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사회적 원자>: 사회물리학의 오래된 역사

사회적 원자10점마크 뷰캐넌 지음, 김희봉 옮김/사이언스북스

마크 뷰캐넌의 <사회적 원자>라는 책이 출판된 모양이다. 사회학의 역사는 몇 가지 상이한 전통들의 중첩이지만, 그 과정에서 사회현상을 정량화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공통된 관심사였다. 통계학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물리학, 즉 뉴턴의 고전역학을 흉내낸 ‘사회물리학’의 조류가 있었고, 그 역사는 콩트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콩트가 처음 자신의 사회학의 명칭으로 생각했던 것이 ‘사회물리학’이었다. 사회학의 역사에서 콩트보다 어쩌면 더욱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 전통이 끊겨버린 인물이 있다. ‘평균 인간(Average men)’이라는 개념으로 유명한, 천문학자이기도 했던 아돌프 케틀레(Adolphe Quetelet, 1796-1874)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일찍이 1830년대에 사회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를 ‘사회학’이라고 명명한 사람은 콩트였다. 당시 얼마나 자연과학에 대한 신뢰와 선망이 대단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콩트가 처음 생각한 이름이 사회학이 아닌 ‘사회물리학’이었으며 이 기괴해 보이는 명칭을 서로 먼저 차지하려는 점유권 다툼가지 일어나기까지 했었다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어쨌든 그 ‘과학적’인 명칭을 1835년에 책이름으로 먼저 써버린 (혹은 콩트에게서 뺏어다 쓴) 사람이 케틀레였다. 조재근, “통계학사 인물 읽기 3: 케들레(Adolphe Quetelet, 1796-1874).” 한국통계학회 소식지 20, no. 5 (2007).
사회학의 역사는 복잡한데, 아마도 별다른 이의 없이 고전적인 사회학자의 원조로 꼽히는 두 인물은 베버와 뒤르켐인 듯 하다. 서호철에 따르면 이 외에 맑스나 지멜, 파레토, 시카고학파와 콩트가 추가되면 거의 완성된다고 한다. 교과서 수준의 사회학의 역사는 이렇게 꾸려진다고 한다.
사회학의 역사는 대개 고전사회학을 중심으로 한 사회이론이나 사회사상의 역사로 이해된다. 그러나 경험적 사회조사나 계량적 분석방법 역시 사회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많은 경우 새로운 조사, 분석방법의 도입은 단순한 기술적 진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형성하거나 나아가 세계 자체를 새롭게 다시 구성하게 된다. 사회과학 자체가 19세기까지 축적된 인구와 대량적  사회현상의 규칙성에 대한 인식, 인구통계와  ‘도덕통계’에 크게 빚지고 있다. 서호철, “통계적 규칙성과 사회학적 설명: 케틀레의 ‘도덕통계’와 그 영향을 중심으로.” 한국사회학 41, no. 5 (May 2007): 284-318.
케틀레의 ‘도덕통계’에 담긴 그의 생각은 “사람 수가 많아질수록 개인은 보편적인 사실 뒤에 묻혀버리게 된다. 그러한 사실들은 보편적인 원인에 따르는 것인데, 사회라는 것은 바로 그 보편적인 원인들에 의해 존재하고 지속되는 것이다”라는 말 속에서 잘 드러난다. 이 문장은 1835년 발표된 <인간과 그 재능 발달에 대한 연구, 또는 사회 물리학에 대한 시론>의 앞 부분에 실려 있다고 한다. 사회학에서 케틀레의 도덕통계가 사장된 이유는 간단하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뒤르켐이라는 인물의 책임을 간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서호철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회학자를 자임한 유일한 인물은 뒤르켐이었다. 사회적 현상을 사회적 수준에 서 설명하는 독립적과학을 구성하려 한 콩트의 기획의 계승을 자처함으로써 그는, 당대의 사회현상에 대해 통계자료를 수집하고 경험적 조사를 실시했던 파랑-뒤샤틀레(Parent-Duchâtelet)나 빌레르메(Louis-René Villermé, 1782~1863), 게리(André-Michel Guerry, 1802~1866), 그리고 르 플레(Frédéric Le Play, 1806~1882) 등은 물론, 무엇이 진정한 사회학적 설명인가를 놓고 그가 경합해야 했던 타르드(Gabriel Tarde, 1843~1904)와 케틀레(Lambert Adolphe Quetelet, 1796~1874)까지도 고전사회학의 계보에서 배제시킨 셈이 되었다. 뒤르켐은 <자살>에서 타르드의  ‘모방’ 이론과(제1부 제4장) 케틀레의  ‘도덕통계’를(제3부 제1장) 길게 비판했다. 그러나 타르드에게는 사회학을 개인주의적 심리학으로 환원시켰다는 혐의를 둘 수 있을지라도, 통계학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가지고 역시 사회적 현상을 사회적 수준에서 설명하려 했던 케틀레에 대한 뒤르켐의 비판은 어딘지 석연치 않다.
케틀레는 통계적 분석기법의 발전에는 독창적 업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기존의 확률이론을 도덕통계의 영역에까지 적용하고 ‘통계적 법칙’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렸으며, 국제적으로 통계, 통계학과 관련된 여러 기구들을 창설하면서 센서스기법 등의 표준화를 선도한, 활동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통계학뿐 아니라 사회학의 역사에서도 결정적인 존재이다. 콩트는 실증과학으로서의 사회학을  ‘요청’했을 뿐 스스로 그 내용을 채우지는 않았으므로, 사회 수준의 발현적(emergent) 속성들에 주목하고 사회적 사실을 사물처럼 취급한다는 등의 뒤르켐의 유명한 방법론은 기실 콩트가 아니라 케틀레를 계승한 것이었다. 뒤르켐의 사회학이 콩트 류의 역사철학에 머물지 않고 경험과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케틀레 등의 도덕통계 덕분이었다. 사회학적 분석의 한 전범(典範)으로 평가받는  <자살>에서 뒤르켐이 보여준 경험적 자료들과 그 분석방법은 실은 19세기 도덕통계의 전통계적 규칙성과 사회학적 설명   287통을 종합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케틀레의 영향이 가장 농후한  <자살>에서 역설적으로 뒤르켐이 그를 공들여 비판한 것은, 오히려 뒤르켐 자신과 뒤르켐 사회학에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 비판을 통해 뒤르켐은 도덕통계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사회학적 설명이 무엇이며, 무엇이 참으로  ‘사회적인 것’(le social)인지를 정립했던 것이다. 그에게 케틀레는 그토록 중요한 존재였다. 케틀레는 결코, ‘사회물리학’(Physique sociale)이라는 말의 우선권을 두고 콩트와 다투었다거나 하는 일화로만 이야기되어서는 안된다. 서호철, “통계적 규칙성과 사회학적 설명: 케틀레의 ‘도덕통계’와 그 영향을 중심으로.” 한국사회학 41, no. 5 (May 2007): 284-318.
케틀레를 현재의 사회학이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사회학자들의 몫이다. 다만 우리는 사회학이 학제로 정립해나가는 과정에서 케틀레가 전적으로 무시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뒤르켐은 케틀레라는 거대한 경쟁상대를 의식하면서 사회학을 정립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회학에서의 정량화(QUantification)의 역사를 비엔나의 스타일로 깔끔하게 정리한 것은 라자스펠트의 다음 논문이다. Lazarsfeld, P.F., “Notes on the History of Quantification in Sociology–Trends, Sources and Problems.” Isis 52, no. 2 (1961): 277–333. 사회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독의 가치가 있다. 아마 사회학 교과서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그런 이야기일 것 같다.
<사회적 원자>가 번역되면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상호작용이 <통섭>이후 또다시 화제가 될 모양이지만, 그런 상호작용의 역사는 17세기 뉴턴이 고전역학을 정초한 이후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던 역사다. 과학사가 코헨의 다음의 책은 그런 역사들을 개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Cohen, I. Bernard, Interactions: some contacts between the natural sciences and the social sciences. (MIT Press, 1994). 19세기 이후 이러한 상호작용의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확률적 사고’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분과학문이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예를 들어 경제학과 생리학은 확률혁명을 비껴가 있었다), 19세기~20세기, 집단을 다루는 대부분의 학문은 확률적 사고와 통계학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물리학에서 확률적 사고의 도입 자체가 그러한 시대적 흐름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흐름을 잘 풀어놓은 책이 Kruger, L, Lorenz Kruger, Lorraine J. Daston, and Michael Heidelberger, The Probabilistic Revolution: Ideas in History v. 1. (MIT Press, 1999) 이다. 매주 지인들과 모여 읽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1932년 처음 출판된 피셔의 Fisher, Ronald Aylmer, Statistical Methods for Research Workers … Twelfth edition, revised (Biological Monographs and Manuals. no. 5.). (1954) 의 서문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The original meaning of  the  word  “statistics suggests that it was the study of populations of human beings living in political union. The  methods developed, however, have nothing to do with the political unity of the group, and are not confined to  populations  of men or of social insects. Indeed, since no observational record can completely specify a human being, the populations studied are always to some extent  abstractions. If we have records of the stature of 10,000 recruits, it is rather the population of statures than the population of recruits that is open to study. Nevertheless, in a real sense, statistics is the study of populations, or aggregates of individuals, rather than of individual. Scientific theories which involve the properties of large aggregates of individuals, and not necessarily the properties of the individuals themselves, such as the  Kinetic  Theory of Gases,  the Theory  of  Natural  Selection, or  the chemical Theory of Mass Action, are essentially statistical arguments, and are liable to misinterpretation as soon as the statistical nature of the argument is lost sight of. In Quantum Theory this is now clearly recognized. Statistical methods are essential to social studies, and it is principally by the aid of such methods that these studies may be raised to the rank of sciences. This particular dependence of social studies upon statistical methods has led to the unfortunate misapprehension that  statistics is to be regarded as a branch of economics, whereas in truth methods adequate to the  treatment of economic data, in  so far as these exist, have only been developed in the study of biology and the other sciences. R.A. Fisher, pp.2. (1932)
이 문장 중 사회과학과 경제학을 다룬 부분만 번역해보자. 다음 논문에서 따왔지만 번역이 이상해서 수정했다. 윤기중, “사회과학과 통계적 방법.” 한국통계학회논문집 8 (September 2001). 설명은 생략한다.
사회 연구에 있어 통계적 방법은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사회과학이 과학의 영역에 들어오게 된 것은 주로 통계적 방법의 덕이라 할 수 있다. 통계적 방법에 대한 사회과학의 이러한 특수관계에 의해서 통계학은 경제학의 한 분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불행한 오해를 갖게 했으나, 사실은 경제학에서의 자료처리에 대한 방법들은, 그런것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대체로 생물학 과 다른 분과 과학에서 개발된 것이다.
사회학에서 케틀레가 잊혀졌듯이, 통계학 자체의 역사에서도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케틀레는 완전히 사장된다. 확률적 사고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집단의 다양성을 ‘평균 인간’으로 단일화하려 했던 그의 시도가, 사촌 다윈의 ‘변이’를 통한 ‘진화’라는 개념에 매료되었던 골턴에게 매장당하기 때문이다. 골턴은 평균에 집착하는 통계학에서 상관관계로 중심을 이동시킨 인물이다. 물리학에서 사회학으로 그리고 생물학으로, 확률적 사고의 궤적은 단일한 것이 아니다. 그 중심에 단연 통계학이 서 있다. 통계학이라는 학문의 위치는 미묘하다. 그 간학문적인 위치를 통계학자의 입으로 들어보자. 역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나는 통계학의 위치가 화학과 유사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러한 유사성을 설명하기엔 아직 공부가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두 학문의 궤적은 상당히 유사한 측면이 있다. 아직 누구도 이러한 유사성을 설명한 걸 본 적은 없다.
통계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쯤 이 학문이 지난 여러 세기동안 걸어온 길을 좀 폭넓게 알아보기 위해 이런저런 과학사 책을 뒤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연과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물리학을 자연과학의 유일한 으뜸으로 여기고 그 역사를 중심으로 자연과학사를 설명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렇다보니 자연과학사 책들 가운데에는 물리학을 중심으로 수학, 천문학, 생물학 등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통계학의 역사에 대해서는 단 한번 언급조차 않는 경우도 많았다(그런 책에 따르면 통계학은 아예 자연과학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럴 때면 자연과학사 책을 덮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사회과학의 역사를 설명하는 책들을 찾아 읽기도 했을텐데 그 책들은 마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서로 상극이기나 한 것처럼 자연과학의 역사에 대해 전혀 다루지 않고 있기 십상이었다. 당연히 거기서는 통계학의 역사도 언급되지 않는다(통계학은 사회과학도 아닌 것이다). 조재근, “통계학사 인물 읽기 3: 케들레(Adolphe Quetelet, 1796-1874).” 한국통계학회 소식지 20, no. 5 (2007).
<사회적 원자>는 최근 복잡계 과학의 성과들이 사회 현상에 적용되는 과정을 다룬다. 복잡계 과학이 사회학에 적용된 과정은 이미 셀던님의 블로그 http://exactitude.tistory.com/ 나 기타 여러 문건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셀던님이 친히 번역하신 필립 볼(Philip Ball)의 <유토피아 이론>은 일독을 권한다. 물론 이 글에 케틀레는 등장하지 않는다. 왕님의 다음 글도 일독의 가치가 있다. <시각소통-사회통계학과 아이소타입>
심리학과 경제학 그리고 사회학이 분과학문으로 정립해간 역사는 단순한 근대과학의 사회과학에 대한 적용은 아니었다. 따라서 숫자를 다룬다는 이유로, 무분별하게 계량화를 시도한다는 이유로, 사회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이유로, 이러한 시도를 가로막을 필요는 없다. 세 학문 모두 독특한 자신만의 학문정립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질적 방법론과 양적 방법론이 해당 학문이 다루는 현실적 조건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치열하게 충돌하고, 진지한 학자들이 방법론 및 사상을 치열하게 고민했을 때에야 그 학문들이 하나의 분과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원자>가 에드워드 윌슨이 이야기하는 식의 통섭으로 읽힐 필요는 없다. 분과학문들은 학문의 위계질서 속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적어도 역사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도, 윌슨의 사회생물학도, 그리고 케틀레의 사회물리학도 사회학을 자연과학의 분과로 환원시키지 못했다. 분자생물학도 비슷한 역사를 걸어왔다. 당연히 분자생물학이 물리학이나 화학으로 환원된 것도아니다. 분과 과학은 다루는 대상의 특성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유기체와 같다. 과학의 방법론은 단 하나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방법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뷰캐넌의 책은 그런 방법론의 하나로 받아들이면 된다. 이러한 시도를 물리학에 의한 사회학에 대한 공격이라던가, 물리학에 의한 사회학의 통섭으로 받아들이거나 선전하는 이들은 역사에 무지하다.
추신: 아마도 나는 이 책을 읽지 않거나, 읽더라도 순위에서 꽤나 뒤로 밀릴 것 같다. 그러니까 이 글은 <사회적 원자>를 읽지도 않은 사람의 서평 아닌 서평이다. 별 가치 없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