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독백: 정체성, 삼중뇌, 혼란한 마음

몇 번 블로그에서도 언급을 한 듯 싶고, 요즘 쓰는 글들에서도 은연 중에 드러나는 것이지만, 내 공부에는 심각한 분열양상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스스로에게 자주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내가 본업으로 삼고 있는 주제는 초파리의 행동유전학(Behavioral Genetics), 즉 내 보스인 유넝(Yun Nung Jan)의 박사후연구원 시절의 보스인 시모어 벤저(Seymour Benzer, 1921-2007)에게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는 학문이다. 벤저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 바로 조나단 와이너의 <초파리의 기억>이다. 그곳에는 막스 델브뤽(Max Delbrück, 1906-1981)이라는 불세출의 거인이 벤저의 조언자 격으로 등장하는데, 그가 또한 유넝의 박사학위 지도교수였다. 막스 델브뤽에 관해선 아주 간단하게 <통섭의 경계>라는 크로스로드의 글에 써두었으니 그걸 참고하면 될 듯 싶다.
행동유전학은 유전자가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다. 유전자가 세포에, 조직에, 질병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는 것이야 분자생물학의 발전 과정에서 매우 흔한 것이었지만, 유전자와 그것도 단일 유전자와 행동을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생물학자들에게도 다른 학자들에게도 참 무모한 짓으로 보였을 듯 싶다. 하지만 벤저는 그것을 밀어붙였고 결국 새로운 한 분야를 만들어냈다. 벤저와 코노프카(Ronald Konopka)가 함께 연구했던 생체주기(Circadian Rhythm) 혹은 생체시계(Biological Clock)에 관한 연구가 그 과정에서 초파리 연구의 거대한 축으로 등장하게 됐고, 그게 1971년의 일이다. 그 외에도 모건과 스터번트(Alfred Sturtevant, 18911970)가 초파리의 염색체에 유전자 좌위를 입력할때부터 지속되왔던 초파리의 구애 행동(Courtship Behavior)과 짝짓기 행동(Mating Behavior)가 초파리 행동유전학 연구의 또 다른 축을 이룬다.
어린시절부터 동물행동학 연구를 하고 싶었는데, 정말 우연히 나는 지금 그런 일을 하고 있다. 우리 실험실에서 행동유전학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행동을 깊게 파고 있는 연구원들이 몇몇 있었고, 또 지금도 그렇다. 벤저의 제자인 유넝에게, 그리고 행동유전학이 아주 좋은 신경생물학적 표현형을 다룬다는 면에서 행동연구가 초파리 연구자들에게는 언제나 비껴갈 수 없는 매혹적인 주제임엔 틀림이 없다. 예를 들어, 우리 실험실에선 초파리가 ‘의사결정(Decision Making)’을 할 수 있다는 논문을 사이언스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Yang, Chung-Hui, Priyanka Belawat, Ernst Hafen, Lily Y Jan, and Yuh-Nung Jan, “Drosophila egg-laying site selection as a system to study simple decision-making processes.” Science (New York, N.Y.) 319, no. 5870 (March 2008): 1679-83. 이 논문을 쓴 레베카가 내가 실험실에 들어오기 전 행동유전학 연구를 주도했었고, 지금은 미국 어딘가의 교수로 가 있다.
여하튼, 초파리의 행동연구가 단순한 반응들이나 환경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 유전적으로 고정된(genetically hardwired) 표현형들만을 다루던 지난 40여년의 역사를 지나, 초파리 행동유전학은 정말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그동안 초파리의 유전학적 도구들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제 생물학자들이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나 통계분석 등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게다가 분석도구들, 예를 들어 대량의 동영상을 분석하는 소프트웨어라던가 하는 것들의 등장이 주요했을 것이다. 그런 도구들의 발전은 초파리들의 행동을 더욱 자세히 분석하고, 자세히 말하자면 더욱 신뢰할만한 정량화를 가능하게 했다. 그 결과, 표현형만 알려져 있던 초파리 생활사의 여러 행동들이 행동유전학의 틀로 포섭되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초파리의 ‘공격성(Agression)’ 연구가 요즘 매우 활발하다. 초파리 수컷들의 공격성과 텃세싸움은 이미 30년 전에 스터번트에 의해 발견되었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신경유전학적 연구는 거의 없었다. 도구가 과학을 견인한다.
게다가 이제 행동유전학자들은 단순히 유전자와 행동의 연관관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신경회로(Neural Circuit)의 수준에서 연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뭐니뭐니해도 대세는 신경회로 연구일 것이고, 초파리는 이를 위한 최적의 연구환경을 제공한다. 유전자를 넣고 빼고 바꿔치고, 그것도 모자라 원하는 신경세포나 조직 나아가 단 하나의 세포에서만 그 유전자를 넣고 빼는 기술들이 초파리에서는 모두 가능하다. 가히 유전학적 도구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도구들의 도움으로 행동유전학자들은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뇌연구가 대세라고 하는데, 초파리는 그러한 연구들의 기초를 제공하는 매우 훌륭한 도구로 이미 자리잡고 있다. 예를 들어, 이번주 네이쳐지에는 다음과 같은 짧은 리뷰와 함께 한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수컷과 암컷 초파리의 뇌부위가 도대체 어떻게 다른가라는 주제를 다룬다. 실험기법을 읽어볼 사람은 없겠지만, 정말 엄청난 인내와 아이디어가 요구되는 작업이었던 것 같다. +리뷰: Benton, R., “Neuroscience: Sexy circuits.” Nature 468, no. 7324 (2010): 638–640. +연구논문: Ruta, Vanessa, Sandeep Robert Datta, Maria Luisa Vasconcelos, Jessica Freeland, Loren L. Looger, and Richard Axel, “A dimorphic pheromone circuit in Drosophila from sensory input to descending output.” Nature 468, no. 7324 (December 2010): 686-690. 초파리의 행동유전학에 관한 이런 논문들이 거의 매주 네이쳐 지를 장식하고 있고, Current Biology라는 잘나가는 저널은 아예 행동유전학으로 거의 도배를 하다시피하는 지경이다.
공격성 연구 외에도 환경에 의존적인, 즉 맥락의존적인(context-dependent)한 행동들이 초파리에게서도 속속 등장하고 있고, 행동유전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초파리가 단순한 동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논문을 보면 좋을 것 같다. Chittka, Lars, and Jeremy Niven, “Are bigger brains better?” Current biology : CB 19, no. 21 (November 2009): R995-R1008. 대가리가 크다고 좋은 건 아니다. 가끔 한국의 과학정책가들과 과학자들은 많은 돈이 투자되고 있는 생쥐를 이용한 유전자 연구가, 대부분 초파리에서 발견된 유전자의 기능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임을 잊는다. 초파리와 예쁜꼬마선충이 없었다면 생쥐 연구도 없다. 이건 현재 진행중인 행동유전학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초연구란 그렇게 천천히 하지만 무겁고 깊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맥락의존적인 행동들이라봐야 결국 초파리로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사회적 행동(Social Behavior)외에는 없다. 이런걸 사회생물학(Sociobiology)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에드워드 윌슨의 연구와 현재 초파리, 그리고 조금씩 꿀벌과 개미에서도 진행중인 사회적 행동의 연구는 윌슨과 같은 박물학자들의 전통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이루어져 온 것이다. 이들은 모두 모건의 제자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윌슨의 사회생물학이 진화의 관점에서 사회성 연구를 시도한다면, 현재 주류를 이루고 있는 행동유전학자들은 그런거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이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어떻게 유전자와 유전자들의 네트워크, 그리고 신경회로가 행동을 조절하며, 또 신경회로와 유전자들은 어떻게 환경의 신호를 받아들여 행동을 조율하는가라는 철저하게 생리학적인 문제다. 이름이 비슷하다고 제발 착각들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매트 리들리(이젠 완전히 자신의 신자유주의적인 이념을 드러내는 것 같은데)가 <이타적 유전자>에선가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깊이 논증하지도 않은 짧은 말이었지만, 그의 분석이 맞다. “진화심리학은 계속 인류의 공통분모를, 행동유전학은 개성을 찾아나간다. 두 학문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이 말의 뜻을 아는 사람만이 생물학에 대한 메타생물학을 논할 자격이 있다.
이런 복잡한 행동들이 초파리를 통해 연구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알 수 있는 최고의 종설논문이 바로 소코로프스키(Marla B. Sokolowski)의 다음 논문이다. 이 논문을 요약하거나 따로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이 논문이 그 자체로 완벽하기 때문이다. 그냥 읽으면 되는 그런 훌륭한 논문이다. Sokolowski, Marla B, “Social interactions in “simple” model systems.” Neuron 65, no. 6 (March 2010): 780-94.
여하튼간에, 내 본업은 위와 같은 흐름 속에서 초파리의 행동을 샅샅히 유전학적으로 해부하는 것이다. 지금 작성중인 논문도 마찬가지고, 지금 하는 일과 앞으로 할 일도 그렇다. 하지만 매체에 기고하는 글들을 통해 이 주제를 다루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초파리 연구자들이나 관심이 있을만한, 새로운 GFP 단백질을 통한 영상기법의 개발과 같은 논문이라거나, cVA라는 초파리의 호르몬이 공격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를 일반에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까? 아니 소개를 한다해도 그것이 당장 대중에게 도움은 될까? 사이언스온의 <파리의 사생활>을 쓰다가 잠정적으로 중단한 이유가 그것이다. 물론 초파리 유전학의 역사를 아직 충분히 경험해보지 못했고, 내가 아는 지식도 일천하기 때문이지만, 그런 주제의 글들이 어떤 방식으로 쓰여져야 하는지에 대해 나는 아직 깊게 고민해보지 못했다. 그 연장선상에 있는 글이 사이언스타임즈에서 연재되었고 이제 연재가 끝난 <미르 이야기-꿈의 분자>다. <미르 이야기>는 내가 박사학위 과정동안 다루었던 RNA라는 물질이 어떻게 분자생물학을 변화시켰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중심에 놓여있다. 그 지루한 연구논문과 종설논문들을 대중들에게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분자생물학사와 진화생물학과의 연관성 속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짚어넣었고, 그 과정에서 그러한 발견의 과학철학적 의미도, 과학사회학적인 논의도 종종 짚어 넣었다. 이러한 식으로 글을 쓰는데 있어 가장 큰 줄기가 되는 것은 과학사적 지식, 그리고 현장의 경험이었다. 그 둘을 합쳐 완성해낸 것이 <미르 이야기다>. <파리의 사생활>은 아직 내가 펜을 마구 휘두를만큼 현장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판단을 한 것이고, 그것이 학자가 글을 쓸때 염두에 둬야만 하는 무엇인가라고 여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만을 하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어제부터 연재가 시작된 <과학지식인 열전>이나, 여기저기에 기고 중인 과학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이 좀 써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희망은 희망일 뿐이지만.
초파리의 행동에 관한 논문들을 읽을 때 가장 행복하다. 하지만 과학에 관한 글들을 쓰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과학사와 철학, 사회과학을 비롯한 여러 문건들을 읽고 써야만 한다. 물론 그러한 주제들에 내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과학에 관련된 한에서, 철학과 인문학, 그리고 역사학과 사회학을 말하는 것은 내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다보니 자주 부딪힐 때도 있지만, 적어도 과학이라는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그러려고 노력한다. 적어도 과학의 역사와 관련된 분과학문들만이 내가 어느정도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렇게 과학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위해 연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논문들에 둘러쌓일 때에는 그나마 사정이 괜찮다. 적어도 그런 한에서 내 정체성에 크게 분열을 느끼지는 않는다.
문제는 내가 과학이라는 경계를 벗어나 철저하게 철학적인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경우다. 최근의 논쟁이 그런 영역에 놓여 있다. 그곳에서 내가 ‘과학적’이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는 이유는 위와 같은 읽기와 쓰기 과정에서 타분야에 대한 존중이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논증’이나 ‘수사학’, 심지어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에 대해 읽고 쓰고 있을때의 나는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다. 내가 지금 그런 주제들을 건드리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 깊은 곳엔 분명 과학이 걸려 있다. 하지만 이런 주제를 건드리는 것은 잠정적인 일로 끝나게 될 것 같다. 피곤하고 성가신 일이다. 과학과 관련된 ‘사회학적’인 문제들을, 한국이라는 과학에게는 비극적인 공간에서 다루다보니 어떻게 걸려든 주제일 뿐이다. 이런 주제의 글들은 조만간 때려치게 될 순간이 머지 않았다. 아마 블로그에서나 주절거리게 될 뿐, 매체에 그런 글들을 쓸 일은 조만간 없을 것 같다. <자음과 모음>의 연재가 끝나고, 그 글들이 단행본으로 묶여 나오는 순간이 그 마지막 순간이 될 듯 싶다. 이젠 내 책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내 연구과의 연관성이라고는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는 저 논문더미들을 좀 치우고 싶다. 지금 나의 읽기/쓰기 를 대충 헤아려 보았더니 대충 삼중의 구조로 되어 있는 듯 싶다.
(1) 연구와 관련된 읽기/쓰기
(2) 과학과 관련된 읽기/쓰기
(3) 연구 및 과학과 그닥 상관 없는 읽기/쓰기
과학사와 현장의 과학사를 번역하면서도 이미 드러냈지만 (1)과 (2) 사이에서도 가끔 정체성의 혼란이 생기는데, (1)과 (3)이야 아니 그렇겠는가. 재미 있는 건 (2)와 (3)은 아주 잘 어울리며 어떤 공통의’장(field)’에서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2)와 (3)의 연결망 속에서 쓰는 글들이 어쩌면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글쓰기가 될 듯 하지만, 의식적으로 스스로를 (1)로 밀어붙히고 있다. 아직 섵부르게 마구 나설 이유는 없다. 지금으로선 <과학지식인 열전>이나 취미처럼 쓰면 될 일이다.
더이상 정체성에 혼란 같은건 느끼고 싶지 않고, 아직 내 나이에 그런 형이상학적 논의에 가까운 사변들이나 늘어놓을 시기는 아닌 것 같고, 내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 생각해보면 내가 아는 위대한 학자들이 걸었던 길을 나는 참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퍼스와 볼츠만을 따라 걷기로 한다. 그 중간쯤에 내 길이 있을 것이다.
초파리의 기억10점조너던 와이너 지음, 조경희 옮김, 최재천 감수/이끌리오

 

바이오클락10점러셀 포스터.레온 크라이츠먼 지음, 김한영 옮김/황금부엉이

 

이타적 유전자10점매트 리들리 지음, 신좌섭 옮김/사이언스북스
  1. 정체성의 분열, 또는 불안. 내가 늘상 느끼고 두려워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함부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모습을 이렇게 글로 읽게 되는군요. 저는 월급쟁이 회사원이지만, 그리고 월급쟁이 회사원이기 때문에 공감합니다. 그런데 가끔 문제는 정체성의 ‘혼란/분열’이 아니라 ‘정체성’ 그 자체, 즉 ‘나의 정체성을 특정한 무엇으로 한정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정체성이란 무엇일까요? 제 자신에게 새로운 물음이 하나 늘었네요.

  2. 본 문에서 언급하신 Richrd Axel의 paper는 저도 읽어 보았지만 겨우 4개의 synapse가 male의 dimorphism을 결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 좀 위험해 보였습니다. 초파리의 가장 큰 장점이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이 쉽고 거기에서 우리가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는 있지만 gene to behavior 슬로건은 그 동안 mouse system에서 많이 연구되었고 또한 많은 한계점을 노출시킨 것이 사실입니다.
    이번 미국 신경과학회에 갔더니 이목을 집중 시키는 연구가 -omics 같은 분야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수많은 같은 유전자라도 어떤 유전자 network에 있느냐에 따라 그 역할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foxp2의 경우가 대표적이겠습니다. 인간의 언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있지만 mouse에 human form을 발현 시켰을 때 생쥐가 말을 하는 경우는 발생하지 않았으니까요- 이런 측면에서 초파리의 연구가 어떤 점에서 장점을 가질 수 있을까요?

  3. 어익후야. 저래 욕심이 많아서야 술 먹고 연애하고 놀 시간이 나시겠음묘? 그래도 난 흔들리지 않는 식자는 학자가 아니라 생각한묘. 초팔게의 지남철이 되숍셔 ㅋㅋ 깔깔깔.

  4. 오믹스의 한계도 있습니다. 오믹스 데이터는 재현이 잘 안됩니다. 결국 확실한 사실들을 차곡차곡 쌍아나가는데는 오믹스로부터 다시 유전자 연구로 돌아올 수 밖에 없습니다. 초파리로 지난 수십년동안 포워드 스크리닝을 했습니다. 그것도 오믹스입니다. 새롭다고 여기는 이유는 기법들이 좀 첨단스러워 보이기 때문이겠죠.

    말씀하신 논문을 가지고 안그래도 오늘 랩 동료들과 디스커션해봤습니다. 4개의 시냅스로 설명하는게 문제가 아니라, 실험에 한계가 참 많은 것 같더군요. 오늘 이야기했던 친구가 얼마전 셀에 이런 류의 논문을 낸 친구인데, 어떤 것들은 믿기 어렵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저자들도 방법에 그걸 토로해놨더군요.

    후자의 질문은 생물학자들 모두가 고민하는 것 아닌가요? 초파리 연구가 뭐가 장점이냐구요? 위에 리뷰 논문 올려놨던 것 같습니다.

  5. 초파리와 생쥐실험의 비교는 화학의 microscale 과 macroscale 의 차이를 보는 듯하네요. 근래 학교들이 돈 없다고 난리여서 몇 년 사이에 모든 실험을 microscale로 갈아 엎었죠. 전환에는 혼돈이 따르긴 하지만, microscale의 결과들이 macroscale의 결과들로 이어가고, 경제적이나 스케일적 효율성을 따지면 사실상 microscale이 우월한건 사실. 초파리라, 흥미롭네요.
    사실 과학적 내용보다 분열양상에 대한 말이 가장 와 닿네요. 저도 하루에 수십번 고민을하죠, 난 사실 글이 쓰고 싶었는데 글에대한 연구를하고 싶었는데, 세상과 함께이고 싶기도하고, 글과 함께 세상과 모두와 함께 일 수는 없을 것 같고, 왜 없을까, 할 수 있을꺼야 하다가도, 전환을 이미 맞은 지금에서 다시 전환을 찾고싶지는 않고. . 뭐 그렇네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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