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사상 최악의 논증

<철학자들의 도구상자 The Philosopher’s Toolkit: A Compendium of Philosophical Concepts and Methods>라는 책의 첫 장은 철학에서 ‘논증’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에 관해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철학에서 논증의 위치는 무엇인가?
The place of reason in philosophy
It is not universally realized that reasoning comprises a great deal of what philosophy is about. Many people have the idea that philosophy is essentially about ideas or theories about the nature of the world and our place in it. Philosophers do indeed advance such ideas and theories, but in most cases their power and scope stems from their having been derived through rational argument from acceptable premises. Of course, many other regions of human life also commonly involve reasoning, and it may sometimes be impossible to draw clean lines distinguishing philosophy from them. (In fact, whether or not it is possible to do so is itself a matter of heated philosophical debate.)
The natural and social sciences are, for example, fields of rational inquiry that often bump up against the borders of philosophy (especially in inquiries into the mind and brain, theoretical physics and anthropology). But theories composing these sciences are generally determined through certain formal procedures of experimentation and reflection to which philosophy has little to add. Religious thinking sometimes also enlists rationality and shares an often-disputed border with philosophy. But while religious thought is intrinsically related to the divine, sacred or transcendent – perhaps through some kind of revelation, article of faith or religious practice – philosophy, by contrast, in general is not. Of course, the work of certain prominent figures in the Western philosophical tradition presents decidedly non-rational and even anti-rational dimensions (for example, that of Heraclitus, Kierkegaard, Nietzsche, Heidegger and Derrida). Furthermore, many include the work of Asian (Confucian, Taoist, Shinto), African, Aboriginal and Native American thinkers under the rubric of philosophy, even though they seem to make little use of argument.
But, perhaps despite the intentions of its authors, even the work of non-standard thinkers involves rationally justified claims and subtle forms of argumentation. And in many cases, reasoning remains on the scene at least as a force to be reckoned with.
Philosophy, then, is not the only field of thought for which rationality is important. And not all that goes by the name of philosophy is argumentative. But it is certainly safe to say that one cannot even begin to master the expanse of philosophical thought without learning how to use the tools of reason. There is, therefore, no better place to begin stocking our philosophical toolkit than with rationality’s most basic components, the subatomic particles of reasoning – ‘premises’ and ‘conclusions’
그러니까 논증에 기대지 않는 종류의 서구 철학’적’ 전통도 있다. 이러한 전통은 그런 점에서 공자나 노자 등의 사상과 유사하다. 동양철학이라는 말이 버젓이 사용되는데, 논증이 없다고 하여 ‘철학’이 아니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그냥 서구화된 유사’동양철학’을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1985년 호주의 과학철학자 데이빗 스토브(David Stove)“세상에서 가장 형편 없는 논증 찾기 경연대회(Competition to Find the Worst Argument in the World)”를 개최했다. 이 경연대회의 우승자는 스토브 자신이 차지했는데 그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스토브의 논증처럼 최악은 아니지만, 비슷한 수준의 논증이 있다. 마이클 데빗(Michael Devitt)의 다음과 같은 논증이라고 한다.
이런 종류의 논증으로 스토브가 비꼬는 이들은 누구인가? 혹은 이런 논증조차 사용하지 않는 소위 ‘철학자’들은 누구인가? 제임스 프랭클린(James Franklin)의 말로 들어보자. (논증은 생략한다. 이것도 최악의 논증일 수 있겠다.)
Let us not attempt to say what deconstruction or postmodernism are, to express their essence or true nature. How crude and unsympathetic that would be. Still, as in negative theology, it is possible to say what they are not, or at least to make a few playful gestures in that direction. There are obvious difficulties with presenting the arguments in the original works of Derrida, or Lacan, or Baudrillard. They do not write in any natural language, they do not put the premises before the conclusion, the conclusion is distributed over the text rather than appearing in any one sentence, positions are assumed to have been established outside the texts one is actually reading, in previous texts, or perhaps future ones, and so on.
나는 라캉을 이해했다고 말하는 철학자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들의 독해능력은 이미 하늘에 닿았다.
  1.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게 말싸움이죠 ㅎㅎ 반론들어갑니다

    1. 라캉주의를 비난하는 김우재님의 논거가 옳다고 할때, 기독교 같은 유일신론적인 종교 자체가 원천적으로 폐기되어야 할 지적사기라는 결론이 도출되는데 동의하시나요? 혹은 기독교적인 유일신론이 라캉주의보다 더 ‘논증’이라는 측면에서 더 건전하다고 여기시는지? (기독교가 라캉주의보다 세계에 더 좋은 영향을 끼쳤다..는 반론은 저도 동의하지만 이건 철학에서 말하는 논증은 아니죠.)

    2. 만일 라캉주의가 말짱 사기라면 라캉의 독자나 연구자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야 하는것 아닌가요? 어째서 피상적이기는 하지만 그들사이에서 의사소통이 가능한지 해명하실수 있는지?

    이상입니당 ㅋㅋ

  2. 칸트가 실제로 자신이 전개한 연역,추론의 전제들에 대한 논증은 하지 않았다는 점이 생각나네요.
    그래도 칸트는 적어도 자신이 ‘만약 -라면’이라고 한 점 이상은 나가지 않았는데,
    칸트에게서 배울 윤리로 그런걸 먼저 배워야할듯.

  3. 그러니까 라캉주의는 기독교인거구나!!!! 이해해뜸. 그나저나 스토커가 하나 더늘었다아~

  4. 님같은 저도의 라까보다는 나은듯.

  5. 의사소통이 된다는 증거부터 보여줘. 그나저나 논증을 하라고. 글의 핵심은 도대체 이해는 하는거? ㅜㅠ

  6. 대화할 뜻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님의 소개로 툴민을 알게됐는데 앞으로도 가끔 들러서 좋은 책이 있으면 메모해 가는 용도로만 방문하지요.

  7. 중요한 건 논쟁이 아니라 논증이겠죠. 그러니 말싸움이 제일 재미있지는 않을 겁니다. 여하간에

    1-1. 라캉주의는 일종의 이론이고 학문체계라고 자처합니다. 반면 그리스도교 일반은 무엇보다도 우선 종교이지요. 학문에서 우선시되는 부분은 논거와 주장 중 전자이고 종교는 후자(주장, 믿음, 신념)입니다. 믿음이 전제된 이후에 이 믿음을 설득시키는 과정에서 신학이 나오지요. 그렇지 않은 경우 종교학, 종교철학이 되고 이는 분명 신학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그 신학조차도 중세 천 년 동안 최소한 자신들이 설득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의 논리를 무시하고 그들의 상식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와 믿음의 영역에서 문제가 될리 없는 신의 존재, 보편자와 개별자의 문제, 논리체계의 문제 등이 끊임없이 논의되어 왔다는 건 신학이 앎의 차원에서 사람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 하물며 애초에 학문을 자처하는 라캉주의가 이러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건 당연한 요구이겠지요.
    1-2. 이택광씨의 라캉주의에 한정해서 보자면 그가 말하는 것은 아주 단순하게 보자면 라캉의 개념들이 문화분석과 비평에 합리적인 논증틀을 마련하도록 도와준다,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개념들’을 통한 체계의 형성에만 몰두하면서 개념 자체의 정당성을 과학으로부터 실증적으로 뒷받침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개념 자체에 대해 반성하지도 않는 혐의가 있다는 겁니다. 사례를 개념으로 재단하고 나면 거기에 반박의 여지는 없습니다. 단순무식한 예로 ‘세상 모든 젖소는 파랗다. 이 소는 젖소다. 그러므로 이 소는 파랗다.’, 형식적 타당성은 있더라도 정당하진 못하다는 예시를 들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정리하자면, 1) 김우재씨의 라캉주의(혹은 이택광씨의 라캉주의)에 대한 비판의 논거는 기독교를 비롯 그리스도교 일반의 신학체계에 대한 비판의 논거로 전용되지 않습니다. 2) 굳이 따지자면 그리스도교 논증이 라캉주의 논증보다 건전해 보입니다.

    2. 앞서 말씀드렸듯 비판의 초점은 라캉주의 진영에서 사용하는 개념들, 그러한 개념사용의 정당성입니다. 이에 대해 검토나 검증이 없더라도 그들 사이에 ‘말’이 통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라캉주의와 관련한 최근 논의에서 과학연구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유독 두드러지게 중심적으로 참여하시는 까닭은 문제가 되는 개념들이 경험적 실재성을 검증받지 않았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여타 라캉주의에 반대하는 철학연구자분들의 논조도 ‘경험적 실재성’은 아닐지라도 개념사용의 정당성이 검증되어야 한다는 요구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요구를 무시하고 ‘봐봐, 이거 잘 들어 맞잖아? 소녀시대에도 적용되고 손예진한테도 적용되고 촛불에도 적용된다고!’라고 주장만 하더라도 라캉 독자, 연구자들 사이의 소통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무비판적이라는 게 문제지요. 왜 프로이트 한창 욕할 때 나오던 농담 있지 않습니까? ‘다 니가 욕구불만이라 그래.’라고 하던가요? ‘끼워 맞추기’는 탁월한 상상력과 일관성만 놓고 보자면 그럴싸 하지만, 과연 그걸로 ‘학문’을 자처할 수 있을는지는 의문스럽습니다. 최소한 철학에서는 주장과 결론이 아닌 검토와 논증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이것도 정리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첨언하자면, 라캉주의자들이 말이 통하는 부분은 다들 ‘모든 소가 파랗다’라는 걸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 소도 파랗네, 와, 저 소도 파랗다’라는 식의 대화가 항상 가능하단 것입니다. 반면에 지금 비판의 대상이 되는 부분은 ‘세상 소가 왜 파랗냐?’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반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서로 말이 통해도, 짜고 치는 판, 말 그대로 사기일 가능성은 항상 있습니다. 이 포스팅 본문 그대로 말입니다;

    -蟲-

    P.S 트랙백을 걸자니 ‘라캉주의자’님 블로그의 포스팅이 아닌지라 우선 댓글로 남깁니다. 주인장이신 김우재님께서 긴 댓글이 블로그나 댓글란 취지에 안 맞는다거나 마음에 걸리신다면 자삭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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