 정교해진 동시에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상하, 과학 철학, p298>

예를 들어 비교적 현대 철학자에 속하는, 것도 프랑스의 철학자인 베르그송은 어떨까. 그는 철저한 실험주의자이자 철학과 역사학 및 형이상학 모두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끌로드 베르나르의 ‘철학’을 토대로 삼고 있다. 국내에도 꽤 많은 전공자를 보유한 앙리 베르그송 스스로가 끌로드 베르나르를 철학자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이유는 첫째, 베르나르가 체계적으로 철학 저술들을 섭렵한 인물이 아니고, 둘째 오히려 철학과 형이상학이라는 헛된 비실증적인 학문을 대학에서 제거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철학자폐아는 여기서 두 가지를 배워야 한다. 첫째, 베르그송과 같은 철학자도(무려 프랑스의) 스스로의 전통 속에 놓인 과학자의 사유를 철학의 기초로 삼았으며, 둘째, 철학을 제거하고자 했고, 철학 교육을 전문적인 철학자집단처럼 받지도 않았던 끌로드 베르나르의 사유가 대철학자(이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철학 전공자들에 의해 자주 불리는 것이다) 베르그송에 의해 철학이라고 불리고 있다는 점이다.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소통’을 거부하는 대통령을 악마처럼 여기면서도 정작 스스로가 ‘소통’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자폐아에 대해 길게 왈가왈부하는 것은 별 의미 없는 일이다. 나아가 더욱 추악하고 부끄러운 것은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진보적 신문들이 단지 그 자폐아가 젊다는 이유만으로 칼럼의 기고를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천재 하나 나셨다.

왕의 말로 마무리 한다. 자폐아가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날, 자폐증이 치료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과학이론 형성의 역사적 인지경로를 추적할 때 비로소 이론의 탄생배경이 된 철학적 전제들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 그 전제들은
그 시대에 대세를 이루었던 세계관, 곧 그 시대 세계이해의 사유틀을 보여준다. 과학의 역사 의존성은 단순히 과학과 철학의 역사적
상호작용만을 함축하지 않는다. 과학의 진보는 세계이해의 개념사적인 변천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형이상학 자체의 재해석이
요구된다. 철학이 다루어야 할 보편적인 문제를 부과하는 동시에 하나의 합리적인 대답으로 유도해주는 토대로서의 형이상학은
포기되어야 한다. 서구 사상사에서 경쟁하는 여러 형이상학의 관점들이 있었던 시기는 심지어 스캔들로 묘사되기도 했다
[footnote]I,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BXXXIV[/footnote].
형이상학의 독단을 제어하는 데 가장 좋은 장치는 과학이다. 문제는 과학의 뼈대를 구성하는 개념들이 경험적으로 직접 검증 혹은
반증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측면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학은 형이상학과 완전히 결별할 수 없다. <이상하, 과학 철학,
p304>

누가 나에게 왜 과학을 좋아하며 관심을 갖느냐고 묻는다면 간단히 이렇게 대답한다. 과학이야말로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정교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이상하, 과학 철학, p303>

자폐증+소녀시대로 검색하니 이 사진이 나온다. 이유는 알 수 없다.

24 Comments

  1. 헉… 나의 태연이.. 나의 태연이… 전 티파니를 좋아하지만 태연도 좋아한답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2. 제가 졌습니다.

    그런데 왜 저 사진이 자폐증+소녀시대로 검색되는지는 정말 모르겠더군요. 소녀시대 굴욕사진 모음이라는 글에 들어있던데… 그냥… 그렇다구요.

  3. 속 시원한 글이네요.정말 잘 읽었습니다. 저는 저친구가 재래시장에 대해서 아무런 근거 없이 자신의 ‘넘겨짚기’만으로 썰을 풀어 놓은 글에 조금 다른 의견을 달았다가 크게 데여본 이후로 저 친구가 얼마나 자신만의 세계에 갖혀 살고 있으며 오만하기 짝이 없는지, 그리고 왜 한윤형씨와 같은 블로거들이 그와 논쟁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지 이해하게 되었답니다.

    앞으로도 자주 놀러올게요. 사실 제가 하고 있는 사회학은 인문학이라기에도, 사회과학이라기에도 매우 애매한 스텐스를 가지고 있지만 최소한 현실 문제에 근접한 주제들을 나름대로의 체계화 된 방법론들(이를테면 통계나 설문지 기법 등)을 통해서 연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나마 정통 인문학보다는 ‘뜬구름 잡기’ 식 연구가 되어버릴 공산이 조금은 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인문학을 배우면 배울 수록 오히려 이과계열 수업들을 열심히 들으면서 기초를 쌓아야 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답니다. 프렉탈 현상이나 결정화 이론 등이 사회 현상을 보다 명료한 수식으로 표현해주는 것을 보았을 때 느꼈던 감동을 아직까지도 기억해요. 그런데 이 바닥에서 제대로 수학이나 과학적 지식들을 쌓은 채로 썰을 풀고 있는 학자들은 드물고, 대게 괜찮아 보이는 이론 혹은 개념을 차용해와서 제멋대로 사용하는 경우들이 많으니까 아마 전공자 입장에서는 황당해 보이는 경우들이 종종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야 아직까지는 야매라서 공대생이나 이과대생이 뭔가 수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면 도망부터 가는 신세이지만요(…). 언제쯤 제대로 된 내공을 쌓을 수 있으련지 모르겠네요.

    초면에 너무 주절주절 말이 많았습니다. 무더위 건강 조심하시고 즐거운 블로깅 되세요 🙂

  4. 이 글의 조정환이 혹시 사노맹의 그 조정환인가? 하고 혹시나 해서 검색했더니 역시 그 분이 맞았군요. 인생은 참 재미있는 거라는 생각이 불쑥 드는 밤입니다.

  5. 이쯤되면 논쟁이 점점 더 산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아랫글에 의하면 우재님은 칸트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웃음)

  6. 감사핣니다. 꼬꼬마는 과격한게 맘에 들더군요. 과격을 댓글에만 숨기는 이중성은 좀 혐오스럽지만. 자주 오세요 ^^

  7. 뜬금없는 질문인데 우재 님에게 생물학계에서는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견해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많이 읽은 건 아니고 예전에 “인식의 나무”라는 제목의 판본으로 나왔을 때 (지금은 “앎의 나무”로 다시 번역본이 나온걸로 알고 있음. 사서 집에 가지고 있지만 재독은 안 한 ;; )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는데 말이죠…^^;

  8. 생물학계에서 그들에 대한 재평가가 조만간 이루어지리라고 봅니다. 그들이 오토포이에시스를 주장하던 당시의 생물학계는 환원주의가 실제로 많은 일을 하고 있던 시기였으니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견해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고, 지금에 와서야 이제 생물학자들의 눈이 후성유전학이니 하는 시스템적 혹은 전일론적 관점으로 돌아오면서 그들의 견해가 재조명되리라는 생각입니다.

    생물학계에서 그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사상사에 관심있는 저같은 한심한 과학자는 극소수예요. 🙂

  9. 답변 감사합니다. 언제 한번 시간내어 다시 읽어봐야겠군요.:)

  10. 책 출판을 축하드립니다. 미르 이야기는 이제 소재가 다 떨어져가는데 언제 저걸 다 정리해서 책으로 내야하는지 암담할 뿐입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에효.

  11. 그러지말고 김우재님이 몇 개의 커리큘럼을 제시해 보셈. 엘리엇 소버니 로젠버그니 마이클 루스니 하는 하수들(응?) 씹느라고 힘 쏟지 말고, 버탈란피, 베이트슨, 마투라나/바렐라를 읽어 보자거나 아니면 또 이쪽만 읽는 사람들에게는 그 해독제로 어떤 책이 필요하다든가.

    그나저나 방금 말한 사람들도 다 주류 철학계에서는 듣보잡들. 씁.

  12. 알게 모르게 지난 1년동안 블로그에서 그 짓을 해왔자너. 하나도 안 읽은거야? 응? 알레프마져 시사적인 포스팅만 읽는겨?

  13. 이렇게 요청이 있을 때 정리해서 하라는 거. 혹시 아나, 몇몇 사람이 독회라도 만들지. 내가 말하면 무슨 설득력이 있냐고 ㅡㅡ;

  14. 나는 칸트의 번역본을 훑어본 그런 크랭크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독일에서 칸트를 공부한 과학철학자와 대화하며 5년을 보냈다…
    “김우재 학형께! 우리의 학풍을 위해서…”라는 휘갈겨진 글이 첫장에…
    ->요런 구절들은 과감히 생략해 주는 센스, 노 모님께서 조소하잖아요 ^^;;;

  15. 그러게요. 조소할 만 합니다. 제가 뭔 정신으로 저랬는지 모르겠어요. 흥분하면 물불을 안가려요. 반성하고 있습니다. 저 구절을 뺐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16. 우재 님은, 대인배셨군요. 애교로 봐 줄 만하니 신경쓰진 마십시오^^

  17. 그런데 위에서 마이클 루스나 엘리엇 소버를 하수(?)라 하심은 어떤 맥락에서 하는 말씀이신지요? 저는 영미 과학철학 공부 중인 학생입니다. 저 하수(?)분들 논문이나 책들을 수업에서 다루거나, 택스트 삼아 학회도 돌렸지만 딱히 하수(?)라고 느끼진 못했는데요. 그리고 ‘주류 철학계’란 정확히 어느 철학계를 말씀하시는건지 궁금합니다. 소버도 루스도 생물학의 철학이나 과학철학에서 에서 몇몇 고전적인 논문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저도 그 중 몇몇은 저도 읽어 보았는데….

  18. 그리고 마뚜라나나 바렐라는 생물학하시는 분들에게는 낯설지도 모르겠으나 인지과학이나 그와 관련한 철학을 전공하는 이들에게는 그나마 친숙한 석학 아닙니까? 물론 ‘사이비 비평가들’, ‘호사가 인문학'(저는 이택광류의 비평같은 분야를 ‘감히’ 이렇게 부르는데)의 담론에서야 그 특성상 ‘듣보잡’일 수도 있겠는데, 적어도 제가 아는 한은 인지과학 분야에서는 꽤 긍정적으로 검토되는 것으로 아는데요. 가끔 인용도 되고…

  19. 트랙백 달아주셔서 영광입니다. 넙죽. ^^;

    제가 글 쓰면서 여러 논점을 퉁쳐버려서, 혹시나 대충 읽고 오해하셨을까 봐 짧게 씁니다.

    ① 저는 김우재 샘 논점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입니다. 급진적인 의견이라 반발심이 생기기도 하지만, 결국 제 생각도 그 비슷하게 가더라고요.

    ② 그래도 제가 김우재 샘한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아래 링크에 따로 정리…됐다기보다는 조금 울컥해 버렸네요. ^^; 선생님은 이 정도는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

    http://wagnerian.textcube.com/672#comment-104624267

    ③ 이택광 샘 ‘초파리’ 발언은, 맥락과 의도를 떠나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김우재 샘 너무 삐치신 거 아닌가 싶은… ^^;

    ④ 김우재 샘을 포함한 과학자 집단이 진짜 날을 세워야 할 쪽은 이택광 샘보다는 과학자가 뭐라 떠들건 개무시하는-_- 사람들일 텐데요, 그런 점에서 이택광 샘은 엉뚱한(?) 사람한테 화살이 집중되니 나름대로 억울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리고 이런 양상이 사실은 반지성주의가 힘을 얻는 과정과 똑같아서 일이 더 꼬이는 듯합니다.

    건강하세요.

  20. 다른 부분들은 글의 ‘내용’들과는 상관 없으니 따로 답하지 않겠습니다. 네번째도 ‘내용’이 아니라 ‘의도’에 관한 것인데, 맥락이 중요하다고 해서 정신분석학자들처럼 매양 글의 의도만 분석하고 있다가는 아무런 토의가 진행될 수 없습니다. 이택광의 초파리 발언도 르상티망 발언도 국내 인문좌파들이 얼마나 정신분석에 매몰되어 논증과 비판으로서의 학문, 그리고 그 주체로서의 학자의 역할에서 멀어졌는지를 반증하는 결과라고 봅니다.

    애써 답하자면, 왜 제게 과학자라는 굴레를 마음대로 씌우는지요? 이택광이 정치에 대해 뭐라고 했다고 해서 그가 정치인이나 정치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뭐라고 하는 사람 봤습니까. 과학자가 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이택광을 공격하지 말고 다른 이들을 공격하라는 것도 어불성설. 그런 공격이야 이미 여러 지면을 통해 하고 있고, 이런 식의 오류를 뭐라 부르는지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님이던 이택광이던 내가 과학자라는 이유로 상당히 심란함을 느끼는 것 같은데, 그게 이 나라의 수준입니다. 과학자는 뭘 모를거라는 선입견 혹은 그것으로 선을 그어버리려는 이상한 편견. 예를 들어 어제 올린 학문이라면 그 텍스트에 논증이 있어야 한다는 툴민의 주장은상식적인 겁니다. 거기에 과학자고 뭐고 필요 없습니다. 내가 과학자라는 배경을 가진것이 그렇게 불편하다면, 여러분의 두뇌를 먼저 검사해보는 것이 옳습니다. 도킨스가 종교 이야기 할때 서양학자들이 그가 종교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하던가요? 종교학에 대해 잘 모른다고 무시할 수는 있어도, 도킨스가 과학자라는 이유로 무시하는 사람은 본적 없습니다. 그런데 이택광이나 님은 그걸 아주 자연스럾게 합니다.

  21. “매양 글의 의도만 분석하고 있다가는 아무런 토의가 진행될 수 없습니다.” →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 아래 문단을 읽어보면 조금 알 듯도 합니다.

    제가 김우재 샘 발언을 ‘과학자가 한 발언’으로 규정하는 까닭은, 자신이 정신분석학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택광 샘을 김우재 샘이 굳이 정신분석학자라 규정하고 비판하시는 까닭과 비슷하달까요.

    좀 더 구체적으로는, 김우재 샘이 ‘논증’이라는 말을 쓰신 맥락이, 이 글 본문에서 주장하신 바와는 달리, 인문학 뿌리를 부정하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은 김우재 샘이 말씀하시는 ‘논증’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인문학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논하는 것이고,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객관적인 ‘증거’보다는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가 더 중요할 때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A라는 개념에 대해 B와 C가 각각 어떻게 말했는지를 정리한 다음 그에 대해 자기 생각을 쓰는 것만으로 인문학 논문거리가 되지요. 이때 중요한 것은 B와 C가 한 말을 ‘제대로’ 정리했느냐일 뿐입니다. 이택광 샘 글을 보면 참고 문헌을 논문처럼 달지는 않아도 누가 한 말을 빌려 쓴다고 밝히는 일은 꼼꼼히 하시는 듯합니다. 그 동네에서 이미 개념어로 자리 잡은 말은 빼고요. 이것을 두고 ‘그건 논증이 아니라능’이라고 하셔 봐야 인문학자들이 공감하지 않습니다.

    반지성주의 드립은 과학계도 똑같이 당해야 하는 일인데 무슨 소린지 모르시면 할 수 없고요.

    마지막 문단은 분명히 이택광 샘이 잘못하셨는데 왜 저까지 걸고넘어지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우재 샘이 그 말로 엄청 삐치셨다는 사실은 잘 알겠습니다. 하기사, 인문학이 이렇게 공격받으니 교수 타이틀도 없이 그냥 ‘논객질’로 겨우 밥 벌어 먹고사시는 어떤 분도 삐쳐서는 괜히 저한테 화내시더라고요. 저는 이렇게 양쪽에서 다 두드려 맞고 있네요. ^^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