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텅빈 대답

자연과학적 지식과 윤리적 문제로 이 문제를 소환한 까닭은 오늘날 상황에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테스의 대립구도를 옮겨 왔을 때 이런 문제의식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일단 소피스테스의 회의주의가 자연철학이 도달한 종결점이라는 건 사실이니까요. 그게 극복이라고 보는 건 님의 견해고, 나는 계승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런 종류의 대답은 학자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학자라면 “나는 X를 이렇게 주장한다(혹은 본다). 왜냐하면 이러이러하기 때문이다”라는 논거를 보강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철학을 전공하는 철학도와 국내의 꽤 알려져 있는 철학자가 그의 <메논>에 대한 해석이 그릇된 것이라고 비판을 하고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답변은 “나는 이렇게 본다”라는 텅빈 대답 뿐이다.

그가 논리학을 거부할 것은 거의 분명하기 때문에, ‘유관성의 오류’ 중에서도 ‘힘에 호소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답변에 대해, ‘논리적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는 지적을 할 생각은 없다. 타당한 비판에 대해서 저런 방식으로밖에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은 해당 주장을 끌어낼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애초부터 근거없이 애매모호한 유사성 혹은 선입견만을 가지고 ‘소피스트는 현대의 자연과학자자’라는, 글의 핵심 논거가 되는 주장을 했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식의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계속해서 답변을 회피할 것이라고 예측되기 때문에, 따로 대답을 요구하거나 듣고 싶은 생각도 없다. 왜냐하면 답을 계속 회피할수록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방식으로 논의가 계속되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글의 스타일이나 청중에 대한 설득력(사실 이것이 소피스트들이 가르치려고 했던 것인데, 물론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역설한 것이 아니라, 이런 방식만으로는 앎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치려 한 것이지만) 만으로 동의를 얻으려 할 경우에도, 결국 대답을 하지 않는 쪽이 불리하게 된다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다.

우선 그가 내놓을 수 있는 논증의 방식이 “나는 이렇게 본다”라는 것 이외에는 없다는 것을 전제하기로 하자. 소크라테스가 무지의 역설을 통해 소피스테스들에게 깨달음을 주었듯이, 그도 저런 방식의 논증을 통해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저런 방식의 논증에도 나름의 논리적 구조가 있다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 논리적 구조는 다음과 같다.

전제: A는 B다.
근거: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론: 따라서 A는 B다.

보통 이런 방식의 논증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임을 즉각 알아차릴 수 있다.

을: A는 B다.
갑: 그게 말이 돼?
을: 왜 안돼? 내 맘이지?

갑은 근거를 요구했지만, 을은 근거를 자신의 ‘신념’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이런 방식의 논증이 억지스럽고 말도 안된다고 주장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다음을 보자.

갑: 사람은 동물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갑이 주장하는 사실 명제 “사람은 동물이다”가 갑의 ‘신념’과는 상관 없이 참이므로, 이런 논증이 성립할 수 있다. 하지만 갑이 언제나 참인 사실 명제만을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소피스테스는 자연과학자다”라는 명제는 사실 명제가 아니라 ‘가치 명제’에 속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봤다”라는 말로부터 그 스스로가 이러한 명제를 내놓기 위해 ‘가치판단’을 전제했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치 명제가 전제로 오는 경우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다음의 경우를 보자.

갑: 이명박은 나쁘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제를 사실 명제에서 가치 명제로 바꾸어도 별다른 문제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치 명제라면 이러한 논증 방식은 분명히 작동한다. 문제는 그렇지 않을 경우에 생긴다.

갑: 이명박은 착하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갑의 명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가치판단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 전제는 치밀한 논거나 근거가 없다면 한국사회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따라서

그: 소피스테스는 자연과학자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는 명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근거나 논거도 없이 제시된 ‘소피스테스=자연과학자’라는 전제가 첫째, 사실 명제로서 참이거나, 둘째, 가치 명제로서 수긍할 만한 것이거나, 셋째, 가치 명제로서 수긍할 수 없는 경우에는 ‘논거’나 ‘근거’와 함께 제시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최소한의 규약도 지키지 못한다면 다음과 같은 주장에 그는 반박조차 할 수 없게 된다.

라캉은 식물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긍할 만한 가치 명제를 도입하면 다음과 같은 주장들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아니라 다윈의 적통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위의 주장엔 어느 정도의 신빙성이 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왜냐하면 다윈에서 라캉으로의 전이를 극복으로 보는 건 그의 생각이고, 나는 계승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반박이 불가능한 주장들을 산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라캉은 학자도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캉적 문화비평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학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주장에 대해 그는 반론조차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비판을 끝마칠 생각은 없다. 소피스테스들이 주장한 방식은 아무리 현대적으로 옮겨와도 자연과학적 지식이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소피스트들에 대한 헤겔 이후의 새로운 해석들을 아무리 읽어봐도 마찬가지다. 이런 ‘성실’하고도 피곤한 방식으로 논거를 제시하며 비판하는 것이 도대체 어떤 필요가 있고, 의미가 있는 동시에, 그것을 알아는 들을지 걱정이지만, 텅빈 대답으로 사태를 조용히 수습하려 하거나, 그것을 비아냥 거리는 것으로 끝내는 것은 나의 취향이 아니다. 다음 글은 그러한 종류의 비판이 될 것이다.

어제 연예대상에서 낸시랭이라는, 한 때는 꽤나 주목받았으나 이제는 스타킹의 게스트 정도가 되어버린 예술가를 보았다. 참 재미있는 메타포가 될 것 같다.

  1. 이건…..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음이다.
    왜냐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므로.
    ㅋㅋㅋㅋㅋ
    =

  2. 우아아 매우 명확하게 설명하셨네요. 차라리 난 Def 를 이것이라 정의하고 Def 로부터 이리이리 전개되었다라는 설명을 한다라면 차라리 더 논리적이었을텐데 말이죠.

  3. 안녕하세요? ^^
    신묘년 새해에는 맛난 것도 많이 드시고, 예쁜 꽃도 가끔 보시면서 즐겁게 지내시는 김우재님 되시기 바래요.

    눈팅 방문자 생활 어언 몇 달… 그러다 이렇게 덧글 답니다.
    흔히들 동양의 글은 나선형의 구조라는 걸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주장을 타당하게 받쳐줄 근거를 대지 못하는 글은 이미 많습니다. 그래서 실은 새로울 것도 없는 슬픈 현실이죠.
    말로 먹고사는 논객분들도 debate가 뭔지도 모르는 건 말할 것도 없고요.
    ‘그냥’ 자신의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한 논증이라고 생각하는 자신감은 어디서 왔는지 참.

    ‘네 앞가림이나 잘하세요’가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스타킹버전 같습니다만.

    참, 제가 생물학과(요즘은 이 이름이 아닙니다) 편입을 진심으로 심각하게 고려중입니다.
    이 험한 세상에 죽기 전에 한번 공부를 해봐야하지 않겠나 하는 엄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입니다만, 그래도 누군가가 제게 ‘미칬나?’ 혹은 ‘함 잘해봐봐!’ 이 둘 중 한가지 말을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하~. ( –)+

    건강하십시오.
    그럼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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