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년 만의 포스팅, 근황 그리고 쓰는 글들

한겨례의 사이언스온에 연재중 인글을 쓰다가 잠시 머리도 식힐겸,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나니 갑자기 버려둔 블로그가 떠올랐다. 광우병으로 촛불시위로 대한민국이 한참 어지러웠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블로깅을 시작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주제도 모르고 시사니 정치니 경제니 하는 주제들을 주워넘겼다. 지금도 그 당시의 글들을 보면 부끄러움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웃기는 것은 그런 설익고 어설픈 글이 당대 최고라는 인문학자들에게까지 읽히고, 경제 전문가들이 글에 반응을 하고, 정치관련 글들이 화재가 되었다는 점이다. 언젠가 마음이 서면 모조리 지워버려야 할지도 모를 글들이다. 그래서인가, 이젠 이명박의 헛짓거리에 웃음이 나는 것처럼, 젊은 논객들과 너도나도 정치전문가로 자처하는 이런 풍경도 우습다. 더 웃기는 건 내 모습일 것이고, 그래서 이제 과학과 관련된 글 이외의 것에 손을 대기가 두렵다.

당시에도 연재중이었던 사이언스타임즈의 글들은 <꿈의 분자>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연재 중이다.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글들로 RNA라는 분자에 관한 매우매우 지루하고 재미없는 글들이니 왠만하면 읽지 않으셔도 좋다. 이 글들은(내 생각으로는) 조만간에 마무리가 될 것이고, 시간과 여건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책으로 출간될 것이다. 편집에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 되는 이유는, 바쁜 실험 속에서 쓴 관계로 구성이 매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미르이야기>로 서술된 분량이 오히려 뒷부분에 가깝고 <꿈의 분자> 쪽이 앞으로 가야할 것 같은데 여하튼 글은 뒤죽박죽으로 진행되고 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일 지 모르지만 <RNA 정치학>같은 초호화공상SF로 마무리를 할 생각이고, 그 부분은 사이언스타임즈에 실리지 않을 것이다. 편집중인 친구의 말에 따르면 이미 상당한 분량의 글이 되었다고 하는데(벌써 600쪽 정도의 책 분량이라고) 그래도 이 책은 한 권으로 낼 생각이다. 분명히 50권도 팔리지 않을텐데, 이걸 출판하겠다는 친구가 고맙기는 하지만 2권으로 나눌 생각은 없다.

얼마전부터 연재가 시작된 사이언스온 <파리의 사생활>은 기획을 했던 오철우 기자님이나 함께 참여중인 필진(특히 이종필 박사님)들의 열정에 감동해서 참여하게 된 것이다. 모건의 전통과 시모어 벤저의 전통이 살아 숨쉬는 실험실에서 일하면서, 게다가 행동유전학을 연구하면서 이 분야의 전통을 혼자 정리해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나는 이 전통 속에 있다는 게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에. 이 글도 이미 영어로는 몇 권의 저서들이 존재하고, 한글로도 마틴 브룩스의 <20세기 유전학을 만든 초파리>라는 제목의 책과 <초파리의 기억>같은 책, 그리고 <바이오클락>같은 구체적인 주제들도 번역이 되어 있어서 조금 깊게, 그리고 다루어지지 않은 주제들을 탐색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재미없는 글이 될 작정이다. 물론 뮬러의 정치행보나 모건의 파리방에서 일어난 정치적 암투 같은 주제들은 재미있겠지만, 파리 유전학 실험들을 자세히 설명하는 작업은 나로서도 쉽지 않고 읽는 독자들에게도 괴로운 일일게다. 오기자님도 불만일테고, 독자들은 더 불만일테고, 글을 쉽게 쓰지 못하는 무능력자로서는 더더욱 불만인 셈이다. 벌써 5회나 연재가 되고 있는데 원고료도 사이언스타임즈에 비해 많이 받지 못하면서 글은 더 길게 써주는 형국이다. 부모님 생활비를 위해 글을 쓰는 주제에 참 사치가 심하다.

놀라운 일은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연구원에서 연락이 왔다는 점인데, 기초과학 정책에 대한 짧은 칼럼 형식의 글을 한 달에 2회 정도 연재해 달라는 것이다. 관심 있는 주제이기도 하고 평소의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흔쾌히 수락했다. 어지럽고 혼란스럽게 널려 있던 생각과 논문과 책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분량이 너무 짧아서 소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칼럼이 아니라 기고 형식으로 길게 가는 방법을 생각중이다. 결국은 이것도 책으로 묶고 싶은게 내 바람이니까.

돈이 되는 일도 있는데, 모 문학계간지에서 3회에 걸친 분량으로 인문학과 과학을 아우를 수 있는 주제로 글을 써달라고 청탁이 들어 왔다. <두 문화 이후>라는 제목으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다룰 생각인데, 아무래도 과학전쟁과 토마스쿤의 이야기는 기본으로 깔리게 될 것 같고,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역사도 색다른 관점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 같다. 3부는 아마도 한국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될텐데 논쟁(이랄 것도 없지만) 및 논객의 지형도를 보여주고 왜 대한민국이 과학후진국인지, 왜 과학이 변태화되어 있는지 그런 것들을 보여줄 생각이다. 실명으로 많은 이들이 거론될 것 같은데 계간지가 감당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야심차게 기획하고 있는 주제 중 하나는 과학자라는 직업의 사람들이 과학사회학자들의 말처럼 실험실에만 갇혀 있었느냐, 과학이 가치중립적이라는 말이 정말 위대한 과학자들의 행적 속에서 사실이냐, 과학자가 정치적이면 안된다는 이 땅의 선입견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느냐 이런 주제를 다루려고 한다. 방대한 작업이고 아마도 섣불리 건드리기 어려운 작업인데 그냥 내가 아는 선에서 하나씩 이야기를 끄집어 내게 될 것 같다. 이 작업은 <꿈의 분자>가 마무리 되는 시점부터 사이언스타임즈에 연재될 예정인데, 아마도 정치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작은 이야기들은 사이언스타임즈에, 정치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들은 <시사인>에 연재가 될 것 같다. 글의 통일성은 조금 떨어지겠지만 나중에 어떻게든 엮을 생각으로 가보려고 한다. 뭐 어떻게 되겠지.

그 외에도 몇가지 생각중인 기획이 있는데 ‘후성유전학(epigenetics)’에 관해서 짧게 단행본을 내자는 친구의 제안이 있었고, 안그래도 <꿈의 분자>에서 이를 다룬 터라 조금 쉽게 후성유전학과 RNA 연구의 의의를 다루어보려고 한다. 아직 과학사학자들은 연구해볼 엄두도 못내는 분야이기도 하고, 실제로 내가 연구했던, 그리고 연구중인 전공이니 별반 부끄러울 것은 없다. 이건 기획을 제안한 친구가 참으로 게으른 녀석이라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건지 알 길은 없다(이 친구는 게다가 요즘에 매우 어린 여성과 연애중이다).

며칠 전엔 <중간계에서 만나는 진실>이라는 주제로 기획이 생각났는데 그동안 공부하면서 만난 그 카테고리에 드는, 유명하지도 섹시하지도 회자되지도 않지만 내가 보기엔 내공이 중후하고 진정으로 기릴만한 그런 학자들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최근 작고한 툴민이 그런 학자들 중 하나라는 것은 분명하다. 나머지 학자들의 이름은 아마 여기에 써도 별로 알 사람이 없을 듯 하고, 쓰면 나만 손해일 듯 하니 관둬야지.

블로고스피어의 글들은 이젠 거의 안 읽는 편인데 정치에 관련된 글들은 재탕 반복될 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다지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논의나 논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블로고스피어의 글들은 내게는 노이즈다. 글을 쓰면서 읽는 논문들, 책들이 주는 감동을 블로그의 글들이 선사하지 않는다. 아마도 내 글들도 그런 잡음이 될 우려가 있다는 생각에 블로그도 휴업중이다. 나는 잡담이나 늘어 놓는 블로깅은 할 생각이 없을 뿐더러, 테터앤 미디아라는 곳도 성실한 글에 상응하는 보상을 주는 줄 알았더니 죄다 상업 블로거들 뿐이라 흥미를 잃었다. 보통 블로그에 쓰는 글 한편에 서너시간씩은 투자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땀을 빼기엔 내가 써야할 글들도 많고, 돌봐야할 초파리들도 많으며,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그런 글은 쓰고 싶지 않다.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트위터 (http://twitter.com/heterosis) 에서는 재미있게 놀고 있다. 트위터는 역시 잡담이겠지만 최근에는 과학사랑이라는 그룹도 만들었고, 정보성 글들을 읽고 스트레스를 풀고, 우울증도 예방하는 나에게는 블로그보다 훨씬 나은 도구다. 언제든 트위터에서는 나를 볼 수 있을 것 같으니 혹여 아쉬운 분들은 그리로 오시면 될 것 같다. 가끔 텀블러도 하는데 이젠 에버노트라는 툴이 생겨서 텀블러를 그닥 이용하지 않는다. 아마도 나를 계속 지켜볼 수 있는 곳은 트위터가 아닐까 한다.

물론 블로그로 할 이야기가 생긴다면(그런 정치적 혼란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지만) 다시 돌아올 것 같고, 그래서 블로그를 없애지는 않을 생각이다. 다만 블로그의 영향력에 대해 많은 회의가 생겼고, 이 공간 역시 자본주의의 공격에 지나치게 오염된 것 같아서 그닥 이 곳에 에너지를 투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블로그에 써야될 성격의 글이 생긴다면, 그리고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나는 반드시 돌아올 것 같다. 더러운 성격이 아마 나를 이곳으로 부르지 않을까?

참 많이 주절거렸는데, 이제 마무리를 해야할 것 같다. 김우재는 살아 있고, 블로그에 글을 쓰던 시절만큼 많은 글들을 쓰고 있었다. 여전히 RSS 목록에 이 블로그를 등록해 두신 분들께 죄송하고 또 고마울 뿐이다. 언젠가 다시 돌아와 미친듯이 키보드를 두드릴 그 날이 오기를, 또 오지 않기를 희망해 본다.

추신: 간만에 티스토리 편집하려니 뭐가 이렇게 느린지. 크롬에선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는 블로그를 보니 정말 정이 뚝 떨어져버렸다. 텍스트기반의 블로그 편집이 뭐가 이렇게 무거워야 하는지. 한국 은행들 들어갈때마다 드는 느낌이라 갑자기 토악질이. 최근 사진으로 짤방이나 하려고 했더니 그것도 안된다. 에잇 관두자!

19 thoughts on “백만년 만의 포스팅, 근황 그리고 쓰는 글들

  1. 정말 백만년만의 블로깅이시근영. :)
    50권이 아니라 50만권 팔리는 책이 되길 바랍니다.
    새해 선물받은 책이 [만들어진 신]인데, 지금 확인해보니 43쇄군요. ㅡㅡ;;

  2. 민노씨는 블로고스피어를 지키는 문지기군요. ㄷㄷㄷ 그러나 아마도 댓글에 대한 답은 잘 못할 것 같은. < 만들어진 신>같은 책은 삐닥하게 보셔야 제맛입니다. 읽고 나서 제 블로그의 앨런 오 서평도 읽으시고. 그나저나 토요일엔 신부님 뵈러 갑니다. 부럽죠? ㅋㅋ

  3. 미르 이야기는 꾸준히 읽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트위터에서도 여쭤봤지만 급진적 과학사 강의는 더 이어지지 않는 것인가요. (…)

  4. 사소한 오자지만 브룩스의 책 제목은 <20세기 유전학의 역사를 바꾼 초파리>로 되어 있네요.

  5. 오랜만에 RSS리더에 새글이 올라와서 와 봤습니다.
    여러 가지 글 쓰시는 근황은 트위터로 종종 알려주셔서 어느 정도 알고 있긴 했는데 이 글 보니 정리가 되네요..
    지금은 활발한 블로깅을 안 하시지만 그래도 말씀하신 것처럼 각 분야에 걸쳐 활발한 블로깅을 했었던 덕분에 이렇게 여러 곳에서 청탁이 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트위터 영향도 있지만요)

  6. 블로그를 일종의 노트로 사용하는 방법을 생각중입니다. 오늘 신부님과 대화를 하고나니 조금은 머리속에 정리가 된 듯.

  7.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가끔 허락없이 퍼가기도 하구요. 책 나오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 책 사보는 걸로 퍼간 죄값 해도 되겠죠?

  8. “후성유전학”에 대한 글 기대하겠습니다. 관심이 생긴 분야인데 전문 용어의 벽을 넘어 외국 사이트를 넘나들긴 심히 버겁고, 한국엔 딱히 자료도 별로 없는 듯 해 신경을 꺼두고 있던 형편이라 더욱.

    그나저나 트위터에선 왠지 범접하기가 힘든 느낌이시라는. 서로 수다를 떠는 분야가 확연히 탓이 크겠지만요. -_-;

  9. 아직 담배의 늪에서 못 빠져나오셨군….흠..건강 챙기삼~~

  10. 김우재님. 안녕하세요. 저는 진보신당에서 노회찬 후보님의 선거운동을 돕고 있는 박광철이라고 합니다. 저는 현재 선거본부에서 파워블로거들과 함께 현정세를 논하는 간담회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이 간담회는 반MB정국과 천안함 이슈등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현정세를 극복하고, 진보신당이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논을 하는 자리가 될 예정입니다. 이 자리에 김우재님을 비롯하여 많은 파워블로거들의 지혜를 빌리고 싶습니다. 시간은 5월 24일 저녁 7시로 계획하고 있으며, 시간은 변경이 가능합니다.

    이 외에도 홍대 앞 인디밴드(5월 24일), 프로게이머의 노동권(5월 27일)을 다루는 간담회가 추가로 진행될 계획인데 관심이 있으시다면 참여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제 연락처는 010-3052-2518입니다. 전화로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드리고 싶사오니, 여력이 있으시다면 문자나 전화를 한 차례 부탁드리겠습니다.

    – 박광철 드림

  11. 한RSS를 반년 가까이 안쓰다가 오늘 띄어 봤습니다. 김우재님 글이 있어 반가워 댓글을 남깁니다. 사실 트위터에서 자주 뵙기에 그곳에 올라오는 소식은 알고 있지만요.

    블로그가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거라는 기대는 별로 안했습니다. 다만 저를 위해 글을 썼었죠.

    가능하면 잡지에 올리시는 글을 이곳에 복사를 해주시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저처럼 게으른 사람들도 찾아서 읽지않고 여기서 볼 수 있도록요 ^^

    갑자기 전에 추천해주셨던 과학 입문서가 생각이 납니다. 산지 일년이 지났는데 아직 안 읽었네요. 오늘 찾아서 읽기 시작해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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