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급진적 생물학자 (2008-2011), 아카이브 (2002-2013)

독백: 말도 안되는 말

우리가 흔히 어떤 사안에 대해 ‘말도 안된다’라고 표현할 때는 그것이 나의 주관적 경험에 배치된다는 인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도 안되는 사안 X를 마주했을 때,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다양하게 표출될 수 있다.
1. ‘말도 안된다’라는 발화로 만족하는 경우다. 이는 주관적인 가치판단으로 만족하자는 태도이기도 하다. 이런 태도는 “나는 그냥 X가 싫다”라는 표현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태도가 유치하고 반지성주의적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많은데,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러한 태도들이 모여서 민주주의의 근간인 투표제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즉,
2. ‘X는 말도 안된다’라고 동의하는 이들이 많을 수록, X는 정말 말도 안되는 사안이 된다. ‘실천’의 영역이라는 정치는 대충 이러한 태도들의 집합으로 구성된다.
3. 하지만 ‘X가 도대체 왜 말이 안되는가’라고 따지고 들 수도 있다. 이것이 X의 ‘타당성’을 묻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부터 평론이던 비평이던 학문이던 뭐던간에 그런 작업들이 시작된다. 논객이던 뭐던 간에 글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이 지점에 동의하고 있다. 물론 어떤 논객집단은 X의 ‘타당성’ 따위는 중요하지도 않고, 단지 패거리 집단의 수를 늘리는데 더 관심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내가 알바 아니다. 그런 논객 집단이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반지성주의라고 비난하는 제 2의 영역에 속해 있는 셈이다. 사실상 이 지점부터는 모두가 어느 정도의 ‘객관적 진리’를 주장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객관적인 것이란 다시 2로 회귀해서 주관적인 것의 집합에 다름 아님이 되기 때문이다. X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려면 그 주장에는 X보다는 나은 어떤 객관성이 포함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이 지점에서 많은 이들이 주관적인 취향을 교묘한 언술로 정당화하는데 만족하고 만다. 그것이 소피스트들의 수사학 전통이다. 그들에게 진리란 이긴 놈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세상사가 이렇게 힘의 논리로만 귀착된다면 세상은 참 불행한 것이라는 인식이 철학을 가능하게 했던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그런 입장에 서 있다. 조금은 교묘하게 이러한 태도를 보여주는 소크라테스도 그렇다.
4. 이제 여기서 ‘X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입장이 갈리게 된다. 가장 뚜렷하게 대비되는 두가지 상반되는 입장은 ‘신념’에 의존하는 것과, ‘근거’에 의존하는 것이다. 둘 중 어느 방법도 항상 옳바르다고 말할 수 없다. 신념은 근거에 의존할 때 타당성을 확보하기 때문이고, 근거는 필연적으로 신념에 의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의존하고 있는 두 태도가 인문학적이네 과학적이네 하는 이분법적 인식으로 나타난다. 실은 그렇지 않다. 그게 내 주장의 한 축이다.
5. 신념을 강조하는 이들은 근거를 소홀히 여긴다. 왜냐하면 근거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신념만이 확실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게으르다. 이제 신념만으로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는 끝났다. 그것이 경제학자들이 여러 사안에서 우위를 점하는 이유다. 물론 여전히 근거란 불완전하다.
6. 근거를 강조하는 이들은 신념을 우습게 여긴다. 그리고 근거 자체의 불완전함을 애써 무시한다. 이러한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은 가치중립성을 내세우는데, 그러한 태도 자체에 이미 가치가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이 과학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한다. 하지만 과학이 언제나 그러한 확실성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7. 따라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두 가지 입장을 적절히 조율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은 그대로 둔 채로,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느린 걸음이다. 하지만 가장 확실한 한 걸음이다. 불확실성을 인정하라. 하지만 확실성을 포기하지 말라. 신념은 근거에 무릎을 꿇어야 하며, 근거는 신념에 의해 조작되어서는 안된다. 만약 과학적 방법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과학은 이러한 방식으로 세속화되어 왔다.
8. 따라서 과학적 방법에 대비되는 인문학적 사유 따위는 없다.
9. 이러한 주장은 한 가지 ‘선험적’인 하지만 검증될 수 있는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근거가 제시된다면, 인간은 누구나(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그것에 수긍하게 될 것이다”라는 전제다. 이러한 태도가 인간의 사유구조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형성되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러한 전제가 없다면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10. 물론 ‘말도 안되는 말’이라는 표현 자체는 논리적으로 오류다. 하지만 논리학은 실천을 위한 최소한의 고려대상 이상은 아니다.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그것이 도대체 왜 말도 안되는 것인가?’일 뿐이다. 만약 ‘실천’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일테고, 그 점에 있어서 과학도 인문학도 모두 실천의 학문이다.
11. 따라서 X라는 사안의 타당성을 묻고 있을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방법론’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론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때로는 방법론끼리 갈등하고 싸워야할 수도 있다. 이는 20세기를 피의 세기로 만든 이념 간의 갈등과는 다르다. 만약 소박한 인류의 진보를 인정하는 사람들이라면, 20세기로부터 무엇인가 배웠어야 하고, 나는 그것이 이념의 독주라고 표현할 것이다. 이제 이념이 무언가에 무릎을 꿇을 때가 되었다는 것이 내 판단이고, 그 한 측면을 엿볼 수 있는 것이 과학의 세속화 과정이다. 이념이 무릎꿇어야할 무언가, 그것이 무엇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과학은 아니다.
12. 타당성을 따지는 방법론의 영역으로 넘어오면, 반지성주의적 발화를 뭐라고 하는 이들이야말로 반지성주의자들이 된다. 왜냐하면 X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방법론을 애써 무시하기 때문이다. 결국 권위에 의존하는 그들의 수사적 표현을 벗겨내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그들이 반지성주의적이라고 욕하는 대중의 표현 “나는 그냥 X가 싫다”외에는 없게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법론에 대한 반성은 3 이하의 영역에서 소박한 객관적 진리를 인정하는 이들에게는 필수가 된다.
13. 하지만 관성과 타성이 그러한 반성적 태도를 가로 막는다. 신념도 한 몫을 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20세기의 역사가 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는 타당성의 조사에 분명 중요한 도구가 된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14. 그것은 뭉뚱그려 상식이라고들 말한다. 그게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1. ‘작금’의 시대에 자신이 주장하는 바에 대한 타당한 근거를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될까요?

    ‘상식’이라는 것을 저는 예의라고도 말하고 싶습니다. 상식도 사라져 가고, 예의도 사라져 가고…
    흔히들 겉치례이고, 본질을 왜곡시키며, 굳이 필요하다고 할 수 없지 않느냐고 하는 예의가… 막상 없어지고 나면, 추하고 질긴 현실의 무게만이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거든요.
    전혀 다른 분야인가요? ^^

    비슷한 현상들이 많은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우재 박사님의 사고력은 어디까지 넘나들어야 직성이 풀리실지… 궁금 백배입니다.

    뱀발: 참, 박사님 별자리는 바뀌지 않으셨나요? 정말 뱀발이군요… ( –)+

  2. 이 글의 앞뒤에 걸쳐 있는 맥락은 알고 계시는지 잘 모르겠으나, 그 글들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리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이 글에는 ‘비평’이라는 말이 딱 한번 등장하는데, 그건 평론이나 학문이라는 말과 함께 입니다. 그걸 비평에 대한 비판으로 읽는 것은 자유인 것 같은데, 다시한번 말하지만, 저는 비평을 과학적으로 하라고 주문하거나 강요할 생각이 없습니다. 왜들 그렇게 몰아가지 못해 안달인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독백은 독백이며, 정리된 글도 아닌데, 이런 글에만 반응이 유독 심한 것을 보면, 이 글이 유독 제 글들 중에 문학비평의 소재가 될만한 성격이 있는가 봅니다. 저는 이 글에 대해 무슨 답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해야만 하는 마땅한 비판도 보지 못했습니다.

    비평이라는 작업, 열심히 잘 하시기 바랍니다. 과학에 대한 학문을 메타과학이라고 하는데, 비평에 대한 메타비평이라고 여겨도 그다지 나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는 문학비평에 대해서는 주워들은 것 이상이 없고, 어쩌다보니 그런 주제들을 섭렵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지, 앞으로도 문학비평가들이 뭘하던 간에 그다지 상관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알아서들 잘 사시면 됩니다. 참, 문학전쟁이라는 사건은 참 재미있었습니다. 뭔가 해결은 되었는지 모르겠더군요.

  3. 각자가 주관과 객관에 대해 취하는 태도에 따라 이 글을 읽는 방법이 달라질 것 같군요. 주관-객관 이분법과 실재론-반실재론 문제, 과연 사회구성원들끼리의 합의를 통해 만들어낸 사회적 진리라는 것이 존재하는건가…그런 것을 객관으로 여길 수 있는가..없는가…

    더 확장하자면, 과연 사람들은 민주주의라는걸 제대로 정당화해 본적이 있는가..그저 모두가 소박하게 그런걸 바라기 때문에 그렇다고만 얘기하고 있는게 아닌가…

    다수가 믿는바와 과학적 진실이 충돌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든 경우에 대해 민주주의가 만능인가…민주주의로 결정한 어떤 사안이 주관적 영역에 속하는거라면 굳이 근거까지 제시할 필요가 있는건가..왜 그래야만 하는가?

    …마지막에 상식이란 기준을 제시하셨으나, 이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내는 그닥 효과적인 기준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 제 생각엔, 우재님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일반 대중들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는것은 많이 다를거라고 봅니다만…(우재님처럼 “투철한 역사인식”을 갖는건 보편화된 상식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상식이란걸 모두에게 공유되는 어떤 것으로 놓는다고 하면, 이 역시 민주주의처럼 주-객의 문제를 피할 수 없겠고요. “~~하는것이 상식적이다” 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비상식”일 수도 있는 경우를 고려해야 합니다. 뭐 어쨌든 그 기준에 대해 우재님의 아직 정리되지 않은 심경은 이해를 합니다만…

    제가 이 글에서 읽어낸건…결론이야 어떻든, 우재님의 끝없는 객관에 대한 갈구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우재님을 포함한 여러 많은 사람들(특히 과학자들)이 추구하는바이기도 하고요.

    저는 나름의 해답을 상식이 아니라 합리성에서 찾았습니다. 도대체 객관-근거제시-이란걸 왜 추구해야만 하는가…그건 우리가 더 나은 뭔가를 얻기 위해서, 그리고 발전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함이겠죠. 그런데 우리가 최대한 합리적으로 상황을 바라보게 될 때 이것이 가능하다는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사에 합리적이려고 노력하는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상식만큼이나 합리성 역시 아주 복잡하고 애매한 개념이라는건 인정합니다)

    이 글은 상식을 최고의 기준으로 놓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핵심 주장부인 7엔 “내가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중점적으로 녹아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7엔 동의하지만, 우재님과는 판이한 방식으로 이런 고민들을 풀어가고 있고, 이런 고민을 우재님 혼자만 하고 있는건 아니란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컨텍스트를 놓치지 않는 쿨한 사람들도 있다는것도 같이 말이죠…

  4. 툴민이 그 합리성 혹은 이성이라는 문제를 평생 파고들었습니다. 당연히 복잡한 주제이며, 상식과 동떨어진 주제가 아닙니다.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나저나 뉘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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